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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8:1~18 응답 없는 기도 2022. 2. 2

 

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3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표제어가 상당히 깁니다.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1)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2)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헤만은 유다 지파에도 있고(대상2:6) 레위 지파 고라의 자손에도 있습니다(대상6:33, 대상15:17). 역대상 25:5절에서는 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의 선견자라고도 합니다. 헤만의 마스길이니 헤만의 교훈입니다. 곡조의 이름은 각주를 보면 병의 노래인데 다른 번역은 재난의 고통으로 번역합니다. 내용을 다 읽어보면 죽음에 직면한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극심한 환난이 가득합니다. 그런 환난에서 주야로 기도하는데도 응답도 없습니다. 이런 내용을 찬송합니다.

 

우리는 언제 찬송합니까? 심각한 문제를 만났지만, 그 문제를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 해결되었을 때 찬송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였다고 찬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여러 곳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리도 어떤 문제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여 주신다고 기도하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설교 시간에 기도 응답의 비결을 소개하여 줍니다. 눈물의 기도, 면벽 기도, 금식기도, 밤샘 기도, 릴레이기도, 작정 기도 등 수많은 기도 응답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떤 곳에서도 그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응답 없는 기도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봉독 본문 전체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는데 기도의 시작은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구원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구원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였지만, 구원받았다는 응답의 내용이 본문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믿은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본문 1~6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께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르짖은 이유는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합니다. 현재 상황이 어느 정도입니까?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스올 곧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이 인정되었고, 힘없는 용사와 같고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고,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던져진 자와 같다고 합니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않은 자 같고 주의 손에 끊어진 자 같다고 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상황을 주께서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의 진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시편 90:7~11절입니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 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 인생의 수고와 슬픔은 주의 진노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진노를 누가 알겠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시인은 주의 진노를 압니다. 주의 진노가 나를 심히 누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칠팔십 년의 인생이 수고와 슬픔뿐임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만큼이라고 숨을 쉬고 살아감은 주님의 과분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그마한 고통이 와도 주의 진노에 관한 생각보다는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하였다고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원망의 탄식 속에서도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음을 경험상 알 것입니다.

 

본문 8~10절입니다. “봉독 죽은 자와 방불한 고난이 연속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가까운 친구들마저 내게서 멀리 떠납니다. 친척만이 아니라 가족도 떠나게 됩니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을 보면 돈을 벌어오는 가족이 어느 날 커다란 벌레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자 가족이 처음에는 잘 돌봅니다. 나아서 다시 돈을 벌어올 희망을 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으면 점점 돌보지 않게 됩니다. 결국 벌레로 죽게 되고나서 가족들은 또 다른 살길을 찾아 살아갑니다.

 

지금 본문의 시인도 그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계속되는 고난을 보고서 다 떠나갑니다. 욥의 친구들은 곁에 있었지만 그들의 위로가 오히려 재난만 주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자들은 다 욥을 멀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계속되는 고난을 겪는 시인의 주변 친구들이 다 떠나갑니다. 그들 보기에 시인이 역겨운 것이 됩니다. 시인은 고난과 재난에 갇혀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간구합니다. 고통으로 눈마저 흐려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온종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겠느냐고 합니다. 지금 시인이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고난 속에서 죽어버린다면 어떻게 주를 찬송하겠느냐고 합니다.

 

본문 11~18절을 새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11 무덤에서 주님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12 흑암 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망각의 땅에서 주님의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13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고, 첫새벽에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14 주님, 어찌하여 주님은 나를 버리시고, 주님의 얼굴을 감추십니까? 15 나는 어려서부터 고통을 겪었고, 지금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몸이기에, 주님에게서 오는 그 형벌이 무서워서, 내 기력이 다 쇠잔해지고 말았습니다. 16 주님의 진노가 나를 삼켰으며, 주님의 무서운 공격이 나를 파멸시켰습니다. 17 무서움이 날마다 홍수처럼 나를 에워쌌으며, 사방에서 나를 둘러쌌습니다. 18 주님께서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을 내게서 떼어놓으셨으니, 오직 어둠만이 나의 친구입니다.”

