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주제: 언약을 따라서 창원극동방송원고(2011.10.5~2012.5.30)

 

1강. 성경의 중심

 

오늘부터 이 시간을 담당할 창원 늘푸른 교회 이장우목사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내용은 “언약을 따라서”입니다. 왜 “언약을 따라서”라는 제목을 잡았느냐고 하면 성경이 언약(言約)의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이 있습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라는 말이고 신약은 새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언약을 모르면 성경의 중심을 모른다고 보아야 합니다.

 

언약이란 말로 약속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에 인간이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이루어 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19:30, 고후1:20). 이런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따라서 성경을 보려고 합니다.

 

왜 이런 공부가 필요합니까? 몇 달 전에 어느 선교단체에서 훈련받는 한 팀이 저희교회를 찾아왔습니다. 9명이 한 팀인데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때그때마다 기도하여 응답받아서 가는 훈련을 하는 중입니다. 9명의 기도응답을 모아서 가장 분명한 쪽으로 인도를 받는 훈련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저희교회에 와서 몇 시간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 분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한 하나님을 믿는데 응답이 왜 다 다릅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것이 궁금하였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기도 응답이 다 다를 때에 누구의 응답을 선택해야 합니까? 기도를 하루에 한 시간 하는 사람의 응답과 네 시간 하는 사람의 응답이 다를 때에 누구 응답을 따릅니까? 저의 답변은 자신의 기도 응답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내 기도 응답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엉터리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렸는가 하면 우리는 다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의 특징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을 때의 유혹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오직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정상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할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고 사는 것이 아담의 후손들의 속성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다툼과 싸움들이 왜 일어납니까? 심지어 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 안에서조차 얼마나 많은 분쟁들이 일어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다는 아담의 유혹받은 속성이 우리 안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창조입니다(골1:16). 그런데 죄를 범한 인간들은 하나님조차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성경의 도구주의입니다.

 

성경의 도구주의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 여러 가지 도구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도구들처럼 성경도 나의 삶의 필요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을 성경의 도구주의라고 합니다. 성경을 도구로 사용하면 성경의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다 나를 위하여 존재하여야 하고 내가 중심이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몸이 너무 아플 때 성경을 보면 무엇이 눈에 크게 들어옵니까?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이 눈에 크게 보입니다. 여러분이 목사로서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에 가장 크게 보이는 성경 구절을 어느 것이겠습니까? 사도들이 전도할 때 하루에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방법론을 찾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니 그렇게 되었기에 나에게도 성령의 충만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수 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내가 개척한 교회로 오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성경은 탐심이라고 합니다. 과연 전도를 말하고 부흥을 말하지만 그 안에 인간의 탐심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나를 중심으로 성경을 보면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왜곡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누구를 중심으로 기록이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5:39절을 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너희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영생이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연구합니다. 성경을 거의 외우다 시피 합니다. 이 성경은 물론 구약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성경을 그렇게 열심히 보고 율법을 다 지킨다는 사람들이 성경이 모든 성경,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서 증거 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요한복음 5:44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성경을 보기는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없음으로 사람들은 서로 자기들의 영광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으니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각자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한 메시아를 기다렸기에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제자들에게서도 다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의 목적과 나의 영광을 위하여 성경을 보게 되면 평생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보아도 성경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기 보다는 점점 멀어질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들이 이미 성경에 다 증거가 되었습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온갖 능력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었는데 그 날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결국 그 일들을 누구를 위하여 하였느냐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결국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유혹 안에 있는 인간들이 모든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것이 이 세 가지 유혹에 다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혹을 다 물리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경제의 성장과 종교적인 기적과 세상의 영광을 구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이런 저런 일을 하였다고 해서 과연 주님 오시는 그 날에 인정하실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중심이 무엇인지, 이 세상의 천지만물의 창조는 누구를 위하여 하였는지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것을 알고 믿는 일에는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말씀을 깨닫게도 하여주시고 믿게도 하여 주셔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두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떠서 주의 말씀을 보게 될 것입니다.

2강. 믿음의 내용

 

‘언약을 따라서’ 두 번째 시간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서론적으로 말씀을 몇 번 더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 시간에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였지만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삽니까?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자 사도들은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이 되면 눈에 보이는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내용은 성경의 아주 기본적인 골격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합니까? 언약대로 이루어내시는 하나님께서 성경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셨고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는 그 약속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과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며 살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창원극동방송에 들어오면 입구에 2011년 주제 성구가 적혀 있습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결론입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성령이 오신 것이 종말의 사건입니다. 요엘서에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시리라는 예언은 종말의 때입니다(욜2:28-32,행2:16-21. ‘차이점 말세에’).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성도가 된 자들은 반드시 종말론적인 정신으로 살아가게 됩니다(행2:43-47).

 

그런데 우리가 시간과 역사라는 공간 안에서 오래 살다보니 주님의 묵시적인 약속에 대하여 희미하여져 버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꿈과 비전이 더 커 보이는 것은 아닙니까?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위한 바벨탑을 쌓으면서 주님을 맞이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도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이 어떤 것인지 로마서 8:22-23절을 봅니다. “봉독” (참조.고후4:16-18)” 피조물이 다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다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온 세상이 탄식하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도가니라는 영화에서 장애인들이 수화로 울부짖으며 표현하는 그런 부르짖음과 탄식들이 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런 땅에서 좀 더 나은 교육과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내면 탄식이 없어질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오시기까지 탄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죄와 죽음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손을 놓고 주님 오시기만 기다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주님의 약속을 더욱 신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 오직 복음만이 생명의 길임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좀 나은 세상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왔습니까? 그러나 결코 나아진 세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물을 저축하지도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기 때문입니다(렘 2:13).

 

이런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함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소망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중심과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올해 여름성경학교 때에 저희 교회에 처음 온 초등학교 3학년이 성경학교를 마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아서 아쉬운 죽음이다’ 예수님께서 창조주요 구원자며 심판자며 우리의 주인이라는 공부를 하고 나서 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신명기 법에 의하면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인데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신21:23,갈3:13-14)?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어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하신 모든 일이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하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었습니다(요4:34). 그래서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24:4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언약을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어떤 종교적인 열심을 낸다고 하여도 복음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합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님께서 이루어 내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나의 결단과 의지와 실천력을 믿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게 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서도 오해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일에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따른 눈에 보이는 소망을 이루어 달라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눅18:8). 이 말씀은 기도하고 오래 기다려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것을 강청기도라고 하면서 아무 것이나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 기다리지 못하고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기껏 이스마엘 밖에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보았던 로마서 8:25절처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보이는 것을 향하여 달려갈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자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으니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며(롬8:26-27)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롬8:34).

 

이런 이야기로 두 번째 시간을 마무리 합니다. 어느 임금이 어느 마을을 방문하기 전에 꽃씨를 나누어주고 임금이 방문할 때에 맞이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꽃씨를 심고 정성을 다하여 돌보았는데도 꽃이 싹을 틔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씨를 심어서 임금이 오실 때에 화려한 꽃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부끄러운 듯이 한쪽 구석에 꽃이 없는 화분만 들고 있습니다. 임금이 그 사람에게 왜 당신은 꽃이 없느냐고 하였습니다. 저는 임금님이 주신 씨를 정성을 다하여 심고 물을 주었지만 싹이 나지 않아서 그대로 들고 왔습니다. 임금이 원하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모두가 눈에 보이는 꿈과 비전을 향하여 달려 갈 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소망하면서 기다릴 수가 있겠습니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은, 사람의 가르침이나, 종교적인 전통이나, 자신의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3강. 기도의 내용

 

언약을 따라서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믿음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은 빈틈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 보다는 오히려 악이 더 위력을 떨쳐 보입니다. 이런 악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는 것임을 디모데 후서 3:1-5절에서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이렇게 악이 팽배하여 보이는 것도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세상은 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믿고 구하는 바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에 그런 것을 구한다는 증거는 요한일서 2:15-16절의 말씀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이 무엇을 구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기도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기도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를 조금만 다닌 사람이라도 기도라고 하면 기억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7-11절입니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준다고 합니다. 악한 아비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과연 좋은 것이 누구 편에서 좋은 것입니까? 아이 편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 편에서 좋은 것입니다. 아이는 떡과 돌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보리개떡과 화산 석이라 구멍이 숭숭 뚫리고 거무튀튀한 돌을 구별 못하는 것이 아입니다. 이런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돌이 떡인 줄 알고 자기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면 그 돌을 줄자가 누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로 생선과 뱀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가 뱀을 생선으로 착각하고 달라고 하면 줄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악한 너희라고 좋은 것을 자기 자식에게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좋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좋은 것들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 좋은 것이란 건강을 구하였는데 약함을 통하여 주를 의지하게 하십니다. 부를 구하였는데 가난하게 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명예를 구하였는데 수치스러운 일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붙들게 됩니다. 이러한 예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들 수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1:13절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 7장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런 본문을 평행구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누가복음은 성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은 우선 성경의 1차적인 독자가 다름을 알면 됩니다. 마태복음은 주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좋은 것이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압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주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복음입니다. 이방인들에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면 자기들이 좋은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친절하게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각자가 좋은 것을 구하였는데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성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들을 무엇을 알게 됩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또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무엇을 증거 하였습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 내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눅16:6, 행2:36, 행4:10).

 

복음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 하게 됩니다. 바울사도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달려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 그 순간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구하면 그 구하는 것보다 성령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내가 좋은 것을 주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며 그 진리가 바로 예수님임을 증거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6:7-14절을 봅니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이런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본론에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우리가 성령이 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 책망은 내가 얼마나 일을 잘했느냐고 못했느냐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 책망을 받는다는 말씀은 우리의 의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분이 아버지께로 가 버리신 것입니다. 심판은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알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 언약을 따라서 보는 성경의 내용입니다.

 

 

4강. 영원 전 언약(창세전 언약)

 

이제부터 언약에 대한 본론에 들어갑니다. 언약을 말할 때에 신학자들은 대부분 노아언약부터 말씀합니다. 그러나 저는 영원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부터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기로는 예수님을 먼저 인식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할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현재적인 시간과 공간속의 일이라고 하여도 이것이 영원 전에 언약된 내용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보려고 하는가 하면, 이 시대는 인간의 주체성이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근대부터 형성된 인간의 주체성은 신들이 죽었다고 하면서 인간의 주체를 말하는 초인의 시대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말한다는 교회에서조차 인간의 신화들이 찬양받고 있습니다. 말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 보암직한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인데도 우리는 다들 암묵적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간과 공간이라는 세계 속에 갇혀있습니다. 이런 인생들이 영원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소멸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불멸성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엄청난 무덤들이 다 자신의 사후세계를 위한 준비임을 보면 인간은 영원에 대한 희미한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그런 영원에 대한 생각은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악 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서만 영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디도서1:1-3절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평소에 추구하고자 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들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구하고 찾고 원하는 바들이 과연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내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이 세상의 지위와 부와 영광이 아닙니까? 또는 믿는 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더 나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만약 이런 것들을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은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입니다.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아무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내용을 믿는 자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까?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을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된 것을 지금 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자신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르심에 대하여 바울은 디모데후서 1:9-10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행위대로 한다고 하면 단 한 명도 구원 얻을 자가 없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한 바울조차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사람인데 어떻게 자기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룩하신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 은혜란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는데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생명이며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라고 하면서 죽음도 이기지 못하는 썩어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질 것들을 복음의 내용으로 넣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영원 전부터 약속된 언약인데 누구와 약속하신 것입니까? 성부와 성자의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는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예수님 홀로 이루어내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말로 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을 신실(信實)하시고 성실(誠實)하게 이루어내십니다. 신실은 사람의 말에 열매가 있다는 말이고 성실은 말을 이루어 열매를 맺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예수님께서 신실하게 이루어내신다는 것이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시편89:1-8절입니다. “1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2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3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5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성실하심을 다윗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심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5절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 혼자만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도 함께 들어가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창세전부터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심으로 주신 그 영광을 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의 자기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입니다.

