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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0:1~17 영원한 거처 2022. 2. 16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1)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2)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오늘 설교 제목이 영원한 거처입니다. 날은 춥고 코로나는 폭증하는데 들어가 쉴 집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사글세와 전세의 서러움을 아는 사람들은 자기 집을 마련하는 일이 가장 큰 희망일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끌어들여서라도 자기 집을 마련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주거의 개념보다 투기의 개념이 들어간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혼을 끌어들여 자기 집을 마련하려고 하는 그 마음의 일만분의 일이라도 낡아지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영원한 거처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표제어를 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입니다. 시편에서 유일하게 모세의 시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4권에는 모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주일 오전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거처를 말씀드릴 때 이 본문을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자기 거처를 만드시기 위함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따라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에 땅에 들여놓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처소를 삼기 위함입니다. 이 처소는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이기에 여호와께서 영원 무궁히 다스린다고 찬송합니다(15:17~18).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찬양인데 시편 90편은 출애굽기 15장에 관한 화답송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봅니다. “봉독 주님이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다고 합니다. 주께서 산과 땅과 세계도 만드시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라고 찬양합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은 영원히 자존 하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입니다. 그 영원에서 영원까지 사이가 천지창조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라는 이 어마어마한 시공간도 영원에서 보면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그 영원하신 분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자들 안에 거하시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2:20~22절입니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영원한 거처에 관한 결론을 먼저 봅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마련하는데 그 터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모퉁이 돌이 머릿돌이 되어 새로운 집이 지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지어지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 영원한 처소를 소망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어떠한지를 보겠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봉독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라고 하신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결과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인데 노아 홍수 이전에는 천년을 가까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에서 끊어진 삶은 천년을 살아도 밤의 한순간과 같습니다. 낮의 한순간은 의식이라도 하지만 밤의 한순간은 잠을 자기에 순식간(瞬息間)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순식간이란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눈 깜짝할 순이며 숨 쉴 식입니다. 천년을 살아도 이와 같습니다.

 

5~6절입니다. “봉독 홍수처럼 쓸어가신다고 하시니 노아 홍수가 생각납니다. 홍수 이전에 천년을 가까이 살았지만, 그 족보는 전부 죽었더라는 말로 결론이 납니다. 물론 그중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5:24).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실 때 산채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게 되면 그도 죽어야 마땅하니 홀연히 변화시켜 이끌어 갔을 겁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재림 시에 성도의 홀연한 변화의 예표도 됩니다. 그러나 천년 가까이 살아도 노아 홍수 때 노아 가족 외에 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천년을 가까이 살아도 잠깐 자는 것과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이 저녁에 시들어 마름과 같은 인생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7~10절입니다. “봉독 주의 진노하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주님 앞에 항상 악할 뿐입니다(6:5, 8:21). 그러므로 날마다 홍수 심판과 같은 심판이 일어나도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기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간다고 합니다. 우리의 일평생이 이러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되면 무엇을 구하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날 계수함의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11~12절입니다. “봉독우리 일평생이 수고와 슬픔뿐인 이유는 주의 진노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의 노여움의 능력과 그 진노의 두려움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일평생이 수고와 슬픔만 가득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정의로운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면서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고 주장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이러한 수고와 슬픔이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난 것임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되었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셔서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합니다. 천년을 살아도 수고와 슬픔 가운데 죽었더라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데려가신다는 그 데려감을 당한 에녹의 삶을 구하게 됩니다.

