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유의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은 그 사람들의 자유의지였나? 하나님의 뜻이었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나? 요셉이 형들에게 팔린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행동이었나? 사울의 불순종은 다윗이 왕 된 것에 기여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확실하게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의 일들이 우리 인간들의 경험이나 논리, 이성 등으로 증명 가능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인간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종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짜 중에는 어느 정도 설명은 하겠지만 증명하기는 전혀 불가능 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아니 분명히 우리의 논리로는 모순인데도 그 서로 모순 돼야만 하는 것들이 전부 진리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삼위일체이고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논리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은 절대적일 수가 없고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정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건이 되어 버립니다. 십자가 사건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면 십자가 사건은 가롯 유다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논리로는 틀림없이 모순입니다. 즉 둘 중 하나가 맞으면 하나는 반드시 틀려야 된 다는 것이 우리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모순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진실인 것입니다.

 

증명자체는 불가능 하지만 궁색하나마 설명을 하자면 동네 10급짜리 바둑인 저와 프로 10단인 이세돌 기사가 바둑을 둔다고 하면 저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온갖 머리를 굴려 선택을 해도 결국 승패는 이세돌 마음대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이런 것과 같을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선택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움직입니다. 잠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결국은 하나님이 뜻 하신대로 움직이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저희를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를 재미없는 말 잘 듣는 기계로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먹으라면 먹고 자라면 자고 일어서라면 일어서고 앉으라면 앉고 너무 기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잘 들으면 자식이 사랑스러울까요? 때로는 말을 잘 들으면 기뻐하시고 잘못하면 야단을 치셔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보는 그런 것들이 자식이 더 사랑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러한 모습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나 경험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 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원하십니다.

 

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하나님의 절대 주권에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이 때 상호 모순일 수밖에 없는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고 이건 우리의 논리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현실의 삶에서는 혼동 될 수밖에 없고 어떤 사람들은 한 쪽 면만 강조해서 설명을 하려고 하면 당연히 무리가 생깁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도대체 믿음이 우리의 선택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이냐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선택이고 우리가 선택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고 예수를 믿는 것이냐? 아니면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된 것이냐? 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가 믿는 것이라면 우리가 선택하지 않아도 결국 그렇게 된다는 논리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선택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수 안 믿는 것이 우리 책임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정말 그럴까요? 모든 걸 하나님이 선택하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원하십니다. 당연히 모순되지요. 그러나 둘 다 맞습니다.

 

한국말 성경에는 이러한 것들이 잘 안 나타나서 입으로 시인하고 예수 믿는 것이 마치 우리의 선택인 것처럼만 묘사되고 이러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심해지면 묘한 공로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들의 믿음을 전제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집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우리들의 믿음을 전제로 긍휼이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에게서 이러한 믿음 나온다는 것입니다(33:19, 9:15).

 

영어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은 이러한 것들이 적당히 혼동되게(?) 씌어져 있어서 믿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이 문장 속에 나와 있습니다. 너무 많은 예가 있지만 하나만 예를 들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109~11절입니다. 개역개정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9절에도 10절에도 11절에도 믿는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말 문장으로만 보면 당연히 우리의 선택입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선택의 근본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믿는 행위는 우리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그 믿는 행위의 주체자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헬라어 성경에는(영어 성경은 version 마다 약간씩 다릅니다) 문장 속에 나타나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9절과 11절의 믿는다는 동사는 능동태로 되어있지만 10절의 믿는다는 동사뿐만 아니라 시인하다. 라는 동사도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10절을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믿는 마음을 주시고 입으로 시인하는 마음을 주시어 우리가 그렇게 하면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내가 믿었으니까라고 자랑 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 예수 믿게 하셔서 구원받게 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사실 은혜는 나의 선택과 관계없는 것이 은혜입니다. 저는 예수 안 믿으려고 별 짓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예수 믿고 이렇게 100%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은 전혀 저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이건 저의 간증). 그러니 감사 할 수밖에요.

 

로마서 1010절을 헬라어 원문에 있는 말 그대로 번역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게 되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게 되어서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태복음 2237절을 비롯하여 신/구약 성경에 너무나 많이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22:37)’ 우리의 선택이지요? 그런데 신명기 306절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다.

 

내용은 비슷한데 주체가 완전히 하나님입니다.

 

우리 선택의 모든 것은 우리가 선택하지만 하나님에게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