 

5강. 아담 언약

 

지난주는 영원 전 언약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역사 속의 언약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대부분의 언약신학을 말하는 학자들이 노아언약부터 이야기합니다. 언약이라는 분명한 내용이 노아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도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지음을 받았기에 언약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6:7절입니다.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 하나님께 범죄 하였는데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담을 그냥 사람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대표가 아담이기에 아담으로 보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어떤 언약을 받은 것입니까? 선악과에 대한 것입니다. 한 가지 금령이지만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이란 피로 맺은 약정 또는 죽고 사는 약정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야 마지막 아담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백석대 김진섭 교수의 글을 인용합니다.

 

<창세기3장에서 계시록20장까지의 “인간타락과 하나님의 구속”에 관한 “대하(大河) 이야기”(meta-narrative)는 서론적인 “하나님의 우주/인간창조”(창 1-2장)와 결론적인 “하나님의 우주/인간완성”(계 21-22장)에 관한 이야기의 본론에 해당된다. 창세기 1-2장의 모든 문장의 주어는 아담을 창조하신 2:23-25 이전까지는 당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명시하는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그분‘에게서’(ek, 'from'), 그분을 ‘통하여’(dia, 'through'), 그분‘에게로’(eis, 'unto')”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 교리, 즉 “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하시는 예측불허의 은혜로운 하나님”(삼상 2:6-10; 롬 9:14-26)을 믿고 찬양하게 된다. 인류역사의 주권자이신 성삼위 하나님의 섭리 속에 결국 인생은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 보어, 전치사구의 역할을 할 뿐이라는 진리의 재확인인 것이다. 창세기 3장의 히브리어 원문으로 그 간교의 실체를 조사해 보면 “하라와 하지 말라로 명시된 하나님의 계명”(창 2:16-17)에 대한 “보태기, 빼기, 비틀기, 덮기”(3:1하-5; 참조. 시 32:1-2) 임을 규명할 수 있다. 마귀의 간교에 미혹된 인간 실상은 “영적 환각 증세”(3:6상)를 드러내며, 미혹된 결과는 “공범죄”(3:6하)이다. 인간은 “스스로 엮은 무화과 잎 앞가리개”(3:7)의 ‘능동적 의’에 의한 자력구원을 시도하나, 하나님의 근원적 해결은 “하나님이 손수 [양]가죽으로 지어 입히시는”(3:21) 수동적 의, 즉 “여인의 씨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발꿈치의 상함을 받으나, 뱀의 머리를 깨뜨리시는”(3:15)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 심판과 구원이심을 천명하신다(3:8-13).>

 

여기서 인간의 유혹이 지금까지 계속됨을 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유혹을 이길 자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유혹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후에 사단이 유혹하는 내용이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유혹과 같은 것입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 세상의 영광을 준다는 마귀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그러므로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5:12-21절을 봅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아담 아래서 사망이 왕 노릇 하고 예수님 안에서 생명이 왕 노릇합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개인의 어떤 행동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의 구조를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원 하는가 아닌가에 성경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잠언서 8:1절입니다. 지혜가 부릅니다. 22절에서 31절을 보면 이 지혜는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를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5절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지혜의 말씀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지를 누가 창조하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몰라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 안에 생명의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절에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이 사람의 빛인데 이 빛이 사람에게 비추어지는데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 속에 참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혜도 없고 말씀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대로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2절을 봅니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것이 모든 인생의 실상입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45절입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a living being. NIV)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a life-giving spirit. NIV)이 되었나니”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불순종의 저주와 언약 완성의 복을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대로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따라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그 주님을 우리가 믿게 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6강. 노아언약(1)

 

오늘은 노아 언약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9:8-17절을 읽을 때에 언약이라는 말씀이 몇 번 나오는지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7번이나 반복되는 말씀이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 후에 노아에게 언약하신 내용입니다. 다른 말로 무지개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언약이 체결되는 과정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왜 온 세상이 홍수로 심판을 받아 하는지, 노아는 어떻게 방주를 준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건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먼저 홍수 심판이 일어나는 이유는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인류가 퍼지면서 벌써 죄악이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상태이기에 죄악이 관영하여 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우리는 흔히 흉악한 범죄들을 커다란 죄라고 여깁니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별로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창세기 6:3절에서 죄악이 관영함으로 하나님의 신이 떠나게 되면 사람이 육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게 될 정도로 죄악이 가득한 모습을 5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흉악한 범죄가 가득한 것을 죄악이 관영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경건한 셋 계열이고 사람의 딸들이란 가인의 계열을 말합니다. 모든 도시문명의 발달이 가인계통입니다. 각양기계와 악기를 만들고 성읍을 만든 계열이 가인계열입니다(창4:16-24).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미디안 여인들에게 유혹을 받듯이 그저 자기들의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은 것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에 좋아하는 대로 사는 이런 모습이 죄악이 가득한 모습이며 이런 상태를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완성되어야 하기에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십니다(6:8). 결국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언약 때문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라는 말씀도 언약 때문에 은혜를 입었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홍수 이후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옵니다. 처음에 읽은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이 언약이 선포되기 전에 정결한 짐승의 희생이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 8:20-22절입니다.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노아 언약을 통하여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과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할 것이라고 처음 창조의 때와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여기서 유의하여 보아야 할 말씀이 또 있습니다. 21절에서 정결한 짐승의 희생을 받으시고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하십니다. 홍수가 있기 전에 이러하였기에 심판을 하셨는데 홍수 이후에도 인간의 마음은 여전합니다.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에 인간의 행함대로 심판을 하시면 늘 심판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무지개를 보면서 노아의 언약을 우리는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약들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노아 언약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흡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오늘 우리가 심고 거두고 먹고 마시는 모든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자기 힘과 자기자원으로 살아간다고 여기면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도 불신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임할 때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4:35-39절입니다.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천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런 천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지대고 또 말씀대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무엇은 영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내용은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의 말씀은 다 예수님께서 완성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을 이제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 속에서 다 이루어내시면 그제야 이세상의 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은 이 끝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믿고 살아가니 당연히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노아와 때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노아의 때에 홍수가 나서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가기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온 정신을 다 팔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7강. 노아언약(2)

 

오늘은 노아 언약 두 번째로 보겠습니다. 창세기 9:18-28절을 보시면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마시고는 취하여 벌거벗고 잡니다. 함이 이것을 보고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뒷걸음으로 들어와 아비의 벌거벗음을 덮어줍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나서 이것을 알고 함을 저주합니다. 자기가 실수하여 놓고 왜 함을 저주합니까?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함이 저주를 받습니까? 함은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는 자입니다. 방주에서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를 모독한 것이 됩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종 심판이란 율법대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고 십자가로 나타난 은혜를 무시하는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이 됩니다. 창세기 10:6-20절을 보시면 함의 아들 중에 니므롯이 나옵니다. 세상의 첫 용사라고 합니다. 이 사람의 땅이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됩니다. 시날 땅의 바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창세기 11:1-9절을 보시면 바벨탑을 쌓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거역하면서 자기들의 흩어짐을 면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하늘까지 대를 쌓자고 합니다. 노아홍수의 두려움을 자력으로 막아보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저주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도 결국 함의 후손들이 셈의 후손들의 종의 종이 되는 저주의 실현입니다. 덮어줌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25:16-22절에서 언약궤와 그 뚜껑에 대한 말씀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언약의 돌 판이 있습니다. 그 돌 판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하면 다 죽어야 합니다. 이런 부분은 모세언약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만 노아의 언약에서 왜 덮어주셔야 되는지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도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은혜를 모르는 자가 심판 받는다는 것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의 벌거벗음을 하나님께서 가려주셨습니다. 이것을 수동적 의라고 아담 언약에서 보았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입는 능동적인 의로는 결코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덮어줌의 말씀에 대하여 성경 몇 곳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시 78:38]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이스라엘의 행한 대로 갚으셨다면 다 진멸당하여야 하지만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겔 16: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려진 계집아이로 비유하며 그들의 벌거벗음을 가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라나서 공주처럼 입혀 놓으니 더욱 음란한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이들은 입을 닫게 되며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게 됩니다.

 

로마서 4:6-8절입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간음하고 살인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의 덮어주시고 가려주시는 은혜를 입었기에 이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진짜 복이란 허물과 죄가 가려짐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을 이미 아담 언약과 노아 언약에서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의 덮어주심 아래에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26-28절 말씀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진리의 지식, 즉 복음이란 이미 아담 언약과 노아 언약에서도 보았듯이 우리는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에 내가 좋은 대로만 살아가는 모습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이 가려지고 덮어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가려지고 덮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한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무겁겠는지 너희는 생각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세상 사람들도 부러워할만한 대단한 업적을 들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처럼 노아처럼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덮어 주셔야 함을 알고 예수님의 보혈 안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8강.9강. 아브라함 언약(1,2)

 

노아 홍수 이후에 각 지역으로 흩어져 살던 인류가운데서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십니다. 함의 족속에게서 택하지 않으신 이유는 노아 언약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는 함의 후손이 아니라 셈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도 하나님의 언약의 뜻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열국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열국이 받을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고, 또 간 곳에서 제단을 쌓았고, 또 백세에 낳은 아들도 바침으로 복을 받았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소떼와 양떼가 많아진 것입니까? 그 당시 애굽의 바로 왕에 비하면 아브라함은 티끌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 결론부터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6-9절을 봅니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창 15:6)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 복이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저주밖에 받을 수 없다는 말씀과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그의 어떠한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며 이방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어준 행위로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율법에 속한 것이지 믿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10-14절을 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신 27:26)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ㄹ)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합 2:4)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ㅁ)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레 18:5)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ㅂ)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신 21:23)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결론입니다. 이러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보겠습니다.

 

12:1-3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는 곳이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란입니다. 그러나 이미 전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느헤미야 7:9절입니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이 당시에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면 누구에게 약탈당할지 모르는 그런 시대입니다. 고향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런 시대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다른 신을 섬겼기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약속을 믿을 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람이 계시를 받았습니다.

 

창세기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들의 모습은 거의 죽을 지경이 됩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아들을 보니 무언가 놀라운 신탁을 받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아브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데라가 주도하여 떠납니다. 그러나 하란에서 데라는 더 이상 떠나지 않고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란에서 데라가 죽고 나서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러한 근거를 두 곳에서 봅니다. 창세기 11:31-32절입니다.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데라가 주도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옵니다. 하란에서 데라가 죽고 아브람이 다시 부름을 받습니다.