 

앞에서 에녹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만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므두셀라가 죽으면 세상에 심판이 온다는 계시였습니다. 에녹은 선지자라고 유다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65세에 계시를 받고서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일하며 자녀도 낳았습니다. 그러다가 365세 때 하나님께서 데려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이 천년을 가까이 살았는데 삼 분의 일만 살다가 데려감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날 계수함의 지혜를 주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지혜가 임하면 나그네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수고와 슬픔뿐이었습니까? 아니면 늘 평안하고 형통한 삶이었습니까? 대부분은 수고와 슬픔도 있었지만 감사와 기쁨도 맛보고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와 기쁨도 이 세상의 자랑거리라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래전에 보았던 시편 73편에서 악인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늘어나고 죽을 때 고통도 없이 죽는다고 합니다. 이런 악인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른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고난이 많다고 성경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수고와 슬픔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무언지 알게 되는 자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삶, 땅에서 살다가 땅의 티끌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진노임을 아는 자들은 주께 간구하게 됩니다. 주께 돌아와 달라고 합니다. 주를 배신하고 돌아선 자가 우리인데 우리가 스스로 주께로 돌아갈 수 없으니 주님께서 우리에게로 돌아와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할 자격이 우리에게 없기에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으려고 평생을 아등바등하면서 살아온 우리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께 긍휼을 구함이 낮아진 마음입니다.

 

13~15절입니다. “봉독 주께서 돌아와 달라고 하는 간청은 주의 긍휼에 기대어 간구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의 인자하심 그 언약을 따른 사랑을 베풀어서 만족하고 즐겁고 기쁘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과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괴로움을 당한 이유는 자기들의 죄로 인한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께 이런 간구를 할 수가 있습니까?

 

16~17절입니다. “봉독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어 달라고 합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려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땅의 티끌인 인생이 하는 일이 견고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천년을 산다고 하여도 홍수로 쓸어 가버리면 하루아침에 피었다가 지는 들풀과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행하신 일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그것이 우리의 견고함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땅의 티끌 같은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본 내용을 다시 봅니다.

 

출애굽기 15:17~18절입니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이 말씀의 화답이 오늘 본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이 아니라 주께서 세우신 성소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성막도 성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성소만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성소는 어린 양의 피, 곧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됩니다.

 

오늘 본문 5~6절을 다시 봅니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하나님의 영원하신 거처와 우리 인생을 비교하여 봅시다. 우리 인생이 자기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평생을 수고하여 마련하여도 잠깐 자는 것과 같으며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 시들어 버리는 들풀과 같습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은 인생에 참된 위로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40:1~2절입니다.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 참된 위로가 된다고 합니까? 노역의 때가 끝나고 죄악의 사함을 받는 날입니다. 이날은 메시아가 오시는 날입니다. 그날을 예비하라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6~8절입니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오늘 본문 5~6절과 연결되는 말씀이지만 여기서는 말씀이 영원히 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돌이켜 달라고 함은 그 말씀의 영원함에 서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세워짐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4:1~3절입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1)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 오신 이유는 거처를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그 관계 속에 자기 백성도 참여시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그 약속을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면 성령이 임한 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그 안에 거처를 함께 하시는 겁니다(14:20,23). 이 약속대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건물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피, 곧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 내신 교회를 말합니다(20:28). 이런 교회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 모퉁이 돌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지어져 가고 있음을 에베소서 2:20~22절에서 보았습니다.

 

땅의 티끌과 같고 아침에 피었다가 지는 들풀과 같은 우리 인생 안에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거처를 삼기 위하여 하나님이 티끌과 같은 사람이 되시고 티끌 안에 오셔서 죽음으로 티끌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끌어안으시고 살리셔서 영원한 자기 거처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참여하는 자들은 인생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일평생이 주의 진노 중에 지나가는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임을 알게 된 자들은 자신이 땅의 티끌과 풀과 같은 존재임을 알기에 영원하신 주님을 믿게 됨이 복음입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입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ㄴ)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대통령 선거로 벌써 길거리가 요란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영광이라는 것들이 다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풀이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습니다. 그 영원한 말씀이 복음인데 그 복음이 담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거처가 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우리 안에 담아지려면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영광과 영원이라는 것이 다 자기중심적인 죄임을 알고 회개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그 고난 속에 십자가 안에 감추어진 영원한 거처를 봅니다.

 

골로새서 3: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자들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감추어져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자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가 된 자들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들이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에 위의 것을 찾으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