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서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무엇입니까? 단지 소문만 듣고서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자기의 종이 나을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남의 수하에 있고 자기 밑에도 부하가 있어서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인 자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런 믿음이 없었는데 이방인 백부장이 이런 믿음이 있다는 것은 믿음이 은혜의 선물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믿음을 자꾸만 나의 조건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시면 사람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성으로 가십니다. 나인 성은 가버나움에서 하룻길 정도입니다. 이 나인 성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죽은 자를 매고 오는 장례행력을 만났습니다. 죽은 자는 과부의 독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과부란 그야말로 비천한 사람입니다. 요즈음처럼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어서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얻어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 과부의 유일한 희망인 아들 그것도 독자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도 듣지 못하였는지, 들어도 예수님께 나아올 형편이 못 되었는지, 그 독자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그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과부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위로 하겠습니까? 제가 어릴 때에 이런 예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독자가 죽어서 스님에게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스님이 마을로 가서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사람의 집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가져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람이 죽지 않은 집안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결국 돌아다니다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죽어서 장사 지내려고 가는 것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연히 이곳에 오신 것이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들 피하여 가는 사마리아 우물가를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가셔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한 여인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세리장이 삭개오가 올라간 그 뽕나무 앞으로 우연히 가신 것이 아니듯이 나인 성에도 이 여인과 그 아들을 구원하시려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 가신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혹시 들었더라도 백부장처럼 회당을 지어준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이 친구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불쌍한 과부요 하나뿐인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 아들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 과부를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백부장이나 수로 보니게 여인 역시 자신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신이 예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물론 이조차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좋다는 말을 할 때에 자신이 불쌍하지 않고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여야 하는데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고 있기에 자기의 약함과 못남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잘남을 자랑하기 위하여 가면무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23편을 봅니다. “1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이 간구가 긍휼을 받은 자의 간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더 놀랍습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과부입니다.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되시니 장례행렬이 멈춥니다. 여기서 관이란 우리나라식의 관이 아닙니다. 시체를 베로 싸매고서 들것에 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들것에 손을 대는 것은 시체와 접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고서 깨끗함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정함을 자신에게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이제는 저주의 죽음조차 자신에게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그 관에 손을 대시고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씀을 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않고 그 자리에서 말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그 어미에게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은 경외감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눈앞에서 목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합니다. 이 죽은 자를 살리심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돌보고 계신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큰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중에 엘리야 선지자와 엘리사 선지자가 다 죽은 자를 살려냅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살려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바로 자기 말씀으로 죽은 청년을 살려 내십니다.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5:21-295절을 봅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들도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아들을 공경하게 합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하기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과부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 아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게 무엇을 주시는 것입니까? 지금 주님을 음성을 듣는 자들을 살아난 것입니다. 마치 죽은 청년이 살아나듯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죽어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진다면 이것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요일5:1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면 이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이 복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7:11-17 불쌍히 여기심 2012. 2. 5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서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무엇입니까? 단지 소문만 듣고서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자기의 종이 나을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남의 수하에 있고 자기 밑에도 부하가 있어서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인 자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런 믿음이 없었는데 이방인 백부장이 이런 믿음이 있다는 것은 믿음이 은혜의 선물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믿음을 자꾸만 나의 조건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시면 사람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성으로 가십니다. 나인 성은 가버나움에서 하룻길 정도입니다. 이 나인 성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죽은 자를 매고 오는 장례행력을 만났습니다. 죽은 자는 과부의 독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과부란 그야말로 비천한 사람입니다. 요즈음처럼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어서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얻어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 과부의 유일한 희망인 아들 그것도 독자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도 듣지 못하였는지, 들어도 예수님께 나아올 형편이 못 되었는지, 그 독자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그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과부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위로 하겠습니까? 제가 어릴 때에 이런 예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독자가 죽어서 스님에게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스님이 마을로 가서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사람의 집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가져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람이 죽지 않은 집안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결국 돌아다니다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죽어서 장사 지내려고 가는 것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연히 이곳에 오신 것이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들 피하여 가는 사마리아 우물가를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가셔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한 여인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세리장이 삭개오가 올라간 그 뽕나무 앞으로 우연히 가신 것이 아니듯이 나인 성에도 이 여인과 그 아들을 구원하시려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 가신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혹시 들었더라도 백부장처럼 회당을 지어준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이 친구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불쌍한 과부요 하나뿐인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 아들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 과부를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백부장이나 수로 보니게 여인 역시 자신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신이 예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물론 이조차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좋다는 말을 할 때에 자신이 불쌍하지 않고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여야 하는데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고 있기에 자기의 약함과 못남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잘남을 자랑하기 위하여 가면무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23편을 봅니다. “1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이 간구가 긍휼을 받은 자의 간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더 놀랍습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과부입니다.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되시니 장례행렬이 멈춥니다. 여기서 관이란 우리나라식의 관이 아닙니다. 시체를 베로 싸매고서 들것에 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들것에 손을 대는 것은 시체와 접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고서 깨끗함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정함을 자신에게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이제는 저주의 죽음조차 자신에게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그 관에 손을 대시고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씀을 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않고 그 자리에서 말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그 어미에게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은 경외감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눈앞에서 목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합니다. 이 죽은 자를 살리심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돌보고 계신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큰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중에 엘리야 선지자와 엘리사 선지자가 다 죽은 자를 살려냅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살려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바로 자기 말씀으로 죽은 청년을 살려 내십니다.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5:21-295절을 봅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들도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아들을 공경하게 합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하기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과부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 아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게 무엇을 주시는 것입니까? 지금 주님을 음성을 듣는 자들을 살아난 것입니다. 마치 죽은 청년이 살아나듯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죽어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진다면 이것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요일5:1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면 이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이 복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