 

여호수아 24:2-5절입니다.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아브람의 아버지가 다른 신을 섬긴 사람입니다. 가부장 시대에 아버지가 다른 신을 섬기면 가족 모두가 다른 신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창세기 12:1-5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아브람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곳을 떠나라고 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고 이제는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고 죽고 나서 또 떠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아브람의 등을 떠밀어 가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기를 부르신 분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여정을 통하여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분이심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땅과 후손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이 됩니다. 그 땅과 후손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모아지는 것이 신약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의 나라를 얻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며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언약을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다 이루신 현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복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10강. 아브라함 언약(3)-언약체결

 

오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는 내용을 보려고 합니다. 이 주 전의 방송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라는 말을 방송을 통하여 들은 어떤 분이 자신은 아브라함이 아주 믿음이 좋은 집안에서 나온 사람인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분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분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믿음이란 무언가 그 사람의 집안의 이력에서 오는 것인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자기 자신에게서 무엇이 나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증거 하는 믿음은 사람에게서 원인이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믿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믿게 하여주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란 내가 열심히 믿고자하는 나의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히 우리에게 임하여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영웅적인 믿음을 나타내 보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자신들의 인생의 꿈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된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난시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 즉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땅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창세기 15:7절입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묻습니다. 창세기 15:8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9-11절입니다.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짐승을 이렇게 쪼개어 놓는 것은 아브라함 시대에 언약을 체결하는 방식입니다.

 

이때는 오늘 같은 법원이나 등기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맺으면 언약 당사자끼리 짐승을 쪼개어 놓고 그 사이로 언약을 맺은 당사자가 함께 지나가는 것으로 언약을 체결합니다. 만약에 상대방이 언약을 어기면 이 쪼개진 짐승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언약은 피로 맺은 언약입니다. 피 즉 생명을 건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삼 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을 쪼개어 그것을 마주 대하여 놓았는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 아브라함이 쫓아가면서 기다립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임하십니다.

 

12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깊은 잠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잠이 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잠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시는 것을 꿈에서 보게 하시는 것은 구약에서 계시전달의 방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즈음도 꿈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은 사람의 꿈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큰 흑암과 두려움이 아브라함에게 임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내용을 주시는 것이 13-16절입니다.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것이 약속의 내용이고 이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하시면서 그 쪼개진 짐승사이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지나가십니다.

 

17-18절입니다.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아브라함은 깊은 잠에 취하여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타는 횃불의 모습으로 홀로 지나가십니다. 그리고서는 언약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언약을 일방적인 언약이라고 합니다. 짐승을 쪼개 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걸고 하는 피의 언약입니다. 언약을 어기면 죽임을 당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주시고 언약을 체결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언약을 이루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보다 더 높으신 분이 없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언약을 하십니다. 이러한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과정이 구약입니다.

 

그래서 땅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후 약 천 년 만에 다윗 왕 때에 다 이루어집니다. 약속을 받은 사람은 죽어도 그 약속은 영원하기에 천년이 지나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말씀을 하시는 그 순간 이미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이미 창세전에 다 이루어진 언약이라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땅을 다윗이 다 차지하게 되지만 그러나 다윗 이후에 그 땅은 다시 잃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땅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이후에는 그 땅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흑암의 권세에서 빼어내셔서 그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땅의 약속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듯이 후손의 약속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갈라디아서 3:16절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는 것이며 그 후손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꼭 집어서 네 자손이라고 단수로 말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체결하실 때에 생명을 건 언약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생명을 바쳐서 이 언약을 이루어내는 것입니까? 그 언약을 이루시는 일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죽으신 사건입니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사도행전 20:28절에서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모든 내용을 성취 하신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11강. 아브라함 언약(4)-이스마엘

 

주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지난 시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는데 일방적인 체결과 그 성취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제가 편의상 아브라함이라고 말하지만 아직은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사건은 다음 시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람이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를 봅시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부름을 받은 나이가 75세입니다. 그런데 최초의 부름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이곳에서 몇 세에 부름 받았는지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주도하였고, 하란에서 데라가 죽고 나서 다시 부름을 받아서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창세기 15장의 언약의 체결이 있기까지 약 1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 기간 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크게 경험한 두 가지 사건이 무엇입니까?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바로 왕에게서 자기의 아내 사라가 보호를 받은 것이며, 또 하나는 자기 조카 롯을 소돔과 고모라 성을 공격한 네 왕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찾아 온 사건입니다. 이때에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이런 사건을 통하여 자기를 불러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게 되었기에 씨와 땅에 대한 약속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씨에 대한 약속을 받고 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때 아내 사래가 제안을 합니다. 창세기 16:1-3절입니다.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약속을 믿고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자식은 아직 생기기 않았습니다. 이때가 가나안에 거주 한지 십년이 되었습니다. 아내 사래의 말을 받아들여서 하갈을 취하여 자녀를 낳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씨받이를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씨를 이어가기 위하여 씨받이를 들이는 것처럼 하갈을 그렇게 취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받았지만 자식은 생기기 않고 기다리지 못하여 하갈을 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하갈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입니다. 이때로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무른 말씀도 하지 않으시다가 99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마엘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쫓겨나는, 언약 밖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의 행위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지 못하여 버림받는 사람을 사울에게서도 보게 됩니다. 사무엘상 13:8-15절입니다. “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15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무엘이 1주일동안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사울 왕이 기다리지 못합니다. 적은 쳐 들어오고 백성들은 흩어집니다. 흩어짐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은혜를 구하여야 하는데 은혜를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흩어진다고 본 것입니다. 일주 일 만에 오리라고 약속한 사무엘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어서 자신이 제사를 드리고 나니 바로 그때 사무엘이 나타난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사무엘이 왔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사울왕의 모습입니다. 사무엘이 이러한 사울을 보고서 당신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지도자를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꿈과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아브람처럼 이스마엘을 만들어내고, 사울처럼 스스로 제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느냐는 말입니다. 성경의 약속만 믿고 살기에는 시대가 너무 빠르게 변한다고 하면서 복음의 본질은 바뀌지 않아야 하지만 시대의 문화에는 탄력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수많은 전도의 방법론과 수많은 교회성장의 프로그램들이 마치 사울 왕이 흩어지는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는 제사로 보입니다. 전하는 방법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여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보암직한 것으로 포장하여 내어 놓았습니다.

 

초대교회 때의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였습니다. 구제와 봉사는 집사들에게 맡겼습니다. 구제와 봉사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를 제쳐두고 사업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전도훈련이나 방법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성장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유행한다는 것 자체가 사울의 방법과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방법으로 보입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을 봅니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실력으로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이며 이것이 율법이며 육체로 난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약속으로 태어난 자식입니다. 아브람이나 사라의 모든 육체가 포기 되었을 때 나온 자식이 바로 약속의 자녀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수단과 방법과 모든 인위적인 것들이 포기되는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나옵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히고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 나타나는 곳이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입니다.

 

12강. 아브라함 언약(5)-할례언약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이스마엘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사람의 행위를 보태어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님께 쫓겨나야 하는 언약 밖의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아브람 86세입니다. 이때로부터 하나님께서 13년 동안 아브람에게 아무른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13년이 지난 뒤 이스마엘은 13세, 아브람이 99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1-5절입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합니다. 이미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완전하지 못한 자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앞의 말씀을 보시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전능하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고 완벽하게 이루어내시는 일에 전능하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하기는 하지만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의 소원과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나의 만족과 유익을 채워주는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하신 내용들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내시는 일이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치 알라딘의 램프나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정성을 빌고 빌어서 소원을 성취하려는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우상이라고 성경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것은 나의 언약을 내가 완벽하게 이루어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2-3절을 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로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이제부터 너의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많은 무리의 아버지로 삼으시는데 왜 아브람을 택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내시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일부러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택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생식능력이 있었지만 사라는 처음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입니다. 이런 부부를 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홀로 이루어내심을 보이시려고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이루어내심을 보이시려고 이런 사람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래도 이름을 사라라고 바꾸게 하시면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주실 것인데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습니다. 내가 나이가 백세이고 사래가 90세인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고 웃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라도 장막 뒤에서 웃었습니다. 사라는 이미 생리가 끊어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불신을 배경으로 자기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이루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을 주시면서 아브람에게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할례는 단지 포경수술의 의미가 아니라 아브람의 생식능력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할례입니다. 이미 사라는 폐경의 여인입니다. 이런 부부에게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누구나 웃을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둘다 웃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백세에 얻은 아들이니 하루에 이름을 몇 번이라 불렀겠습니까?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비웃었는데 하나님은 약속대로 나의 웃음이 되는 이삭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불신앙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핵심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도 믿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삼년동안 합숙하며 제자훈련을 받은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인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에 대하여 말리다가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일이 곧 사탄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십자가와 원수 되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며 헬라인에게 미련한 것입니다. 오직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언약을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2-26절입니다. “22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약속을 따라 난 자를 비교하면서 율법과 약속,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 시내산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대비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행위로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능성을 가지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마치 믿음인양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과 꿈을 설정하여 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이루어내려는 인본주의입니다. 세상의 성공신화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포장하고 있는 번영의 신학입니다. 이런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은 오늘 말씀과 연결하여 로마서 4장을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중에 한절만 봅니다. 4:17절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로 받게 된 믿음입니다. 이 은혜의 선물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13강. 아브라함 언약(6)-마무리

 

지난 시간에 로마서 4장을 꼭 보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4장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혹시 곁에 성경이 있다면 로마서 4장을 펼쳐두시고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입니다.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1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하나님께 의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3절에서 아브라함이 믿어준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까지 아브라함언약을 통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이란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라 선물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솜씨와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4-6절입니다.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데 그 첫째가 아브라함이고 두 번째로 거론하는 사람이 다윗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을 설교할 때에 얼마나 많은 내용이 다윗의 믿음과 영웅적인 행위들을 이야기하는지 우리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쫒아올 때에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도 자신이 복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모습, 하나님의 성전을 준비하려고 하는 마음 등의 이야기를 통하여 다윗을 믿음의 용장이요 심지어 성군이라고 말하는 것도 들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 자신이 자신을 말하는 모습은 어떤 사람입니까? 충성된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하고 알리바이를 조성하기 위하여 휴가를 주어 아내에게 가게 하여도 우리아는 전쟁 중에 아내에게 들어갈 수 없다고 하여 왕궁 막사에서 잡니다. 다음 날에 술을 잔뜩 마시게 하여 보내는데도 여호와의 전쟁에 충성된 우리아는 술에 취하여서도 아내에게로 가지 않고 막사에서 자는 충성스러운 여호와전쟁의 용사입니다, 이런 자를 죽인 다윗인데도 자신의 죄를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다윗 언약에서 하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왜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는지 잠시 보아야 합니다. 단지 유다지파의 혈통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다윗도 믿음이 없는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보여주는 것이 족보의 이야기입니다. 그 결국은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기에 아브라함과 다윗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는지를 먼저 보라고 구약이 있습니다.

 

7-8절입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인용 구절이 시편 32편의 내용인데 다윗의 시편입니다. 또한 시편 51편을 보시면 다윗이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죄악 가운데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간음하고 살인하기 전까지의 행위들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자신의 선행으로 의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아야만 하는지 다윗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기 전에는 자신의 간음과 살인의 죄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다윗입니다. 죄인의 특징은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 당시의 세상의 왕들은 남의 아내를 차지하고 몇 사람을 죽이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을 섬기기 위한 왕이지 군림하기 위한 왕이 아닌데도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행한 일이 이런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고 높은 권세를 차지하느냐는 것으로 보면 성경을 근본적으로 잘 못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비추어주시면 그제야 자신의 죄를 알고 무엇이 진짜 복인지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소떼 양떼에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에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이 불법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것이 진짜 복이라는 것을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복이 누구에게 임하는 것입니까?

 

9-11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무 할례 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 할례 시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다는 것을 인친 것이라고 합니다. 할례는 왜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도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를 자신들의 행위와 공로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를 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나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조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음 주에 볼 모세언약에서도 언급을 하겠습니다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것은 왜 인간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속한 자가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의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절대로 파기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임을 모세 율법은 확증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이후에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1400년을 통하여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보여주었습니다.

 

15-16절입니다.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하여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은 어떤 신앙고백이 나옵니까?

