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6:3~4 둘째 인-화평의 제거 2020. 11. 8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지난주에 첫째인과 둘째 인을 함께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에 대한 내용을 전하면서 둘째인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볼 둘째 인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린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화평을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심판인데 이 심판이전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어떤 화평이 일어났는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원수된 것을 화평하게 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도 허무십니다. 화평에 대한 내용을 두 곳 더 봅니다.

 

로마서 5:1~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이 믿음은 이미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지만 이 역사 속에서는 환난이 있습니다. 왜 환난이 있습니까? 환난은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구약이나 신약의 성도들이 다 환난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받습니다(14:22).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분명해 집니다.

 

로마서 5:5~11절입니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지난주 골로새서의 말씀이나 이곳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어지게 되면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에, 우리가 죄인 되어 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그 피로 화목케 하셨기에 그 피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확증임을 믿습니다.

 

에베소서 2:13~18절입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평도 십자가입니다.

 

에베소서 2:19~22절입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로마서 5장과 에베소서 2장을 통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의 화목이 무엇인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원수 됨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면서 그 원수 됨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다 화목하게 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만드시는 겁니다. 그 모퉁이 돌인 예수님께서 우리가 붙어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는데 구약의 성도들을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신약의 모든 성도들도 묵시적으로 성전 삼으신 겁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지금도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성전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다른 말로 신부된 교회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화평을 맛보며 누립니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서는 환난과 함께 그 평화를 맛보기에 완전한 평화의 날 곧 재림을 소망합니다.

 

본문 3~4절을 봅니다. “봉독 둘째 인을 떼십니다. 언제 떼신 겁니까? 죽임 당한 어린 양이 떼시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고 하심으로 그 인을 떼시는 일을 하십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는 시점은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계시지만 요한이 십자가 이전으로 이끌리어 가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이에 일어난 일을 보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입니다. 부활은 그 승리의 확증입니다(1:4).

 

그러므로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인을 떼시는 것은 원수 마귀와 그를 따른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구약에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집행이 됩니다. 그래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십자가에서 원수를 이기신 심판입니다. 그러면 신약의 사람들은 언제 구원과 심판이 일어납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믿어지면 구원이 일어나고 믿어지지 않으면 그것이 심판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것이 이 세상의 끝입니다.

 

오늘은 둘째 인을 떼는 내용입니다.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둘째 생물이 오라 하니 다른 붉은 말이 나옵니다. 그 붉은 말을 탄 사람이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려고 칼이 있습니다. 둘째 인의 심판은 화평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제대로 된 화평이 있었습니까? 언제부터 화평이 없어졌는지 성경을 차례대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3:15절을 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주십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결국은 여인의 후손이 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이 전쟁을 구약성경이 여러 모델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뱀의 후손의 역할이며 누가 여인의 후손역할입니까?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아주신 아벨이 여인의 후손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 아벨을 뱀의 후손의 역할을 하는 가인이 돌로 쳐 죽입니다. 그러나 그 아벨의 피가 하늘로 호소함으로 땅이 더욱 저주를 받게 됩니다. 겉으로는 누가 이긴 것으로 보입니까? 가인이 이긴 것으로 보이지만 이 가인이 저주를 받는 겁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으로 나오는 첫 번째 사람이 아벨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식인 이스마엘과 이삭을 보시기 바랍니다. 비 약속의 자녀인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괴롭힙니다. 그러다가 쫓겨납니다. 이것을 바울사도는 두 산에 비유합니다. 이스마엘은 시내산과 그 당시의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이곳을 다 종의 자녀로 봅니다. 그러나 자유자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마엘과 이삭의 당시나 지금 이 역사 속에서나 여전히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종의 자녀가 쫓겨나는 겁니다.

 

이삭의 자녀 에서와 야곱을 보시기 바랍니다. 태어서 나오기도 전에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의 삶을 보면 에서가 남자답습니다. 야곱은 간교하게 속이는 자로 나옵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아도 에서가 훨씬 부자이고 군사도 많고 강합니다. 야곱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재산 좀 모았지만 형 에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으면 장애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의 약속의 자녀입니다.

 

성경에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이 어떤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일반 세상의 역사에서 어떤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17세기에 홉스라는 사람이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나온 유명한 말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온 말이 사회계약설입니다. 군주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군주의 권한을 상징하는 말이 성경의 리워야단에서 따온 겁니다(3:8,41:1. 74:14,104:26. 27:1). 그러나 그런 군주가 있는 국가들 간에 또 다른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 땅입니다.

 

이사야 26:20~21절을 봅니다. “20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21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바로 앞의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여호와의 분노가 지나기까지 밀실에 잠깐 숨으라고 하십니다. 밀실에 숨는 다는 것은 노아 홍수 때에 배에 타는 것과 같고 출애굽 때는 어린 양의 피 아래 있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사야 27:1절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그 리워야단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심판은 바벨론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바벨론도 하나님의 도구이지만 이들이 교만함으로 심판하여 버립니다. 이런 세상의 힘에 대한 심판이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바벨론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는 로마이지만 로마를 바벨론으로 말하는 겁니다. 세상의 정치와 경제와 종교의 가장 중심지를 음녀가 다스리는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이런 세상의 배후가 용 곧 옛 뱀 마귀 사탄이라고 합니다. 이런 악의 세력을 심판하심으로 그 악인들의 세상인 지옥은 영원히 평화가 제거 되는 곳입니다. 이것이 둘째 인의 심판입니다.

 

스가랴 9:9~10절입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예수님의 화평은 병거와 말을 끊고 활을 끊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화평을 싫어하여 병거와 말과 활이라는 육체적인 힘을 달라는 자들은 예수님을 싫어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 이들에게는 화평이 제거되는 심판입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분리가 일어납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사랑의 확대가 가족입니다. 이런 자기 사랑의 확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만인에 대한 만민의 투쟁에서 자기의 힘을 확보하려는 이런 삶이 자기 목숨을 얻으려고 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얻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제일먼저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어떻게 스스로 세상 사랑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께서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이 세상에서 분리시켜 내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며 거룩한 영이기에 세상 사랑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이 역사 속에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 사랑과 분리가 일어나는 자들이 거룩한 무리라는 성도입니다. 세상에서는 불화가 일어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참된 화평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 사랑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분리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승리하여도 그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본문 3~4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둘째 인을 떼니 붉은 말이 나옵니다. 그 탄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립니다.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재앙이 죽임 당한 어린 양이 인을 떼시는 심판입니다. 이것은 마귀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그 마귀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현재적인 삶은 만민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 가득합니다. 이런 삶은 현재도 지옥과 같지만 죽어서도 참된 평화가 제거 된 곳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지금 이 세상의 삶의 형태를 보시면 참 평화가 없습니다. 인재와 자연재해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정치적인 다툼, 경제적인 다툼, 종교적인 다툼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세게 단일정부를 만들어 혼란을 없게 하겠다는 음모론도 있습니다. 세대주의적인 해석들이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추구들이 다 가짜 평화이며 더 큰 리워야단을 추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를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와 이웃과의 평화를 맛보며 또한 그 십자가로 이룬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