 

이러한 탄식의 간구로 시편이 끝납니다. 그런데도 표제어는 찬송 시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는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부르시고 믿고 의지하겠습니까? 고난이 가중되어 죽음과 같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역겨운 모습인지 친구들마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믿음이지만 그러나 어떤 응답도 없이 이 시는 그대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대로 헤만이 선견(先見)자라고 합니다. 무엇을 미리 본 것입니까?

 

오늘도 박진희 씨의 시편 88편을 읽고 기록한 것을 소개합니다.

 

주의 얼굴을 찾아

 

내가 안락한 생활 가운데 있었다면

영원히 같이하겠다던 친구의 배신이 없었다면

내가 배불리 먹어 영혼이 굶주린 것을 몰랐다면

죽었으나 살았다고 자부한 나날들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오늘도 나는 깊은 어둠의 웅덩이에 빠져있으나

호흡하는 시간들을 찾아 기도하지 못했을 것을

 

태어날 때부터 나를 축복하시어

고난 가운데 나를 부르셨으나

내 순간의 육신의 기쁨으로

망각의 땅에서 살았노라춤을 추며

주를 잃어버린 자로

내 영혼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었음을

주님이시여! 분노를 거두소서

주의 막중한 손이 나를 누르오니

 

내 육신은 마르고 뼈가 앙상하지만

내 영혼이 축복받아 주께 기도하나이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지만

나를 사랑하사 태어남의 고난을 알게 하시니

전심으로 애통해하며

호흡하는 시간들을 찾아갑니다.

주님이시여! 침묵하지 마옵소서

주의 얼굴을 내게 보이시고 내 영혼을 살리소서

 

내 생명이 다하면 주를 찬양할 수 없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나이다

희미한 등불마저 꺼져버리면

주 오심을 예비할 수 없나이다

거룩히 두 손 들고 기도하나이다

이 두 손을 주의 구름 수레로 여기시고

속히 오시어 나의 찬양을 받으옵소서

 

시편 88편을 읽고 이런 시를 쓰기까지 수많은 고난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오늘 본문을 은혜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시편 기자와 같은 고난의 연속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흔히 기도 응답의 간증이라는 것으로는 아무런 위로도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욥의 친구들처럼 재난만 주를 위로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위로는, 우리의 삶과 죽음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께 버림받아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편 22:1~2절입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 221~2절의 확대와 같은 시편이 88편입니다. 시편 22편은 후반부에 땅의 모든 끝이 주께 돌아와 주를 경배한다는 소망의 내용이 있지만, 시편 88편은 그런 소망도 없이 탄식 가운데 아무런 응답도 소망도 없이 끝이 납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더욱 주님의 십자가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응답 없는 기도를 주님께서 하십니다.

 

요한복음 11:41~42절입니다.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친아버지시기에(5:17,18)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나사로도 살립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간절한 기도를 거절하심이 십자가입니다.

 

마태복음 26:37~39절입니다.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잠시라도 끊어지는 고통을 예수님만 압니다. 우리는 돈 없음이 고통이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와 일체 되심의 그 관계가 끊어짐이 어떤 고통인지 아시기에 이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잘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예수님 홀로 기도하시고 십자가로 가십니다. 그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외쳐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자기 친아들의 기도를 거절하시고 십자가에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버리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응답 없는 기도로 낙망할 때 주님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3~7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그리스도 영이 임한 구약의 선견자와 성도들이 이 길을 갔습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이 길을 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버림받지 않아야 할 유일한 아들이 버림받음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구원하여 내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자들의 공통점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응답이 없을 때 십자가 지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버림받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음을 아는 자들은 내가 원하는 기도 응답이 평생에 단 하나도 없을지라도 그리스도의 길을 생각하면서(5:7~10)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찬송하면서 믿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