 

로마서 4:17절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삭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있게 되었습니다. 사라의 태가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또 모리아산에서 희생의 제물로 드려진 것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인과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홀로 이루어내심을 믿었습니다. 신인협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그 언약대로 이루어내시는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아래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고 합니다. 이 다 이루심을 우리가 믿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까지 보내셔서 알게 하시고 믿도록 까지 합니다. 이런 믿음이 없는데서 생기고 죽은데서 살아나는 방식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14강. 모세언약(1)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때가 되어 출애굽하게 됩니다. 출애굽 사건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립운동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셨기에 그들을 출애굽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등 따시고 배부르면 좋다고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지속되지 못하도록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고역을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그제야 부르짖고 그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자기 맹세를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3-25절입니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것입니다. 언약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열 재앙과 어린 양의 피를 통과하고 홍해를 건넙니다.

 

출애굽기 15:17-18절입니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 출애굽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처소 삼기 위하여 구속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이해할 때에 자기중심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힘들고 고생스러우니 이런 고생이 없는 천국에 가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이라는 곳을 가도 자신이 주인노릇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이런 천국을 꿈꾸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원망만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심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24:1-11절에 언약체결장면이 나옵니다. “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2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는 일방적인 언약임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쪼개진 짐승 사이라고 지나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타는 햇불의 형상으로 홀로 지나가면서 언약에 맺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언약은 분명하게 상호의사를 물어서 쌍방 간에 동의하에 언약을 체결합니다. 모세가 언약 중재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백성들의 뜻을 하나님께 전하여 서로 언약을 체결합니다. 모세 언약에서도 피의 언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여주니 그 언약에 동의를 합니다. 그래서 언약서를 낭독하고 소를 잡고 피를 받아서 뿌립니다.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피로 체결한 언약이기에 생명을 건 언약입니다.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체결하고 나서 잔치를 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인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돌 판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으로 올라간지 40일 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깁니다. 40일도 기다리지 못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냅니다.

 

출애굽기 32:1절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백성들이 아론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특징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기 처소 삼기 위함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위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을 만들어 내라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언약에 체결되었다고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어 놉니다.

 

출애굽기 20:1-5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상숭배금지의 말씀인데 무엇이 우상입니까? 형상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즉 나를 위하여 만들어내면 그것이 형상이든지 아니든지 우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5절에서는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탐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탐심을 가지고 교회를 만들어 낸다면 이것이 다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과 피로 맺은 언약을 40일도 되지 않아서 배반하고 자기들을 인도한 신을 만들어 낸 것이 황금송아지입니다. 소를 신으로 섬기는 것은 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이방의 우상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를 황금으로 만들었으니 오늘날의 황금만능주의와 꼭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황금송아지를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번영신학이라는 것이 꼭 이 모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인데도 예수 믿고 부자가 되었다고 세상에서 높아졌다고 성공하였다는 간증들을 좋아하고 따라는 것과 황금송아지를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불러도 그것은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을 모세가 보고서 어떻게 합니까? 손에 들고 있던 언약의 돌 판을 깨뜨려버립니다. 만약에 그 돌 판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다 진멸해야 합니다. 그 돌 판에 기록된 십계명의 내용을 그대로 배반한 현장입니다. 돌 판이 깨어짐은 말씀의 깨어짐입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깨어짐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가 용서 받는 것임을 율법을 통하여서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죄를 율법으로 살피시면 누가 감히 설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율법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그 십자가만이 우리의 구원의 소식이 됨이 우리가 영원히 말해야 하고 전해야 할 기쁨의 큰 소식입니다. 온갖 상업주의와 이방의 축제로 물든 성탄절이 아니라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가 전해야할 십자가의 소식이 이 12월에도 전하여 져야 할 것입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5강 모세언약(2)

 

신앙인이든 아니든 간에 새해라고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출발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심삼일 이라고 벌써 허물어진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경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특별한 날과 달과에 절기에 매여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로 만들어낼 새로운 것은 결코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주어져 있는데도 우리는 자꾸만 우리의 행위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 아직 옛 언약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은 모세언약의 두 번째 시간으로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는 복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 복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복이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완성으로 주어지는 의에 이를 수도 역시 없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신명기 28:1을 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받기 위하서는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어야 복이 주어지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 조건이란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데 모든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모든 명령이라고 합니다. 모세 오경에서만 하나님의 명령인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계명이 613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서 복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한다면 613가지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하나도 어김없이 다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 중에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지킨 것만큼 인정하여 주고 나머지는 다른 것으로 보충하여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법은 그렇게 통할지 모르지만 전능하시고 절대적인 하나님은 앞에서는 그런 것은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8:15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면 복을 받지만 만약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데 그 저주의 내용이 복의 내용보다 양으로 세배가 넘습니다. 복의 내용은 1-14절이지만 저주의 내용은 15-68절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았습니까? 저주를 받았습니까?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많은 율법의 조문을 완벽하게 다 지켜 행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을 다 지킴으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지킨 율법이라는 것도 랍비들의 해석으로 인하여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들이 가미되었기에 적당하게 타협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자신의 이욕을 쫓은 것이지 율법의 정신과 뜻을 제대로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 요점인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에는 결코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한 것이 오히려 자기만 사랑한 것임이 예수님 앞에서 다 들통이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뜻과 의미를 말씀하시고 그 율법을 완성하실 분이 자신임을 증거 하였을 때에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를 의논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이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의 모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도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한 법칙 중에 구약의 율법도 아닌 여러 가지 법들을 지킴으로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록펠러 어머니가 아들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언제나 등장되는 이야기이고 얼마나 많이 설교시간에 예화를 들었는지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두 가지지 버전이 나오는데 세 가지 유산으로 말하기도 하고 10계명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록펠러가 76세 되었을 때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로 성공하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록펠러는 어머니로부터 세 가지 신앙의 유산을 받은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신앙의 유산은 십일조 생활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20센트씩 받는 용돈에서도 반드시 십일조를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두 번째 신앙의 유산은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언제나 40분 정도 일찍 교회에 나와 맨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세 번째 신앙의 유산은 교회를 다닐 때 교회의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록펠러는 98년 동안 살면서 자신이 번 돈으로 록펠러 재단을 세워 많은 사회사업과 선한 일을 하기에 힘썼고 24개 대학과 4,928개의 교회를 지어 봉헌했습니다.]

 

10가지로는 이렇습니다. [1. 오직 하나님만 섬겨라 2. 하나님 다음으로 목사님을 섬겨라 3. 주일 예배를 꼭 드려라 4. 반드시 십일조를 드려라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아라 6. 하루의 목표를 위해 아침에 기도로 시작하라 7. 하루를 마감하며 기도로 끝을 맺어라 8. 매일 성경을 읽으라 9. 남을 도우라 10. 예배시간에는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 세계 최고의 거부가 된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우선하라는 신앙으로 유산으로 보자고 하는데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하시겠지만 그러나 어떤 인간도 인간의 행위로 복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성경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것이 마치 성경보다 우위에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전하고 맹신하고 있다면 이것은 부자가 되고 싶은 탐심이기에 우상숭배라는 말입니다.

 

록펠러 가문이 어떻게 적대적 합병을 하여 많은 회사를 헐값에 사들였는지 그 결과로 수많은 회사들이 파산하고 실업자가 된 것에 대하여는 경제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으로 세계적인 부자가 되고 그런 돈으로 사회사업을 하였다고 칭찬합니다. 과연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냐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다시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야고보서 5:1-5절입니다.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정당하게 일하여 그렇게 엄청난 부자가 되겠습니까? 추수한 품꾼들에게 정당하게 주지 아니함으로 부자가 되었다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정당하게 세금내고, 정당하게 월급주고, 비정규직 채용하지 않고, 사원들의 복지를 오너의 가족처럼 생각하고서 세계적인 부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행위로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것인데 그 저주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자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부자 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16강. 모세언약(3)

 

지난주에 이어서 왜 인간의 율법의 행위로는 복을 받지도 못하고 의롭다 함을 받지도 못하는지 계속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울사도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기록된바 즉 율법에 기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27:26절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떤 율법적인 행함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2:10-11절입니다.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분명히 증거 합니다.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면 어기면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여기서는 간음과 살인만 말하지만 지난주에 본대로 613가지를 다 지키다가 하나면 어기면 모든 것을 다 어긴 것이 되기에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한다면 저주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갈라디아서 3:13-14절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아브라함 언약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소떼 양떼가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떼 양떼는 자기 살기 위하여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고 바로 왕에게 주었을 때에 그 댓가로 받은 것이 이렇습니다. 창세기 12:16절입니다.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이런 것은 세상의 바로왕이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복이며 이 복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3:16절 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영원한 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신 것은 신명기 21:23절의 말씀에 의하며 저주 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율법을 어려서부터 외우다 시피 배우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저주 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자신들의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그 저주 받은 죽음이 자신의 저주를 대신 받은 것이라고 결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로 인하여 성령이 임한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저주를 대신 받았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렇게 믿게 되는 사람은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의 언약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며 모세가 말하고자 한 궁극적인 복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다음에 모세 언약이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이 왜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이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율법을 통하여 죄 아래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그런 자들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하여 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새 언약시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아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의 선물보다는 자신의 행위로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더 챙기고 싶은 죄인의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을 부추기는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복은 행함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복이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는데 그 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의롭다 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복은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오히려 더 많이 언급하고 더 중요하게 여기는 복이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복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시키는 대로 해도 복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주에 예를 들었던 록펠러의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해도 자식이 복을 못 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 땅에 록펠러의 어머니보다 더 정성 바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왜 세계적인 부자가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제일의 부자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대에 받지 못하면 자식 대에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받는다고 합니다. 천국을 세상의 가치관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모세언약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의 찬양내용입니다. 출애굽기 15:17-18절입니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 출애굽 시킨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처소를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처소란 성도가 하나님의 처소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처소를 만드시고 그 처소가 만들어지면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처소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인 그 관계 속에 넣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한 것은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4:16-24절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과연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처소로 삼으신 자의 일차적인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아들이 있으면 영생이 있습니다. 이것이 빼앗기지 아니할 영원한 복입니다.

 

17강. 모세언약(4)

 

오늘은 모세 언약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람의 선행이나 양심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인간의 선행으로도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택하셔서 계시로 보여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처럼 은혜의 선물인 믿음으로만 주어지는지를 먼저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모세의 율법을 주셔서 구약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인간의 행위가 어떤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 까지 약 1500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기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시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 남은 자들이 돌아옵니다. 이들이 돌아와서 스스로 자기반성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가 힘이 없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을 율법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2주 전에 신명기를 통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운동이 바리새파 운동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꼬? 하면서 의논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하여 율법을 지킨다고 한 자들이 결국 어떤 죄인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 이유가 성령이 임하고서 밝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부터 성령이 부어집니다. 그 결과 계시를 받은 사도들이 신약을 기록합니다. 오늘은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를 신약에서 살펴봄으로 모세 언약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로마서 3:19-21절을 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을 주신 이유를 이곳의 말씀만 보아도 너무나 분명하게 나옵니다. 19절에서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인데 왜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으로 살리라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다 지키는 자가 만약에 있다면 율법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가 나오겠지만, 어떤 인간도 율법을 다 지켜서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20절에서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다고 합니다. 로마서 4:15절에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사람이 죄 아래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받은 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의에 이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받아서 전하여 준 모세는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신명기 31:20-21절입니다. “20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율법을 주신 이유는 너희는 율법을 어기게 될 때 깨달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23-28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의와 그 영광에 이를 수가 있습니까? 24-28절입니다.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또는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한 곳의 말씀만 더 보겠습니다. 로마서 11:32-36절입니다.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 모슨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순종하여 의에 이를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까? 긍휼입니다. 긍휼(矜恤)이란 불쌍히 여겨서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불쌍히 여김을 받기 싫어합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기 싫어서 그렇게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서 또 열심히 노력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일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아주 극소소이고 대부분의 열심들은 자신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자존심 상하여 열심히 하는 자들이라고 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긍휼로만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십니다. 만약 그러한 행위로 의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자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약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 영광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려고 합니다.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 것이 근원적인 죄입니다. 구원이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18강 다윗 언약(1)

 

오늘은 다윗 언약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땅과 후손이었습니다. 그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땅의 경계를 다 차지한 사람이 바로 다윗 왕입니다. 이 다윗 왕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데 다윗의 후손과 그 위를 대대에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 위(位)란 왕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이 됩니다.

