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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2:1~20   평화의 왕   2021. 10. 13

 

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2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1)하리니 3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4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5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6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내리리니 7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8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다스리리니 9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10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11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12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13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14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15 2)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16 산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17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8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20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

 

표제어는 솔로몬의 시입니다. 솔로몬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왕상4:32)이라고 하는데 솔로몬의 시가 성경에 기록된 것은 여기뿐입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났다고 합니다. 다윗의 시는 다음에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시편을 히브리어는 다섯 권으로 구별하는데 두 번째 권이 끝났다는 표라고 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이라고 하였는가 하면 다윗 시편이 첫째 권(1~41)과 둘째 권(42~72)에 압도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편도 다윗 언약 안에서 봐야 하기에 왕의 아들도 솔로몬만이 아니라 다윗 언약 안의 왕들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시기를 구합니다. 여기서 왕과 왕의 아들을 다윗과 솔로몬으로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시기를 그 왕위를 영원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삼하7: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왕에게 바른 판단력을 주셔서 공의와 정의로 재판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화를 준다고 합니다. 산이 어떻게 백성들에게 평화를 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땅은 언약의 땅이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면 때를 따라 비를 주십니다. 그러면 그 산물이 산에서도 나옵니다. 그래서 산의 짐승들도 먹을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먹을거리를 줍니다. 또 다르게 보면 악인이 많으면 가난하고 억울한 자들이 살길이 없어서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핍박할 때 다윗이 피난 다녔습니다. 우리나라도 탐관오리가 많아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하는 수 없이 산으로 들어가 도적 떼가 됩니다. 그러므로 왕이 공의로운 재판을 하여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면 산과 들에도 성읍에도 참된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 참된 평화의 왕이 다스려 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5~11절입니다. “봉독 의로운 왕의 통치가 시간과 공간을 다 채우도록 간구합니다. 시간은 낮과 밤을 다 말합니다. 공간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를 말합니다. 공의로운 왕의 통치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내린다고 합니다. 목축하는 자들을 풀을 베고 났을 때 비가 오면 새로운 풀이 자라기에 참으로 복된 비가 됩니다. 땅을 적시는 소낙비도 농부들에게는 복된 비가 됩니다. 이것이 의로운 왕이 통치하는 날의 평화의 풍성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로운 왕의 통치로 인한 평화가 널리 전하여지면 광야와 다시스 섬의 왕들과 스바와 시바 왕들과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그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솔로몬 왕 때에 남방의 여왕이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도 나중에 타락함으로 그 영광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이런 내용은 다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기록되었기에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나 솔로몬은 참된 평화의 왕이 아닙니다.

 

물론 다윗이나 솔로몬이 부분적으로 참된 왕의 모습을 잠시 잠깐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솔로몬의 재판은 솔로몬의 지혜가 아니라 그 지혜를 주신 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깐 참된 왕의 맛을 보여준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의 연애는 무려 천명에 이르고 온갖 우상을 숭배합니다. 솔로몬이 우상 숭배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과중하게 매김으로 솔로몬 사후에 나라가 나누어집니다. 그러면 참된 평화의 왕은 어떤 모습입니까?

 

본문 12~14절입니다. “봉독 평화의 왕은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 건져줍니다.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집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합니다.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한 포학에서 구원합니다.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 궁핍, 압박, 포학으로 인하여 피 흘린 자들을 평화의 왕이 신원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도 평화의 왕이 오셔서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신약까지 봐야 합니다.

 

본문 15~17절입니다. “봉독 참된 평화의 왕에 의하여 구원받은 자들은 주께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게 됩니다. 공의로 통치함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때를 따라 비가 내리니 산꼭대기에도 땅에도 곡식이 풍성합니다.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오래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여기서 보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참된 왕이 다스리는 그 나라를 모든 민족이 복 되다고 합니다.

 

본문 18~20절입니다. “봉독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다고 합니다. 왜 홀로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이한 일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들은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합니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아멘을 두 번이나 합니다. 20절은 앞에서 봤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72편은 이스라엘의 왕이 어떤 왕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백성들을 그런 왕이 되도록 간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구약에서 아는 대로 그런 온전하고 참된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오시는데 먼저 구약에서 평화의 왕이 어떻게 오실지를 말씀하시고 신약에 그 평화의 왕이 오십니다.

