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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6:1~12   미련한 자 2018. 5. 23

 

1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5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6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7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8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9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10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오늘 본문 1~12절에서 2절 빼고 매절마다 미련하자에 대하여 나옵니다. 잠언 17장에서 미련함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그때의 결론을 먼저 요약하여 보고 오늘 본문을 보려고 합니다. 그때 결론으로 누가복음 24:25~27과 고린도전서 1:18~24절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서도 부활을 믿지 못하여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든 성경에 쓴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를 향하여 미련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의 미련함과 다른 내용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영예(榮譽)란 영광스러운 명예를 말하지만 사람의 지위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련하고 어리석고 우둔한 자가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런 자는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벼나 보리를 수확할 때에 거의 다 익은 것을 기계로 추수하지만 옛날에는 낫으로 베어 논과 밭에 늘어서 말린 후에 거두어들입니다. 그런데 추수 때에 계속 비가 오면 베어놓은 벼나 보리가 싹이 나거나 썩어버리면 완전히 못 쓰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명예로운 자리에 앉으면 그 단체가 망쳐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가정이나 회사나 교회나 국가나 어느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련하고 어린 석은 자가 망치게 되는데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입니다(14:1,53:1). 이런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라면 그야말로 한 여름에 눈이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처럼 모든 것을 망치게 됩니다.

 

본문 2절입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전체에서 미련한 자가 다 나오는데 이 구절만 미련한 자에 대한 말이 없지만 미련함과 연결시켜서 이 구절을 보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단체를 잘 운영하려면 당근과 채찍을 잘 사용하여야 합니다. 잘하는 자에게는 포상을 하고 잘 못하는 자는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리를 교회에도 도입을 하여 축복과 저주라는 단어로 사용합니다.

 

우리는 다 복 받기를 원하고 저주 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복과 저주라는 개념을 성경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개념으로 복과 저주를 생각합니다. 부자가 되면 복, 가난하게 되면 저주, 건강하면 복 병들면 저주, 높아지면 복 낮아지면 저주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난하게 되고 병이 들고 낮아지더라도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것이 복이며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저주입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저주임을 알지 못하기에 썩어질 것을 복으로 여기고 그것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예레미야 2:1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악만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의 실상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자기 살길을 마련하려고 온갖 것으로 가득 채우지만 그것이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짓입니다. 많은 수확을 보관하려고 창고를 늘리고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쉬자고 할 때에 주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인색하고 자기에 대하여 부요한 이런 상태를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제법 큰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래서 당회에서 잘못하는 일을 지적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다가 치리를 받았습니다. 치리를 받기 전에는 여러 사람들이 동조를 하다가 치리를 받으니 전부 그 장로님을 모른 체 한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 되었다고 동조하다가 왜 돌아서는 것입니까? 평소에 설교와 예화를 통하여 주의 종을 잘못 건드리면 저주 받는 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나 제비가 사람의 머리 위를 돌기는 하지만 머리에 내려앉지 않는 것처럼 까닭 없는 저주는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까닭 없는 저주를 하는 자는 자기가 저주를 받습니다.

 

시편 109:17~20절입니다. “17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18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19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20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악인이 인자를 베풀지 않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며 죽이려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예로운 자리인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 저주를 옷처럼 입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판단을 따른 복과 저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저주, 까닭 없는 저주에 두려워하는 것이 미련한 사람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라고 합니다. 미련한 자를 다루려면 말과 나귀와 같이 채찍과 재갈이 필요하다고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련한 자의 등에 막대기라고 합니다. 미련한 자를 움직이는 것은 징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 영적인 것과 생명과 진리에 대하여 미련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자는 징계를 하십니다. 그 징계를 통하여 주께로 돌이키면 이런 자를 지혜로운 자라고 합니다.

 

이사야 1:2~6절입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이스라엘 백성이 미련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을 어떻게 돌이키십니까?

 

이사야 53:4~6절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너무나 미련하여 매를 맞아도 돌이키지 않는 자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한 것은 우리의 질고와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런 죄악을 대신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고 우리를 함께 짊어지시고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 내시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까닭 모를 환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문 4~5절입니다. 봉독서로 모순되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에게 대답을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알라고 한 것입니다. 저도 여러 사람과 복음을 나누어보면 대답을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고 대답해야 할 때가 있음을 압니다. 말꼬리 물기 위한 질문이나 전혀 엉뚱한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전혀 다른 말을 진리처럼 확신하고 있는 경우에 분명한 증거(證據)나 전거(典據)로 대답을 함으로 입을 닫게 할 때도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다고 합니다. 기별(寄別)에 대하여는 지난주 먼데서 오는 좋은 소식이라는 말씀을 드릴 때에 본 내용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소식을 전할 때에 미련한 자에게 보내는 것은 오히려 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주님께서 자신을 충성스럽게 여겨 복음을 맡겨주셨다고 합니다(딤전1:12). 자신이 충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도 복음을 받은 자들 중에 충성된 자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딤후2:2).