 

오늘부터 다윗 언약에 대하여 몇 번에 걸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윗을 보기 위하여 먼저 사울을 보아야 합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것은 백성들이 요구한 왕입니다. 사무엘 노년에 사무엘의 자녀들은 사사로 합당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사무엘조차 자식농사를 망친 것입니다. 그러면 사무엘이 기도를 쉬지 않는 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의 역할로서 기도를 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도는 로마서 8장에서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마치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한 방법론으로 여기는 것은 성경을 잘 못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무엘의 사사사역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섭섭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무엘상 8:6-9절입니다.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상이 어떠한지를 여기서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왕을 원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통하여서 다 보여주셨는데도 그런 여호와 하나님보다 다른 이방나라의 왕들처럼 힘 있는 왕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버리는 것입니다.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이러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왕을 허락하라고 하십니다. 왕을 세우면 고생 할 것을 말하여도 왕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주어진 왕이 사울입니다. 백성들보다 머리 하나 더 있을 정도로 키 크고 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처음에는 겸손하였지만 왕이 되어 전쟁에서 몇 번 승리를 하자 교만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에 더 관심을 가지고 백성들 앞에서 존귀함을 받기를 원하고, 전쟁의 승리를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는 그런 사울이었습니다. 이런 사울을 하나님께서 폐하시고 자신의 마음에 맞는 왕을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다는 것은 다윗의 마음이 선천적으로 착해서 하나님께서 마음에 맞는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원한 왕인 사울과 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를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사도행전 13:21-22절입니다. “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사울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원한 왕이고, 키가 보통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한 사람입니다. 키만 껑충하게 큰 것이 아니라 싸움도 잘하는 장군입니다. 이런 왕을 백성들은 만세하면서 따랐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소년 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아들들 데리고 하나님의 제사에 참여하라고 하였을 때에 다윗은 참석도 시키지 아니한 아이였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일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을 말할 때에 영웅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인간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 등장할 때부터 골리앗을 죽임으로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칭송을 들으며 화려하게 등장하지만 그 또한 죄인임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다윗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가질 지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서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이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극적으로 묘사를 합니다만 그러나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가 넘고 창은 6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창을 휘두르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한 키 크고 힘 있는 왕인 사울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는 용사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내용이 됩니다.

 

다윗이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물리치고 사울에게 보고할 때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과 알아봅니다. 요나단 자신이 이미 여호와의 전쟁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삼상 14:6절입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의 구원을 세상의 힘으로 가늠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수가 많고, 돈이 많고, 능력이 많아야 세상을 이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나단과 다윗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여호와의 전쟁은 세상의 방법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다윗과 같은 약한 자를 택하여 세상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일에 다윗이 합당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고 세상의 원리를 믿고 따르는 것에 대한 고발조치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된다고 믿습니다.

 

19강 다윗언약(2)

 

주 안에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은 다윗 언약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다는 말씀은, 다윗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천성적으로 착한 마음을 가졌다는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할 만한 그런 왕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예측과 전혀 빚나가는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심지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사무엘조차 이새의 장남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실 자인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을 펼쳐내시는 일에 다윗이 합당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을 때에 하늘의 별과 같이 후손을 많게 하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오랜 결혼생활동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부부를 통하여 열국의 아비를 만들어 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방식입니다.

 

오늘은 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오려다가 실패한 사건을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실패한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 이삭을 주시는 방식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자신이 마련한 장막으로 언약궤를 옮기려고 합니다. 사무엘하 6:1-3절입니다.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모으고 언약궤를 메어 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오다가 소가 뜀으로 웃사가 언약궤를 붙들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분노합니다. 8-10절입니다.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기서 다윗이 분하였다고 합니다. 왜 분노하였을까요? 다윗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언약궤를 아무 곳에나 방치하여 두지 않고 자신이 특별히 마련한 장막에 모셔두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이라고 여기고 분하였습니다. 나의 정성을 몰라주시다니!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다윗이 언약궤를 모셔 가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장들이 메고 가야하는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간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비추어보면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다윗 자신이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호위하여 가려고 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6:1절 보시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동원하였습니다. 새 번역과 공동번역을 보면 ‘정병’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는 ‘best soldiers’입니다. 즉 정예 병사 삼만 명을 동원하여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다윗 자신은 정성을 다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셔가려고 하였겠지만 그 모양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호위를 받아야 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이 장면을 마음에 한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정예병사 삼만 명이 호위하여 가는 어마 어마한 행렬입니다. 그 군인을 지휘하는 다윗 왕의 위엄이 얼마나 대단해 보이겠습니까? 언약궤는 마치 다윗의 전리품처럼 수레에 실려 가는 모양입니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모습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모양으로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가장 여호와의 일을 멋있게 하겠다고 나섭니다. 내가 한국에서 최고의 성전을 지어 바치겠다고 합니다. 내가 세계에서 가장 큰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래서 꿈과 비전을 크게 가지라고 합니다. 실패한 다윗의 모습이 가장 성공한 모습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언약궤는 어떻게 움직입니까? 사사시대 때 언약궤를 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투에서 진 이유를 언약궤가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하여 엘리의 두 아들이 언약궤를 메고 왔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사기가 충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언약궤 곁에서 죽임을 당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겨 버렸습니다. 블레셋 땅에 옮겨진 언약궤는 그들의 신상을 파괴하며 언약궤가 가는 곳 마다 재앙이 일어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런 재앙이 언약궤 까닭인지 알기 위하여 멍에를 한 번도 메지 아니하고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에 언약궤를 실어 보내니 소가 울면서 똑바로 벧세메스로 향하여 갔습니다. 여기서는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도 소가 본능을 억제당하며 갔습니다. 이방인들은 언약궤 운반방법을 몰랐지만 언약궤를 실은 소가 바르게 가는 것으로 여호와의 언약궤 까닭에 재앙이 내린 것임을 블레셋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율법도 알고,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언약궤를 호위하여 가려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궤를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들여놓게 합니다. 가드 사람이라면 블레셋 사람인데 이스라엘로 귀환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다윗이 화가 나서 그 사람의 집에 언약궤를 들여놓게 하였는데 이 사람의 집이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언약궤를 메고 가려고 왔습니다. 이번에는 제사장들이 에봇을 입고 제대로 메고 갑니다.

 

사무엘하 6:13-15절입니다.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언약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이 제사를 드리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속옷이 보일 정도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이제 다윗은 알았습니다. 자신이 언약궤를 호위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호위하여 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린아이처럼 기뻐 뛰며 찬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던 미갈이 다윗을 보고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낸 것처럼 계집종들에게 채신머리없이 행동하여 계집종들에게 몸을 드러내었다고 비웃습니다. 이때 다윗이 하는 말입니다.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내가 뛰놀겠으며 계집종에게는 오히려 높임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윗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미갈은 다윗의 아이를 가져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사무엘하 16장을 보면 압살롬이 반역합니다. 이때 사독이 언약궤를 메고나와 다윗을 따르려고 합니다. 언약궤가 가는 곳에 민심이 따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다윗은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중심임을 알았습니다. 정예병사 삼만 명을 동원하여 여호와를 호위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반역하여 쫓겨 가도 마땅한 죄인에게 언약이 함께 하면 복인 줄 알았습니다.

 

20강. 언약을 따라서(다윗언약3)

 

다윗언약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이 언약궤를 모셔가려다가 첫 번째 실패를 하고서 두 번째 모셔간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윗이 실패한 모습을 성공으로 여길 것입니다. 정예병사 삼만 명을 동원하여 여호와의 일을 이루어내면 그 지도자가 얼마나 멋있어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이 얼마나 멋있는 과업을 이루어내었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하신 바를 신실하게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다 이루어내신다는 것이 성경의 언약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을 주시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7:1-3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1절을 보시면 다윗이 원수를 무찌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모든 원수를 무찌르시고 다윗을 왕궁에 평안히 살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언약궤가 휘장 가운데 있으니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도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하라고 합니다. 즉 성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나단의 생각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말씀하십니다. 5-7절입니다.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너무나 의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고맙다 네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였으니 내가 더욱 너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나의 집을 지으라고 하였느냐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신다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리려고 하였기에 이런 복을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 부으시고 언약을 주셨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이루어주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자기언약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8절 이하에서 보시면 사사시대와 같지 않고 사울과도 같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너의 아들이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범죄 하면 징계는 하시지만 사울에게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16절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이 나단 선지를 통하여 이 언약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 하는 내용이 18-29절입니다. 주께서 베푸신 크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또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들은 여호와의 주되심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크고 놀라우신 주님께서 언약을 세워주시고 주의 백성을 삼으신 것에 대하여 기도하는 내용을 봅니다.

 

“24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25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26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주의 언약의 말씀을 듣고 이 기도를 한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을 듣고서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언약을 이제 신실하게 이루어주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어쩌면 뻔뻔해 보이지만 이것이 언약을 받은 자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의 언약이 종의 집에 이루어지는 것이 복이오니 이 언약이 종의 집에 영원히 있어서 복을 받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구절을 교인들의 사업장이나 가정에 많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연 그 복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복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으니 그 언약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언약대로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짓게 됩니다. 성전을 다 지은 솔로몬이 기도하는 내용이 열왕기상 8:17-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다고 합니다. 다윗이 성전을 위하여 준비하고 솔로몬이 지었지만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성전을 지었습니까? 21절입니다. “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처소를 설치한 것입니다.

 

다윗처럼 솔로몬도 기도합니다. 22-26절입니다. “22 솔로몬이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과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2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24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 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서 나서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26 그런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주는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성전봉헌기도인데 그 내용은 여호와께서 주의 종 다윗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시고 확실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처럼 뻔뻔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오직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에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솔로몬이 얼마나 엄청난 우상숭배를 합니까? 그러나 다윗을 위하여 솔로몬 시대에는 그의 나라를 빼앗지 아니하시고 그 아들의 시대에 나라를 나누십니다. 이런 일을 말씀하실 때에 다윗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남 유다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말씀이 다윗을 위하여 멸절하지 아니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다윗 왕조도 바벨론에 의하여 끊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내용은 어떻게 됩니까? 놀랍게도 마태복음 1: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이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주와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이 언약으로 주어집니다. 이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21강. 언약을 따라서(다윗 언약4)

 

주 안에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다윗 언약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내십니다. 그 언약대로 다윗에게 허락한 영원한 왕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듯이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다윗에게 임하여 그렇게 증거 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복음 전하는 사도들이나 간에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시편 110:1절의 말씀으로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 되겠느냐는 말씀을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다윗보다 또 아브라함보다 선재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실 때에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힌 유대인들로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증언 한 것이 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오늘은 다윗이 무슨 복을 받았는지를 보면서 다윗 언약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흔히 다윗의 복이라고 하면 목동이 왕이 된 것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땅을 다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훌륭하여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시기 위하여 다윗을 택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한 다윗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치른 사람이 다윗이 아니라 사실은 다윗에 의하여 살해당한 우리아와 같은 사람이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을 제대로 치른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다윗이 거의 다 정복하였을 즈음에 이제는 한숨 돌리며 왕궁에서 쉬고 있습니다. 장군들과 이름 없는 군인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때 밧세바와 간음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에 나가 있는 용사의 아내를 다윗이 범하였습니다.

