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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7:1~20 길은 어디에? 2021. 11. 17

 

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4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5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6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12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3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4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15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1)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7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18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20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시편 77편의 표제어를 봅니다.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아삽의 시에 여두둔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여두둔도 레위인으로 찬양하는 사람입니다(대상16:42). 그러므로 아삽의 시에 여두둔이 곡을 붙여 부른 노래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아삽의 시 특징을 73편부터 봤습니다. 아삽은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문제로 하나님에 관하여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런 의문이 성전에서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생각, 곧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세상이 이 모양이냐고 하는 그런 질문을 함이 짐승과 같다고 합니다(73:22).

 

오늘 본문도 그런 의문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들은 수많은 말 중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인용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간증을 인용하기도 하고, 자기 간증도 하면서 기도하면 응답한다고 합니다. 응답이 안 되면 철야와 금식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이미 응답받은 줄 알고 선금 감사헌금을 하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까? 생존하기 위한 현실의 문제입니까? 수많은 사람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캄캄한 동굴이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 이들이 찾는 길은 생명의 문제이기보다는 생존의 문제이며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합니까?

 

본문 1~3절입니다. “봉독 셀라로 문단을 구별하여 살펴봅니다. 1절에서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는 하나님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 날에 주를 찾았습니다. 밤에 손을 들고 거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가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손을 거두지 않았다는 말은 밤을 새우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위로한다고 하지만 사람의 위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욥기에서 본 것처럼, 재난만 더하는 위로자들일 뿐입니다(16:2).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지만,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아는데 아무리 기도하여도 아무런 응답이 없어서 불안하고 근심하니 심령이 상합니다. (셀라)

 

본문 4~9절을 봅니다. 봉독 주께서 눈을 붙이지 못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는데(127:2), 잠을 못 자는 것은 환난 때문입니다. 그 환난이 무언지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지만 잠을 자지 못할 정도의 환난입니다. 이런 환난은 개인적인 표현을 하지만 성경은 언제나 대표적인 개인이기에 이스라엘의 환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밤에 노래하였다고 합니다. 밤에 노래한 이유는 기도에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노래를 기억하면서 간구합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셨는가?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이러한 의문이 구약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본문 10~15절입니다. “봉독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다른 번역은 나의 연약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언약을 따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일방적인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신실하게 이루어내셨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창세기입니다. 창세기 50장의 내용 중에 창조로부터 아브라함까지는 12장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세 사람과 요셉의 이야기가 나머지 전부입니다. 이렇게 자기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잊어버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절대로 파기되지 않는데 지금 언약이 파기된 것처럼 보이기에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이 자기의 잘못이며 자기의 연약함이라고 합니다.

 

자기 잘못, 자기 연약함을 깨달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심을 의심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제 다시 기억하는 것은 지존 자의 오른손의 해를 기억합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은 적을 물리치는 손이기도 하지만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입으로 소리를 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다고 합니다. 주의 도, 주의 길은 너무나 거룩하기에 하나님과 같이 위대한 신은 누구겠느냐고 합니다.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여러 민족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고 주의 팔로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다고 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입니다. 그 조상은 이삭과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 전 언약이며 역사 속에서는 아담과 족장들에게 하신 언약입니다. (셀라)

 

본문 16~18절을 봅니다. 봉독어떤 환난인지 모르지만, 그 환난이 계속됩니다.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잊으셨는가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잘못임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기억함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하나님의 도는 극히 거룩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생각으로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길과 너희의 길이 다르다고 합니다. 얼마나 다른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합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지만 온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비와 눈이 그냥 되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셔 열매를 맺음과 같다고 하십니다(55:9~13).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기억하였는데 그 기억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16~17절을 보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들이 주님을 보고 두려워하며 물러갔다고 합니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며 물러갔다고 합니다. 물을 인격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홍해 바다는 단지 바다의 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말합니다. 바로 왕이나 홍해 바다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력을 하나님께서 치십니다.

