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라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먼저 모든 것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목사님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모든 영광을 올립니다.

목사님 히브리서 7장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 10분의 1의 전리품을 바친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이 부분이 십일조는 절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얼핏 보면 현대 사람들이 십일조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린 예물인 것으로 보이는데요. 성경 말씀에 구지 10분의 1을 언급한 이유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싶습니다. 히브리서에는 멜기세댁을 살렘의 왕이라고 표현하였는데요.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학적 표현기법으로 하나님 즉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엔 당시 고대시대에 율법에서 10분의 1을 받는 대상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가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레위비파에 속한 낡은 율법의 요구에 따라 되신 것이 아니라 다함이 없는 생명에서 흘러 나오는 힘을 근거로 하신 것임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것 같은데요. 말씀을 대언하시는 목사님을 통하여 그 말씀을 제 가슴에 새기고 싶습니다. 


(16년 전에 설교한 내용입니다. 위의 질문에 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좀 길지만 읽어보시고  의문이 있는 것은 다시 질문바랍니다)


히브리서 7:1-10 폐일언하고 2004. 3. 10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지난주에 100년 만에 폭설이 쏟아지고, 오늘은 태풍이 붑니다. 대통령을 탄핵한다고 국회에서 발의를 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각각이 자기들의 주장과 견해가 있습니다. 탄핵을 찬성한다는 데모도 하고, 반대한다는 데모도 합니다. 그런 일에 관심 없는 것도 하나의 견해가 됩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 사람들마다 말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모두가 자기주장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견해는 다 폐하고 자기의 주장과 관점을 관철시키고 싶지만 그러나 모두가 다 신이 되어 있는 마당에 누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경우가 얼마나 불가능한지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요동하고 시끄러울 지라도 폐일언하고 자기의 주장을 흔들림 없이 이루어내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시편 2편에서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서 요동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하늘에 계신분이 비웃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난주에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으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더 높으신 분이 없기에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최종확정인 것입니다. 오늘은 그 언약을 맹세로 보증한 내용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내셨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7:1-2절을 봅니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왕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그 일하심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기대하거나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오셔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번역하니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고 합니다. 이 멜기세덱이 빌어준 복이 무엇입니까? 의의 왕이기에 의를 선물을 주는 것이며 살렘의 왕이기에 평강을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에 인간의 의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수 없을 정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 한 인간에게는 참된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의 왕이 오셔서 의를 선물로 주시면 의롭다 함을 받게 되고 그 결과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의 왕 살렘의 왕으로부터 축복을 받고나서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하여서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멜기세덱이 먼저 떡과 포도주를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떡과 포도주를 준비한 내용은 인용을 하지 않고 있지만 창세기에서는 멜기세덱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조차 멜기세덱이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하러 갔는데 작은 사병으로 연합군을 물리치고 전리품을 챙겨서 오는 중입니다. 그 전쟁의 승리가 자기의 능력과 실력이 아니었음을 멜기세덱을 만남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4:18-20절을 봅니다. “1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라함의 승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붙여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알지고 못하고 싸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붙이신 전쟁이었기에 승리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서 자기의 승리가 높으신 분의 축복으로 된 것임을 알고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여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통하여 자신의 승리가 어디로부터 오는 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복이 주어지는 그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어떠한 자질과 조건이 아님을 밝히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인물이 투입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물을 묵시적 인물이라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묶여 있는 인간으로서는 손을 쓸 수 없는 인물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7:3절을 봅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을 인하여 기뻐하였다는 것을 요한복음 8장 5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으로부터 일방적인 축복을 받는 것처럼 오늘날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을 예수님을 통하여 받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노력과 애씀과 십일조를 함으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복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거저주시는 것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을 거저주시는 것으로 믿으십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이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너희가 내 말을 들을 것인데 그렇지 아니한 것을 보니 너희가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자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이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늘 내 중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시고 자기 의가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의를 의지하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는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7:4-10절입니다. 멜기세덱이 얼마나 높은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받았다는 것은 레위지파가 이스라엘백성들에게서 십일조를 받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자기들의 형제에게서 받지만 레위지파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침으로 십일조를 받고 있는 레위지파도 아브라함의 허리에 속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죽을 자들이지만 멜기세덱은 항상 산 자로서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7:7절입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말 저런 말 다 폐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복이란 높은 자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멜기세덱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높은 분으로서 낮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멜기세덱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로 오시지 않으시고 왜 레위지파를 세웠다가 레위지파도 아닌 유다지파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까? 레위지파로 오셨다면 더 연결이 자연스럽지 아니한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지파는 율법에 의하여 세워진 제사장직분입니다.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연약함을 알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알리고 죄의 심이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하여 세워진 제사장의 연약함을 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11-25절을 봅니다.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17 증거하기를 ㄱ)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20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ㄱ)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셔야 하는지를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 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인하여 복을 받은 것처럼 오늘은 누구를 인하여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인하여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죽은 것도,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그 무엇도 다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여러분이 무언가 말하고 싶어서 무언가 입술이 달싹거리지 않습니까? 그럴 때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겠습니까?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복 빎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정말 감사하고 기쁜 소식이 되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낮은 자 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거북스럽게 들리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무엇이 된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가 고맙지 않고 예수 잘 믿는 자기가 드러나고 싶은 사람은 이런 말씀에 대하여 은근히 불만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예정하시고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주시는 방법으로만 구원하실 수밖에 없는 아주 악질적이고 고집스럽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가는 인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기에 어떻게 그저 주시는 은혜를 그저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린도 전서 2:12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거저 주시는 은혜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이기에 폐일언하고 높은 분에게서 낮은 자가 복 빎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요 기쁨이 되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