 

다윗 왕은 밧세바가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범죄를 숨기기 위하여 전방의 요압 장군에게 명령을 합니다. 우리아로 하여금 전쟁의 상황을 왕에게 보고하게 합니다. 우리아가 왕에게 보고한 후에 다윗 왕은 우리아를 자기 집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보고 싶은 아내에게로 달려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왕궁의 경비실에서 군사들과 함께 자고 아내에게 가지 않습니다. 다윗 왕이 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에 우리아의 답변입니다.

 

사무엘하 11:11절입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의 군대가 야영 중에 있는데 어떻게 내가 집으로 들어가 먹고 마시겠느냐며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우리아에게 하루를 더 머물라고 하고서는 임금이 술을 많이 먹여서 취하게 하여 집으로 보냈는데도 역시 군인들과 함께 잤습니다. 술에 취하는 것보다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에 대한 사명감이 더 투철하였습니다. 이에 다윗 왕이 요압 장군에게 밀서를 보내어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우리아는 자기를 죽이라는 다윗의 편지를 들고 요압에게 전달하고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요압이 죽고나자 밧세바를 자기의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것으로 끝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다루십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책망을 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비유로 책망을 합니다. 양이 많은 부자와 한 마리 양만 있어서 가족과 같은 사람이 있은데 양이 많은 부자가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가난한 집의 양 한 마리를 빼앗아 대접하였다고 할 때에 다윗은 그런 자는 죽임을 당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네 배를 배상하여야 하기에 곧 율법대로 말합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간음과 살인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방 왕의 모습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이방의 왕들은 이런 것을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그 악한 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이때 다윗이 고백한 회개의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자신이 죄악 중에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흔히 모태 신앙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오히려 정확한 말은 모든 인간은 모태죄인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죄로 인하여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한 우리아가 다윗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영원하게 견고하게 하시는 것은 결코 다윗의 능력이 아닙니다.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한 자로 들어나고 다윗의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우리아처럼 예수님께서 다윗의 죄를 인하여 대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다윗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4:6-8절입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증언한 내용을 바울사도가 인용하면서 다윗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복이란 바로 앞에 아브라함과 연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또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으로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러므로 다윗이 받은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한 것도 없이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림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어려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왕이 되었지만 그 왕의 자리에서 간음과 살인을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며 다윗이 받은 복입니다. 이러한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여져서 소떼와 양떼가 많아지고 목동에서 왕이 되는 그런 것과 감하 비교할 수 없이 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속죄의 기쁨이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22강. 언약을 따라서(새 언약 1)

 

오늘부터 새 언약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옛 약속이고 신약은 새 약속입니다. 그런데 새 약속의 내용은 이미 구약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나서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하여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율법적인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선지자들이 알았습니다.

 

물론 이런 선지자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모세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새 언약의 대표적인 두 곳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서입니다. 오늘은 첫째로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서 전한 내용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을 주시는 이유는 모세 언약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모세언약은 출애굽하여 세워진 언약입니다.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남편이 되어 그들의 손을 잡고 이끌어 내었는데도 그들이 언약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몸은 애굽에서 끌려 나왔지만 그들의 마음은 애굽을 향한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천사의 손에 끌려 나오다가 뒤를 돌아본 까닭에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와 같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든지 이방인들이든지 간에 옛 언약으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을 체결하는 것은 옛 언약인 모세의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지켜내지 못함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경험하였습니다. 이미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고 40일도 지나지 않아 언약을 배반하고 금송아지를 섬긴 자들입니다. 이들이 사시시대와 왕들의 시대를 거치는 약 천년의 기간 동안 행한 일이라고는 언약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언약을 어겼는지 예레미야서에서 몇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예레미야 2:4-13절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본문을 길게 읽어드리는 것은 말씀 자체가 무엇을 증거 하는지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지나친 해석과 적용이 오히려 성경의 본문을 가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왜 새 언약을 이미 구약에서 말씀하시는지 구약의 본문들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입니다.

 

“4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 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방의 나라들도 자기들의 신을 바꾸지 않았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배반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온갖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두 가지 악을 행한 것인데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죄가 여기에서도 드러납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살리겠다고 나서는 것이 두 가지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타력구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마치 자력구원인 것처럼 들립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스스로 생명수를 만들어 담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물을 가두지도 못할 터진 웅덩이를 만드는 모습이 팽배한 시대입니다.

 

예레미야 7:1-11절입니다.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시대에는 건물로 된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에 안식일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예레미야가 가로막고 서서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이곳이 성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라서 건물로 된 성전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건물로 된 성전이 있었는데 그 성전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까?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성전에서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이 건물을 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3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고소를 당하지만 예수님의 몸이 성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곳만 더 봅니다. 예레미야 13:23절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새 언약을 예언한 것은 옛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이 이러함을 드러내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인간의 율법지킴이나 의로운 행위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이를 수가 없음을 보이면서 새 언약을 말씀하십니다. 이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이 되는 것이며 그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십니다. 이 새 언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생명이며 복입니다.

 

23강. 언약을 따라서(새 언약 2)

 

지난 시간에 새 언약 첫째 시간에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오늘은 에스겔서에서 새 언약의 내용을 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예레미야를 통하여 새 언약을 예언한 것은 남 유다가 멸망하는 배경입니다. 오늘 볼 에스겔이 예언하는 새 언약은 이미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나라의 멸망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미 모세 언약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면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 언약 이전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언약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먼저 보여주시고 나서 모세의 언약을 주신 것은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음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모세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레미야에서 보았던 것처럼 철저하게 언약을 배반한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안식일마다 부지런히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하여 성전에 나아갔지만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행위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속이고 부자가 될까를 생각하면서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보는 말씀이 에스겔서 에서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온갖 우상이 가득함을 보여주십니다.

 

에스겔 8:11-16절입니다. “11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12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13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다시 그들이 행하는 바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15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새 언약이 예언되는 예레미야서에서는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 보이는 성전 안에는 온갖 우상이 가득합니다. 백성의 장로 70명이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고 하면서 우상을 향하여 분향합니다.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합니다. 더 큰 가증한 일은 스물다섯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합니다. 여기의 25명은 제사장 24명과 대제사장의 숫자입니다. 여호와를 경배해야 할 제사장마저 태양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남 유다마저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습니다. 이런 절망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미 옛 언약 하에서 어떻게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다 드러내시고 나서 새 언약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을 주신다는 것은 왜 옛 언약으로는 안 되는지를 철저하게 드러내시고 새 언약을 주십니다.

 

에스겔 11:17-21절입니다. “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18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1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남은 유다지파 그 중에서 마지막 남은 성읍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마저 완전히 파괴가 됩니다. 그리하여 각 지역으로 흩어진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다시 이스라엘 땅에 돌아가서 우상을 제거하여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시는 것입니다. 새 영을 주신다는 것은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주의 율례를 따르고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야만 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에스겔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상태를 환상 중에 보게 하십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에스겔 37장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은 바짝 마른 뼈다귀만 가득한 골짜기를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이 마른 뼈들이 살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자 에스겔은 주께서 아신다고만 답변을 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말씀을 봅니다.

 

4-1절을 보겠습니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이것이 바짝 마른 뼈다귀, 전혀 소망이 없는 해골 상태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의 능력으로 살아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12-13절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의 상태가 해골이며 무덤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온통 우상숭배로 가득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새 영을 그들의 속에 두어서 살아나게 하고 고국 땅에 두시겠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이 일을 말하고 이룬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란 여호와께서 약속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언약하시고 언약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24강. 언약을 따라서(새 언약 3)

 

지난 시간에 에스겔서에서 새 언약의 내용을 보았습니다. 새 언약이란 새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새 마음이란 새 영을 부어주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시는지 에스겔서 36장을 통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15절까지는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이방나라들의 조롱거리가 된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을 조롱한 이방나라는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은 회복하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죄에 대하여는 밝히 드러내십니다.

 

16-20절입니다. “16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20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 함으로 그 땅을 더럽혔습니다. 언약의 땅은 백성들이 범죄 하면 백성들을 토하여 내쳐 버립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사로잡혀간 여러 나라에서 거룩한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힌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다른 나라에 망하고 포로로 잡혀갔느냐는 말을 듣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힌 것입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들이 잡혀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어느 나라가 이기면 그 이긴 나라의 신이 강해서 이겼다고 보기에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무능한 하나님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포로로 잡혀간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 언약에서 우상을 섬기면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다는 언약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신 모습입니다. 이방 나라의 우상들은 언약의 신들이 아닙니다. 가짜 언약을 만들어 내어도 그 언약을 지켜낼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가 나오는 것을 룻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룻기서를 보면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이민을 갑니다. 그 곳에서 두 며느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남편이 죽고 두 아들도 죽고 과부만 세 명이 남았습니다. 이때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오려고 합니다. 두 며느리가 따라오려고 하자 나오미가 자기를 따라 오면 아무른 소망이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재혼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룻은 끝까지 따라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잘못하였을 때에 치시는 하나님임을 알고 따라온 것입니다. 즉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도할 때에 예수 믿고 성공한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실패 이야기도 하지만 그런 실패보다 더 큰 성공한 이야기들만 간증을 하는데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는지 보여줍니다.

 

에스겔 36:21-23절입니다.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함으로 여러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고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힌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제는 그들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도록 흩어진 나라에게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셔도 그들은 아무른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까?

 

24-28절입니다.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언약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들임이 옛 언약으로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은 여호와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여호와의 자기 이름을 위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부터 회개하는 것입니다. 31-32절입니다.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 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구원받은 자들이 하는 일이 자기 죄악과 가증한 일로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고 부끄러워하고 한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언제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은 아직 그림자입니다. 실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지만 새 마음과 새 영이 부어지지 않았습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이 부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반성을 하게 됩니다. 왜 포로로 잡혀갔는지 자기반성을 하면서 율법을 보니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일어난 운동이 바리새 운동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들이 분리하여 율법을 지키자는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여전히 미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드디어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약속한 메시아가 왔습니다. 이제 새 마음과 새 영을 부어주실 분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을 누가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였습니까? 율법의 기능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문자적으로 지켜온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약의 줄기를 보면서 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인 은혜언약을 먼저 주시고 나서 모세에게는 상호언약을 주셨는지 보았습니다. 모세 율법으로는 의에 이를 수가 없기에 새 언약을 약속하셨는데 그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분을 옛 언약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새 언약의 완성 자를 배척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에 입문을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가능성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율법을 흠 없이 지킨다고 한 자들의 결국이 새 언약의 완성 자를 죽였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때에 새 언약의 어떠함을 알고, 모든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믿고 새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25강. 언약을 따라서(새 언약 4)

 

새 언약 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를 통하여 새 언약의 예언과 성취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요엘서에서 새 언약의 예언과 성취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엘서 2:28-32절입니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28절절과 29절에서 하나님의 영을 자녀와 늙은이와 젊은이에게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신다고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도 다 새 언약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장래 일과 꿈과 이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장래 일과 꿈과 이상을 보게 될 것인데 과연 이 꿈과 이상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의 꿈과 비전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부어짐으로 인하여 말하게 될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1-2절입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장래의 일과 꿈과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은 이제 하나님의 신이 부어지면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엘서 2장은 여호와의 두려운 심판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과 피와 연기의 이미지는 심판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이 부어지는 말세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그것이 심판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장래의 일이며 꿈과 이상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시면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말로 알아듣는 것입니다. 이때 그들이 하는 말이 사도행전 2:11절에서 하나님의 큰일을 듣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보고서는 조롱하며 술에 취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라고 하면서 요엘서를 인용합니다.