 

이사야 9:1~7절입니다.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1)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평강의 왕이 어디에 누구에게 오십니까? 고통받던 자들, 멸시당하는 자들,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에게 옵니다. 장소는 여호와께서 멸시를 받게 하신 흑암의 땅으로 여김을 받는 스블론, 납달릴, 이방의 갈릴리에 오십니다. 그가 오셔서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그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하셨다고 합니다. 미디안의 날은 사사기 7장에서 기드온이 블레셋을 이긴 내용을 말합니다. 이런 왕을 보내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열심히 일하심으로 보내신다고 합니다. 몇 곳 더 보겠습니다.

 

이사야 53:1~6절입니다. “1 우리가 1)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2)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스가랴 9:9~10절입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이사야서 두 곳과 스가랴서의 말씀만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을 다 찾아보고 신약에서 성취된 본문을 다 찾아보려면 몇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몇 곳의 말씀을 통하여 구약에서 예언된 평화의 왕이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다 예언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적들을 물리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이 이 땅에서 말하는 전쟁 무기로 이기는 싸움이 아닙니다. 평화의 왕이 백마를 타고 오지 않으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셔서 오히려 전쟁 무기를 없애 버리는 왕이 참된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자기 욕망을 따라 메시아를 기다린 자들은 평화의 왕을 맞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2:11~14절입니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별을 보고 메시아를 찾아왔다가 왜 예루살렘의 헤롯 왕궁으로 들어갔습니까? 왕은 왕궁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소식은 가난한 목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는데 구유의 뉘어 있는 아기가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천자가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구유에 오시고 고난을 겪고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왕을 기대합니까?

 

누가복음 19:38~44절입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2)보살핌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평화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말하는 평화는 이 세상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종교적인 평화의 왕을 원합니다. 나귀 새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구약의 스가랴서를 아는 자들은 드디어 우리의 왕이 왔다고 여기며 환호합니다. 또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본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십니다. 평화를 모른다는 겁니다. ‘보살핌받는 날심판으로 번역합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참된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는데 아무도 그 평화를 모르기에 우십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성이라고 이름하지만, 그 평화를 모르기에 멸망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어떤 평화입니까?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UN 평화 유지군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우리나라도 군사력이 세계 6위의 군사 강국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평화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평화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거짓된 평화에 속고 있는 겁니다. 영원하고 참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만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며 비발디의 세상에는 참 평화 없으라는 곡을 다시 들어보았습니다. 노래를 라틴어로 부르는데 번역을 보고 의역(意譯)합니다. 세상에는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참된 평화는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질병과 고통 속에서도 순결한 사랑을 소망합니다. 이 세상에 참된 평화가 없는 이유는 세상은 겉모습만 화려함으로 기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춰진 상처로 썩어갑니다. 웃으면서 우리를 따라오는 그들로부터 도망치게 하소서! 그들은 교묘한 즐거움을 보여줌으로 거짓으로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악마의 침묵은 미녀와 꽃 사이에서 그 치명적인 독을 감춘 채 똬리를 풀지만, 그 은밀한 입맞춤으로 인하여 사랑에 빠져버린 남자는 꿀을 핥듯이 그것에 탐닉하나이다.

 

이런 노래를 한글로 부르거나 자막으로 넣으면 많은 사람이 듣지 않을 가사입니다. 세상에 참된 평화가 없다는 곡조가 아름다운 곡조로 되어 있기에 많이 연주되지만, 그 가사를 번역하여 자막으로 넣지 않는 이유가 그냥 그 달콤한 클래식의 음률에 맡기게 하여 내 마음의 평안만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듣고 누리고 전할 참된 평화의 왕, 평화의 소식은 십자가로 참된 평화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골로새서 3:11절입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평화의 왕이 자기 죽음으로 만드신 그 나라만이 참 평화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공로로 이 나라에 들어왔다면 그 평화를 누리며 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