 

본문 7절입니다.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저는 자의 다리란 장애로 인하여 힘이 없이 달려있는 다리를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장애인들에게 불편하게 여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장애인들을 멸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이 아무른 힘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미련한 자도 자신의 말이 지혜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잠언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사람의 말들이기에 아무른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자체가 일하시기에 전하는 사람이 아무리 약하고 보잘 것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잠언은 사람의 지혜가 아닙니다.

 

본문 8절입니다.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영예란 이름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위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에게 어떤 영예로운 이름과 지위를 준다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물매란 다윗이 물맷돌을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이 물매에 돌을 묶어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매를 돌려서 돌을 날려 보내야 하는데 오히려 묶어둔 그 돌이 던지는 사람이나 주변 사람을 헤칠 수 있습니다. 적용을 해봅니다. 곧 있을 지방선거에 뽑히면 영예로운 자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면 영예가 아닙니다만 그런 자리에 미련한 자를 뽑으면 돌을 물매에 매는 것처럼 오히려 그 사람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다고 합니다. 8절과 연결하여 적용을 해 볼까요? 미련한 자에게 영예로운 자리를 주거나 미련한 자에게 권력을 주게 되면 그가 정책이라고 내어 놓는 것이 시민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마치 술에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를 든 것과 같습니다. 국회의원이 범죄 혐의가 있어서 구속 수사를 하려면 국회의 동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국회가 동의를 하지 않아서 구속 수사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이 만든 법이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를 휘두르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도 권력화 되면 권력을 가진 자의 말이 시행됩니다. 그런 것이 술 취한 자가 가시나무 든 것과 같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은 이렇습니다. “미련한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궁수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쏘아대는 것과 같다.” 정치 이야기가 나왔으니 계속 적용해 보겠습니다. 시장이나 대통령이나 우리가 고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뽑아서 세금으로 월급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교회도 교인들이 목사를 투표해서 청빙합니다. 그럴 때에 무엇을 보고 해야 합니까?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지혜로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한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곰을 잡으려면 곰이 다니는 길목에 커다란 돌을 매달아 둔다고 합니다. 그러면 곰이 그 돌을 머리로 받아서 떨쳐내려고 한답니다. 그러다가 결국 돌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곰의 머리가 깨어져서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곰이 얼마나 지혜로운 짐승인데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미련하여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인간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는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처럼 좋지 않다고 버린 행동을 다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는 이 말씀을 베드로 사도가 인용합니다.

 

베드로후서 2:18~22절입니다.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사도는 잠언 서에 나오는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는 말을 또 다른 속담인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는 말과 연결하여 거짓 선생들을 책망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 미련한 자는 자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서 버린 그 행위를 다시 하는 것을 개에 빗되어 미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2장은 복음을 들은 자들이 거짓 선생들의 미혹을 받아서 다시 옛 더러운 행실로 돌아가는 것을 책망하기 위하여 사용합니다.

 

베드로후서 2:1절부터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백성들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 안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 개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탐심으로 지어낸 말을 합니다. 교인들을 자기의 이득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지주의적인 요소를 가진 자들입니다. 10절을 보면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합니다. 이들은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다고 합니다.

 

이들이 자유를 준다고 말을 합니다. 진리가 자유하게 한다는 말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진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인데도 이들은 진리를 자기의 탐욕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미혹에 넘어가게 되는 것을 개들이 토한 것을 다시 먹으며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차라리 그렇게 되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이니 자유니 하면서도 복음을 알고 믿기 이전보다 더한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참으로 미련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미련한 자는 자신이 진리를 다 안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본문 12절을 봅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는 그 어떤 진리의 말씀도 듣지 않게 됩니다. 이런 자가 가장 미련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지금까지 미련하다고 말한 내용들의 사람들에게서 희망이 있다고 할 정도로 자신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는 돌이킬 수 없는 미련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방금 살펴본 베드로 후서 2장의 사람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자기들은 진리를 알고 진리로 자유 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모르던 때 보다 더한 탐욕을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은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12절입니다.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절부터 보면 우상숭배, 음행, 주를 시험함, 원망하다가 멸망한 것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의 본보기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알고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넘어질까 주의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진리에 섰고 이미 진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가장 미련한 사람이기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자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이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이런 교만들이 깨어집니다.

 

고린도후서 10:4~6절입니다.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오늘도 말씀을 듣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면서 교만해진 모든 생각과 이론들이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무릎을 꿇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참된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