 

14-21절입니다.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요엘서의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가 되었음으로 지금 성령을 통하여 증거 합니다.

 

요엘서만이 아니라 다윗의 시편으로도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22-31절입니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ㄴ)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시 16:8 이하)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니 요엘 선지자와 다윗이 미리 보고 예언한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선지자들이 미리 본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증거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는 그 약속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취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34-36절입니다.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ㄷ)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시 110:1)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것이 성령이 임한 자들이 증거 한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는 반드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복음이 증거 된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과 한 통속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을 좋게 하는 다른 복음이 전하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에스겔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보여줍니다.

 

37-42절입니다.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 패역한 세대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도록 또한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26강. 언약을 따라서(새 언약 5)

 

오늘은 말라기를 통하여 새 언약의 예언을 보려고 합니다. 구약 전체가 다 새 언약을 예연하고 있습니다만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말라기서에서만 본 것입니다.

 

먼저 말라기 1:10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구약 성경의 마지막인 말라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성전 문이 닫혀 버리면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로부터 용서 받을 길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말라기 1장에서만 보면 크게 두 가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며 무지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내 백성이 망한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르므로 여호와를 바로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입니다.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말라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말라기 1:2-5절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가난하나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면서 항의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나라는 연약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우리에게 강력한 힘을 주시고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다스려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답변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야곱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는지 바로 앞에 섰을 때에 자기 나그네 세월을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합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아내를 위하여 14년을 고생하고 자기 재산을 위하여 6년을 불철주야 고생합니다. 얍복강에서 천사에 의하여 환도 뼈가 위골되어 평생에 장애인이 되어 지팡이를 의지하여야 했습니다. 아들이 계모를 범합니다. 딸이 강간당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자기 아들들의 손에 의하여 노예로 팔렸습니다. 야곱은 들짐승에 찢겨 죽은 줄 알았습니다. 왜 이런 고생을 하는 것입니까? 인간의 야망을 끊어내시고 하나님의 약속 하나 붙들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지금 말라기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 하였느냐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에서는 아무른 고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사병이 318명인데 에서는 무려 400명입니다.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에서가 훨씬 더 부자입니다. 에서는 고생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습니다. 강대한 민족으로 세워짐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버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제사장들조차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예물을 눈속임으로 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1:6-9절입니다.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첫 번째 오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 이름을 멸시한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우리가 어떻게 멸시하느냐고 항의합니다. 이들이 더러운 떡을 드리고 눈먼 희생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도 안 주는 하나님께 뭘 좋은 것으로 드리겠느냐는 식으로 하나님의 제단을 멸시하면서 형식적으로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깨어진 모습입니다. 부자 관계나 부부관계가 형식적인 것만 남은 경우는 사실상의 관계는 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멸시를 하나님께서 더 이상 받지 않으시겠다고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이방인 가운데서 여호와의 이름이 높아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11절입니다.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이러게 이방인이 주께로 돌아올 것이 구약에서 증거가 됩니다.

 

말라기 4:5-6절을 봅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요엘서에서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이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크고 두려운 날이 바로 메시아가 오시는 날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하여 먼저 엘리야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죽은 엘리야가 어떻게 옵니까?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마11:14). 그러므로 모든 옛 언약은 세례요한의 손가락으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9절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는 것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성전을 통하여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건물성전의 문을 닫아버리시고 자기 몸으로 성전을 만들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옛 언약이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모든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 한다고 하셨습니다(요5:39). 옛 언약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거 한 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27강. 언약을 따라서(새 언약 6)

 

새 언약이라는 제목으로 구약의 성경을 5번에 걸쳐서 보았습니다. 구약 전체가 새 언약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 몇 곳에서만 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신약에서 새 언약의 내용들을 보려고 합니다. 신약에서 새 언약을 본다는 말이 어폐가 있습니다. 신약이라는 말 자체가 새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새 언약과 언약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구약의 언약들이 어떻게 완성이 되는지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물론 아들과의 창세전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언약들이 구약 속에서 모형으로 드러나고 신약에서 완성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자신의 뜻대로 하신 것이 하나도 없고 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38-40절입니다.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다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18절에서 시편 41:19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가룟 유다의 배신도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15:25절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미움을 받는 것도 성경에 기록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율법이라고 하시는 것은 구약 전체를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시편 35:19절과 시편 69:4절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속옷을 가지기 위하여 제비 뽑는 것과 십자가에서 목마르다고 하신 것과 십자가에서 뼈가 꺾어지지 아니하신 것이 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지만 특히 사도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설교한 내용은 구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이 길지만 사도 바울의 설교를 직접 듣는다고 생각하시고 한번 들어보시기기를 바랍니다. 유의할 것은 어떻게 구약의 성경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15-41절입니다.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ㄱ)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삼상 13:14; 시 89:20)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ㄴ)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시 2:7)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ㄷ)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사 55:3) 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ㄹ)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시 16:10)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ㅁ)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합 1:5)”

 

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서 일어난 반응을 계속하여 보겠습니다. “4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ㅂ)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사 49:6)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바울이 이렇게 분명하게 구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믿습니다. 반대하는 자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며 그 지역에서 쫓아냅니다. 구약의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복음을 동일하게 들었는데 반응은 전혀 다른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는 것도 성경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배척하는 것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복음이란 성경으로 모든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복음은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28강. 언약을 따라서(새 언약 7)

 

오늘은 새 언약의 핵심을 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22:20절입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것이 모든 언약을 완성하시는 자리이기에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자리는 저주의 자립니다. 신명기 21:23절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들에게 정말로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가 어떤 저주인지 갈라디아 3:13절에는 이렇게 증언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 저주 받으시고 우리를 속량하신 저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의 살과 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속죄이며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며 그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과 영원한 기업이 그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십자가는 아랑곳없이 마치 십자가를 부적처럼 도깨비 방망이처럼 알라딘의 램프처럼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유명한 작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는 자신은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이 세상의 필요한 어떤 것을 달라고 하지 못하겠더라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에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한 가지라도 가지고 계신 것이 없습니다. 속옷 까지 다 벗겨진 주님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 저주를 받지 않고 모든 복을 받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이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보이는 것은 성도의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로마서 8:24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도 교회가 말하는 소망들이 눈에 보이는 비전들을 제시합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수나 힘이 있으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성경을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내어서 보암직한 업적을 만들어 내는 것을 성경은 탐심이라고 합니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이 세상이 치열한 이유는 탐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 탐심을 마치 소망처럼 속이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 예수님의 피로 완성이 된 것을 아는 사람은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기억하고 전하야야 할 내용이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1:23-26절입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찬식 때만 듣는 말씀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찬식은 일 년에 한 두 번만 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는 날마다 모여서 함께 떡을 떼었습니다. 날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개신교도 주일마다 성찬식을 행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성찬식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이 전하여지는 설교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전해야 할 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새 언약만이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 받는 자리이며 또한 자기 백성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이 얼마나 엄청난지 고린도후서 3:6-18절입니다.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죽이는 옛 언약의 직분도 영광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살리는 새 언약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시대에만 수건이 가려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구약을 읽으면서 수건이 가려져 있다면 주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이란 새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새 언약을 봅니다. 8:8절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8:13절입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9:15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24절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의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시면 주인의 아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 주인이 무엇으로 분노하며 진멸하는 것입니까? 그 아들의 죽음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기준이 그 아들의 피, 새 언약입니다.

 

히브리서 10:26-29절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새 언약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9강. 언약을 따라서(십자가 1)

 

그 동안 새 언약이라는 말로 구약과 신약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기에 십자가로 말해도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십자가의 의미를 새 언약과 연결하여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의 십자가란 지금 우리가 십자가라는 말을 하는 것과는 너무나 엄청난 시공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공개적인 교수형을 처한다고 하면 얼마나 끔찍한 모습이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 때로는 수 백 명이 십자가에 공개 처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로마를 반역한 자들 중에 이방인을 십자가형에 처형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침 뱉고 고개를 도리질 하면서 비웃고 조롱하며 모두가 실패하였다고 돌아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언약을 통한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우리는 거저 수많은 종교의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종교란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하는 것도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또는 신과 인간의 상호 협력하여 원하는 것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증거 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의 길은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여기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마치 자기 금욕적인 행위로 욕망을 억제하는 불교적인 자기부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부인은 얼마나 철저합니까? 세속과 단절하기 위하여 가정도 세상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산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이 다시 세상의 권력까지 흔드는 권력이 되어버립니다만 이런 자기부인을 하는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자기부인의 말씀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금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자기 부인 또는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애를 먹이는 남편이나 아내 시댁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때로는 가난이나 고질적인 질병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인생들이 마땅히 지고 가야할 형벌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죄로 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과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행동을 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있을 때 행동합니다. 그 모든 행동의 근원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을 확대하면 가족이며 좀 더 확대하면 국가이고 지구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여 희생하면 영웅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을 무엇을 주기위하여 오셨다고 하십니까? 서로 사랑하고 화평하라고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자식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서로 불화하게 되며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마태복음 10:1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38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부모나 자식을 버리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목숨조차 미워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4:25-27절입니다.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일이 과연 인간에게 가능합니까?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의 목숨조차 미워하면서 십자가를 지고가면 영생을 얻고자하는 것도 자기 사랑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자기금욕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지고 갈 수 없는 것임을 확인시키시는 자리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마태복음 16:16절부터 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게 된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합니다. 이 고백 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가 듣고 항변합니다. 그런 일이 주께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합니다. 왜 이러실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십자가에 죽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탄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16: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한다고 한 말이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다면 이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십자가란 말 그대로 사형형틀입니다. 네가 나를 위해 하려는 것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다루고 이끌어 가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다른 사람은 다 예수님을 부인하여도 자신은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부인하실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새벽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하고 나서 닭이 울었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자신이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한 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의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이제 베드로의 남은 생애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베드로에게 덮쳐오는 방식입니다. 요한복음 21: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제는 내 뜻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끌려간다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뜻입니다.

