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서 펌)


보내주신 답글 잘 읽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드려요~

그리고 격식없이 생각나는대로 적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성도의 열심에 대하여 질문해 주셨네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멈칫하게 되죠.

과연 열심을 내야 하는가? 묵시 안에 정해져 있음을 믿고 처분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주님안에 열심을 내 본 사실이 없는 자들은 아예 이런 고민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주신 답변에 이미 답이 나와 있고, 전도사님은 답을 갖고 있어요.

 

즉, 나의 열심과 하나님이 섭리안에서 나에게서 나타나게 하실지도 모르는 그 열심에 대하여 어떻게 하느냐?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되었는가? 그 계기가 중요한 것이겠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내 믿음의 증명을 위한 그 어떤 것에서 출발했고

그래서 성도의 자격으로서의 마땅한 열심을 내가 내야 한다는 생각에서라면 다시 얽매이게 되죠.

믿음의 행함과 열심 그 자체가 터부시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똑같은 열심이 아니란 거죠.

 

우리는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잘 믿었다고 하실까?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까?

여기에 관심이 집중되게 되면서 이런 질문과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주를 믿을 수나 있는 자일까요.

내가 아버지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자일까요.

그럴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한 질문이라면 출발이 잘못된 것이잖아요.

그와 반대로 나 예수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못 되네~

성령에 의해 예수가 주님으로 내 안에서 인지되지 않으면 우린 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자들이네~

이렇게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를 통해 나를 본 자,

드디어 주님 앞에 무릎꿇고 엎드려 '주여 나를 죽여 주세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 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기는커녕 오늘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악마같은 나를 봐야 합니다.

 

주여! 내가 이거 깨닫지 못하고 행하는 열심과 충성은 우상숭배와도 같네요.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내가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이런 차원에서 나오는 질문은 그 본질이 다르겠죠.

 

물론 전도사님! 그 질문의 동기가 후자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기쁨으로 답글을 쓰게 되는 겁니다.

.

그래서 열매로 안다고 한 겁니다.

그건 어떤 행함 열심 그렇게 나타나야 진짜 참 성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다만 나타나는 열매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건 그 나무의 뿌리가 무엇이고

그 나무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표현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즉, 사과가 열려서 사과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사과 열매가 맺혀진다는 겁니다.

이건 같은 이야기 같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 입니다.

 

다시말하자면, 그 사람의 열심이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성도이기에 자연발생적으로 맺혀지는 열매 있잖아요.

우리가 살아 있기 위해 의식적으로 호흡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들을 인공호흡기를 착용해야 되겠죠.

살아 있기 위해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숨을 쉬게 되는 거잖아요.

 

이제 질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성도의 행함, 열심, 이런거 없으면 그는 죽은자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생생한 증언이예요.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한다는 의식에서 만들어진 열매가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과실이어야만 합니다.

나무 자체에서 나는 향기와 같은 것이라야 합니다.

죽은 나무에 향수를 뿌려 잠시 향기가 나는 차원이 아니라는 거죠.

 

내가 살아 있기 위해서 열매를 맺어야지 무얼 행해야지 하는 순간,

그 열매는 인위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자기 의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마저 없으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지하지 못할 수 있어요.

그래서 처음엔 이것이 자발적이냐, 자의적이냐, 이거 가리지 말고 감동 되는데로

내 안에 반응이 나타나는 대로 행하는 훈련이 중요 하겠죠.

 

그래서 마25장의 양이 자기가 몸으로 행한일 조차 기억 못했던 거예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났다는 증거일 겁니다.

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왠 손이 모를 정도로 내 몸과 맘을 빌어 그분이 하신 것이기 때문인 거죠.

 

그러나 반대로 왜, 내가 한 일을 기억 못하냐고 따진 자들이 마태7장에 나오죠,

거짓선지자들 말입니다.

왜 그들은 자기가 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줄 아세요.

내가...

내가...

모든 것을 자기 뜻과 의지와 열정을 갖고 어떤 목적을 위해 예수 믿음을 빙자하여 행한자들입니다.

결국은 끝날에 주님께 들통나 배척을 당하잖이요.

 

행함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라 그분의 관심사입니다.

내가 염려하고 걱정하고 맘 졸여 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선택했으면 그리고 내가 살아있으면 생명의 열매를

창조주께서 맺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부지불식간에 내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심을 내느냐, 무엇을 행하느냐, 이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붙어 있는 자인가 그것이 더 중요하겠지요.

이제 주 안에서의 행함과 열심, 내가 염려하거나 내 주관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내 안에 구원 받은 생명이 있다면 그분이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까요,

 

이것이 깨달아지면서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임할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겁니다.

편히 쉴 수 있는 겁니다.

주 안에서 말입니다.

아멘~

 

(노요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