 

이사야 27:1절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바다에 산다는 리워야단, , , 악어로 묘사되는 이 대적을 여호와께서 죽이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왕의 장자를 치고,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 만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을 치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경험하도록 하시는 일은 세상의 길이 다 막히는 일입니다. 그렇게 길이 다 막혔을 때 하나님의 길은 바다에 있었습니다.

 

본문 19~20절입니다. “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20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오늘 설교 제목이 길은 어디에?’입니다. 사람들은 다 길을 찾습니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돈을 버는 길을 찾습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권력의 길을, 건강을 추구하는 사람은 건강의 길을 찾습니다. 지금 자신이 무슨 길을 추구하는지 알려면 자신이 제일 많이 관심을 가지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이 무언지 보면 어떤 길을 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제목을 처음에 주의 길이 바다에라고 하였는데 그러니 벌써 답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길은 어디에?’라고 하고 보니 청년 때 읽은 미우라 아야꼬의 책 제목이 생각나서 검색해보니 그 제목은 길은 여기에였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야기라서 많은 사람이 감동을 한 책입니다. 학교 교사인 저자가 폐결핵에 걸리고 주변 사람의 돌봄을 받는 이야기인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길은 여기에 있다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는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과 방향이라는 것이 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라면 그것은 피조물의 자세가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기에 주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이라서 끊임없이 자기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본능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교회당에 나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신에게 기도하면 나무나 돌에 기도하는 것보다 더 잘 들어 준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도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포기하든지 아니면 그래도 끝까지 인디언의 기우제처럼 응답 될 때까지 오기를 부립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뜻이 이루어지면 기도 응답이라고 간증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그런 응답이 없습니다.

 

다시 본문 1~18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밤새 손을 들고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자 불안하고 근심이 되고 심령이 상합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버리신 것인가? 인자함이 영원히 끝이 났는가? 약속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은혜와 인자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베푸실 긍휼을 그쳤는가? 이런 생각까지 하였지만 이런 생각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의 구원을 기억하였습니다. 그 구원이 출애굽 사건인데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홍해 바다 앞에서 길이 없습니다.

 

출애굽기 14:1~3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출애굽 한 후에 홍해 바다 앞에 진을 치게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자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갇혔다고 합니다. 앞에는 바다요 뒤는 광야입니다. 그 뒤로 애굽 군대가 추격하여 옵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그 능력으로 얼마든지 다른 길로 인도하시든지 아니면 평안하게 가게 하실 일이지 왜 길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잘 나오지만,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모세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가만히 서서 주의 일하심을 보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길이 없다고 아우성치면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끌어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고 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김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길이 없는 곳에서 모세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는 것도 곧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런 때 하나님은 바다에 길을 여십니다.

 

오늘 본문 19~20절입니다. “봉독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물에 있었지만, 주의 발자취를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주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양 떼 같이 인도하셨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서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모두가 자기 길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그 길이 막힙니다.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사방팔방 다 막혔다는 표현을 합니다. 이제는 죽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때 바닷속에 주의 길이 있었듯이 십자가가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고전10:1~2). 홍해 앞에서 길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소리친 그들이 바다에 길이 열려 마른 땅으로 걸어서 나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과 연합됨으로 그의 부활에도 연합됩니다(6:5).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길이라는 길이 다 끊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 같은 현실에서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의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19:30). 그 다 이루심의 순간에 성전에 가려져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27:51). 이것은 바닷속에 감추어졌던 길처럼 율법 선생들에게도 감추어졌던 길입니다. 이 길이 보이려면 자신의 율법적인 의들이 다 날아가야 합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성공이라는 길의 개념도 무너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곳에 갇혔다가 나오게 되었는지는 그 길이 닥쳐온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깊은 길입니다.

 

로마서 11:33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3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바울의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그가 간 그 길은 죄 아래 갇힌 길이었습니다(8:32). 그래서 주의 긍휼함이 나타난 십자가는 사람이 찾지 못할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래하여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만물이 주의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9~2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 십자가의 죽음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새로운 살길입니다. 이 길로 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에게 덮쳐져 온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덮쳐오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나의 길을 다 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길이 없다고 여겨질 때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길과 진리와 생명인 그 십자가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