 

30강. 언약을 따라서(십자가 2)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ㄱ)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힘이 부족하니 주변의 힘을 동원하고 심지어 신의 힘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주변의 힘을 동원하는 것도 힘이 들지만 신의 힘을 빌리려면 더 지극한 정성을 바쳐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결국은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만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도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십자가의 도라는 말씀이 있고 이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로 보면 거리끼고 미련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련하고 거리끼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십자가의 도로 구원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전도를 사람들이 잘 알아듣고 좋아하는 방법으로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꺼려하고 싫어하는 십자가의 도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이 일어났다면 인간의 공로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일하심으로만 되었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모르면 고린도 교회처럼 파벌이 생기고 자기 자랑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주변에는 얼마나 수많은 전도 방법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전도방법을 소개하면서 자기들의 방법이 미련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전도방법을 적용한 교회들이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런 방법들이 너무 많아서 다 말하기도 곤란할 정도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은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방법입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은 또 걸림돌이 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해버린 것입니다. 스스로의 지혜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십자가를 알고 믿게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멸망 받는 자들에게 십자가란 미련하게 보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두 편으로 나누어 버리시는데 그것은 십자가로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고서 미련하게 여기는 자들은 멸망 받는 자들이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는 자는 구원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이나 구원해보라는 조롱 속에 힘없이 약하심으로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신명기 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받아 죽은 것이라고 하였기에 유대인들이 보면 정말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일 뿐입니다. 메시아가 와서 강한 능력으로 자기 민족을 구원하여줄 표적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냥 십자가에서 달려죽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수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지만 정작 보여주시고자 하는 최종의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 삼일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땅속에 삼일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표적이 보여줄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미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22절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까? 거리낀다는 것을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능력이 아니라 실패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조차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돌아선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능력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 왜 십자가를 지는 메시아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입니다. 헬라인들의 신의 개념으로는 신이 육체를 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다는 것 자체가 미련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의 삶의 원리란 인과율의 세계입니다. 자기의 행위를 자기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내가 선행을 하면 그 보상을 내가 받는 것이고 내가 악행을 하면 내가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원리가 이렇지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보는 동화나 어른들의 민담들이 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면서 선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자고 합니다. 그것이 윤리요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도 윤리와 도덕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이 서로 착하게 살도록 만드는 기능으로 보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신이 복을 주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고 나쁘게 살면 신이 벌을 주고 죽어서도 나쁜데 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사형당하기 직전에 예수님 믿습니다하는 것으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강도가 천국 간 것을 믿으십니까? 그게 세상 지혜로 될 말입니까? 평생토록 율법을 지키고 금식하고 전도하고 죄를 짓지 않고 살았던 바리새인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본 자손들은 빼앗기고 이방인들이 차지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아니 믿고는 사람의 지혜나 실력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입지 않고서는 믿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너보다 낫다는 자기 자랑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니, 나는 어느 파니, 하는 것이 나올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자랑이 나온다는 것은 아직도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이지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란 날이 가면 갈수록 그리스도만 자랑되어질 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이의 지혜인 것입니다.

 

31강. 언약을 따라서(십자가 3)

 

갈라디아서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칼빈의 갈라디아서 강해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양식(良識)이 있는 사람 백 명을 면담해 보면 그 가운데서 로마 가톨릭에 잘못이 있다고 인정을 하려는 사람 한명을 찾기가 힘듭니다.” 칼빈이 이런 말을 한 배경은 가톨릭의 잘못된 것을 개혁한 사람이기에 이런 말을 합니다. 성경에서 죄인 된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이미 2천 년 전에 결정 난 사항입니다.

 

사도행전 15:1-5절 보시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한 곳에 내려와서는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이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런 논쟁의 결론을 사도들과 장로들의 회의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사도행전 15:10-11절을 봅니다.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의 말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믿지 못한 사실이지만 그가 성령에 이끌려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결과를 자신이 보았기 때문에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핍박받는 기독교가 세상의 힘을 가지고 군림하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오히려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온갖 이교적인 것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절기와 예식과 멋진 건물을 지으면서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오직 은혜라고 말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를 추가시키기 시작합니다. 오직 은혜라고 하면 사람들의 헌신과 열심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에 인간의 행위가 보태어져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시키든지 아니시키든지 간에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약속하면서 인간의 행위를 추가시킨 것은 교회가 힘을 원한 것입니다. 그 결과 캄캄한 흑암의 역사가 천년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내용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자들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이 땅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합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죽어서 천국 가서 더 많은 상을 받으려면 그것은 나의 행함과 비례한다고 합니다. 중세 가톨릭이 타락하여 간 모습이 지금 이 땅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을 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성경 66권이 전부 십자가만 말한 것이 아닌데 왜 바울사도는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는지 반발이 나오십니까? 반발이 나온다면 이런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고 육체를 자랑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까? 새 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이 말씀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에 죽은 세상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아직 살만한 세상으로 보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죽은 자로 봅니까? 산자로 봅니까? 세상이 우리를 볼 때 죽은 자가 아니라 아직 펄펄 살아서 악착같이 썩어질 세상의 것들을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거두어들이려고 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안에 반발이 일어난다면 예수님을 죽인 자들과 한 통속 이라는 증거입니다.

 

누가복음 23:10-12절입니다.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예수님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로마의 정치꾼인 헤롯과 빌라도마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됩니다. 두 사람이 친하게 되었다는 것은 공동의 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공동의 적, 공공의 적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죽여 버린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도행전 4:26-28절을 봅니다.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여기에 동의하고 합동한 자들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도 포함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그러므로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은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 되는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죽였기에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금만 손해가 와도 온갖 불평과 원망이 쏟아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 나온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이기에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32강. 언약을 따라서(십자가 4)

 

언약을 따라서 성경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언약을 따라 성경을 본 결론은 새 언약이며 그 새 언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세워진 것입니다. 한 마다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됨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빌립보서에서 십자가를 어떻게 증거 하고 있는지 보려고 합니다.

 

빌립보서 2:5-8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의 최종점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이 십자가의 죽으심만이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시는 자리입니다.

 

시편 85:10절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애는 긍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진리와 함께 만납니까? 진리대로 한다면 죄인은 모두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한 성경의 말씀에 따라 진리대로 심판하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애가 있습니다. 인애는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김입니다. 그런데 진리대로 한다면 불쌍하다고 봐주면 안 됩니다. 이 둘은 함께 만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충돌이 일어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와 화평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대로 하면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평이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의와 화평이 입을 맞춥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함께 만나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하신 것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이루시는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일어난 것임을 새기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런 것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적용을 해나가기 시작하면 다시 법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임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사람 열 명에게 물어보면 열 명이 다 다른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9-11절입니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모든 이름에 뛰어난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높아지실 이름에 대하여 이사야서를 봅니다.

 

이사야 52:13-15절입니다. “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지금 이미 하늘의 영광에 오르신 분이시지만 아직 역사 속에서는 그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영광의 세계를 묵시세계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을 역사라고 합니다. 역사는 묵시에 의하여 창조되고 유지되고 결론 내려집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증거 되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의 전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 전도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도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무릎을 꿇는 일은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권세 앞에 무릎을 꿇거나, 연인을 얻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전쟁에서 항복하여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수라면 무릎을 꿇느니 차라리 자결을 합니다. 그런 사람을 충성된 군인이라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저주 받아 죽은 십자가에서 달려죽은 예수의 이름 앞에 누가 무릎을 꿇겠습니까? 더구나 내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라고 하면서 그 앞에 당신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무릎 꿇음이 인간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진정으로 무릎을 꿇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기적이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지금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지금 무릎을 꿇지 않는 자는 재림의 날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7-19절에서 이렇게 증언 합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신으로 삼고 땅의 영광을 위하여 무릎을 꿇는다면 그 마침이 멸망입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무릎을 꿇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20-21절을 봅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하여도 그 구하는 것이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땅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면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신부가 신랑을 사모하듯이 기다릴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사람입니다.

 

33강. 언약을 따라서(십자가 5)

 

골로새서 1:20절입니다.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골로새서 1:21절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잠언 4:23절에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다는 말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흑암의 권세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원수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십자가의 피라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1:22-23절입니다.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런 것은 이미 기초라서 다 안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의 내용이 기초만이 아니라 복음의 중심이며 결론입니다. 이것을 놓쳐 버리면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의 일과 건물들과 역사는 남을지 모르지만 복음의 소망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왜 그러한지 골로새서 2:6-8절을 봅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고 그 안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런 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이기에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2:12-13절입니다.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세례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리스도 함께 묶이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함께 죽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은 우리를 어떻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함께 살리신 것입니까?

 

14-15절입니다.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역시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 즉 율법입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인간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법조문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복음을 자꾸 기초로 말하면서 빨리 졸업하게 만들고 사역자로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주 큰 문제가 나타납니다. 대한민국의 빨리 빨리 문화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서는 교회마저 세속화 되어버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교회들이 몇 년 만에 수 백 명에서 수 천 명으로 부흥하였다는 성공스토리들이 인기가 있고 그런 강의들에 사람들이 달려갑니다. 그런 프로그램들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2-3년의 과정만 마치면 주의 군사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 중심으로 가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를 붙들기 보다는 자신들의 행위를 붙드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6-18절을 봅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이미 새 언약이 완성이 된 신약시대에 아직도 그림자를 붙들게 하고 세상의 철학을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마케팅 원리로, 때로는 심리학으로, 때로는 경영의 원리들이 도입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꾸며낸 겸손,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머리를 붙들지 않게 합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급하는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스스로의 자구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악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 책망을 오늘 이 시대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전문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또 취미이지만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늘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초이며 중심이며 결론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처음에만 십자가를 언급하고 나중에 십자가가 빠져버린다면 그것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1)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1)말씀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대로 나아가라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완전한 곳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빛을 받고 은사와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타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함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엄청난 은사와 능력을 행하였다고 하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전함을 믿지 않는 것이 타락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2절은 이렇게 증언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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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강. 언약을 따라서(마무리)

 

오늘로 ‘언약을 따라서’라는 주제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2011년 10월에 시작하여 오늘까지 8개월 동안 33번에 걸쳐서 언약의 내용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첫 시간에 이런 말로 시작을 하였습니다. 왜 “언약을 따라서”라는 제목을 잡았느냐고 물으신다면 성경이 언약(言約)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이 있습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라는 말이고 신약은 새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모르면 성경의 중심을 모른다고 보아야 합니다.

 

언약이란 말로 약속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에 인간이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이루어 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9: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저주 받아 죽는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가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어내시는 자리입니다.

 

고린도후서 1:20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집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아멘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이루어내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옛 언약인 구약에서 철저하게 검증이 된 것입니다.

 

그 요약적인 결론을 바울사도는 로마서 3:9-12절에서 이렇게 증언 합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러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3:19-22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인간이 이루어 낼 수가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이 구약이며 그 모든 언약을 대신 이루시는 분이 오신다는 것이 옛 언약에서 계시하였습니다. 그 언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다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 언약 또는 약속들이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창세전 언약,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새 언약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이며 줄기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영광임을 지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 또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만 한 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26-29절을 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진리의 지식이란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받은 후에 짐짓 죄를 범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언약의 완성을 믿지 않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합니다. 모든 속죄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인데 이것을 믿지 않으면 속죄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형벌이 있을 것인데 그 형벌이 누구에게 내립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성령이 임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다는 그 언약의 피를 믿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밟아버린다면 더 이상의 속죄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또는 교회가 규모가 커지고 사업이 바쁘면 바쁠수록 일 중심의 신앙과 일 중심의 교회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 결과들이 교회당의 입구와 강단 앞과 벽과 주보에 쓰여 있는 수많은 비전과 목표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면 된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현실입니다. 십자가의 완성보다 사람들의 왕성한 사업만 보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수님은 이미 다 완성하셨습니다. 이제는 좀 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언약의 완성을 맛보며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반역자가 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한 참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면서 십자가와는 아랑 곳 없이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완성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괴로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10절입니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두 증인을 두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 두 증인을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이기고 죽여 버립니다. 그 결과로 땅에 사는 자들, 즉 땅의 것만 목적으로 살고 있는 자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런 장소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11: 8절입니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복음을 증거 한 두 증인을 죽여 버린 곳이 영적으로 말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합니다. 즉 심판받을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을 받을 세상이 되어 버린 곳이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을 가장 살 섬긴다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예루살렘입니다. 이곳에 성전이 있었고, 율법이 있었고, 제사장과 제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이 바로 소돔이었고 애굽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라는 곳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선포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소돔이 되고 애굽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은혜의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언약의 피 임을 믿고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