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 1:1~3 말씀이 임하고 2013. 3. 20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3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에스겔서를 마치고 다니엘서를 보려고 하다가 예레미야서를 먼저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에스겔서와 다니엘서는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상황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내용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레미야서는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 유다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멸망을 먼저 보고나서 다니엘서를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구약의 이사야서와 소선지서라는 12선지는 다 보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 예레미야와 예레미야 애가와 다니엘서입니다.

 

예레미야서와 다른 예언서를 좀 더 유심히 보게 된 것은 청년 때에 유대인의 랍비이며, 마르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인권운동도 하고, 유니온 대학에서 철학과 랍비문학을 가르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예언자들 이라는 책을 보면서 선지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여호와의 말씀을 어떻게 수용하며 반응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상(像)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상상이든지, 이야기를 들었든지, 책을 보았든지, 성경을 보았든지, 설교를 들었든지 간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각자의 이미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미지를 붙들고 있으면 그것이 고정화된 우상입니다. 이런 우상을 부수는 것이 선지자의 일입니다.

 

예레미야서를 제가 처음 설교한 것은 강도사 인허를 받고 부목사로 가면서 처음 설교한 내용입니다. 겁도 없이 예레미야서를 설교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7장에 보시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예배하러 오는 자들을 향하여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건물을 성전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런 설교는 담임목사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내용입니다. 부임한 해의 연말에 담임목사의 호출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만두어야 하는가 보다는 생각을 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설교를 잘 하고 있다고 그대로 계속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예레미야서를 끝까지 설교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때 참고하지 못하였던 몇 권의 주석을 더 참고하였습니다. 그 중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이야기를 한 사람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백석대 류호준 교수입니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예레미야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글을 임의대로 편집하여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예레미야 서론이라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본론에서는 이런 이야기들 보다는 성경 자체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예레미야서를 이해하기 위한 서론이라고 생각하시고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유다의 민족사 중 가장 극심했던 격랑의 시대를 산 예언자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삶과 메시지가 그 어떠한 선지자보다 더욱 생생한 ‘살’과 ‘피’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메시지 안에는 ‘상처 입은 정념’(情念, pathos)과 ‘거절된 애절함’이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인간적이었다. 무감각해진 동포를 향해 분노하고, 회복될 수 없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남방 유다를 바라보며 절망했으며, 다가오는 민족적 불행을 돌이킬 수 없다는 자괴감과 무력함으로 비탄에 빠지기도 했다. 무너져 내리는 조국을 보며 그는 주야로 눈물로 음식을 삼았으며, 미친 사람처럼 거리에서, 장터에서, 성문에서 목 놓아 호소하기도 했다. 그의 눈은 한없이 흐르는 눈물로 시력을 상실해 갔고, 그의 육체는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고통으로 쇠하여만 갔다. 더욱이 신에 의해서 자기 어깨에 지워진 운명적 사역이 너무나도 혹독하고 중하여 견딜 수 없었던 그는 하늘을 향해 탄식했고 하나님을 향하여 절규했다. 한마디로 그의 일생은 ‘슬픔과 외로움’으로 이어졌고, 그의 삶은 ‘비탄과 고독’으로 점철 되었다. 그가 그러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은 그에게 주어진 신의 운명이었고, 그가 짊어져야만 했던 신의 소명(召命)이기도 했다. 그는 ‘진정으로 고통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던’ 예언자였다. 그러기에 이제 ‘상처 입은 치료자’로 병든 그의 백성들과 상처 입은 우리들 앞에 서 있는지 모른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세계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영적 불감증과 무감각, 잘못된 안전감과 왜곡된 구원관, 신학적 무지와 종교지자들의 독선, 불의와 비정(非情)으로 점철된 백성들의 삶, 구심점을 잃어버린 사회와 미쳐버린 문화들이었다. 그가 살고 있었던 시대는 최소한의 진솔한 신학적 성찰이나 신앙적 번민을 포기한 채, 종교적 아집과 전통주의적 오만, 신앙적 독선과 신학적 자기 합리화로 최소한의 ‘수치심’을 상실한 세대였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수치를 상실한 세대를 창녀의 뻔뻔스러움에 비교한 일이 있다(렘3:1~3).

 

길게 인용하였습니다만 이런 내용들은 예레미야 본문에서 아주 상세하게 나옵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의 상태가 이런 모양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이 다 이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만 달콤하여 들렸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자기들의 이익을 생각하며 백성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데도 백성들이 이를 좋아하였습니다.

 

예레미야 5:20~21절입니다. “20 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21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선포하라고 합니다.

 

5:30~31절을 봅니다. "30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이러한 말씀들은 예레미야 시대의 말씀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시대에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오늘본문 예레미야 1:1절입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예레미야 선지자의 출신배경이 나옵니다.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레위지파는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땅 아나돗은 제사장 아비아달이 추방당한 장소입니다. 다윗 왕의 말년에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장관 요압과 공모하여 왕으로 추대 받습니다. 이때 밧세바와 나단 선지자가 늙은 다윗에게 말하여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지명하자 대세는 솔로몬으로 기울어지고 아도니야와 그를 따른 자들은 반역자가 되어 처형당합니다. 이때 아비아달은 다윗 왕과 함께한 제사장이었기에 겨우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아나돗으로 추방당한 곳이 예레미야의 출생지입니다.

 

이런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였으니 더욱 무시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의 위선과 죄악을 폭로시키기에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속에서 불이 나서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 그 말씀이 그를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예언한 기간은 2~3절에 나옵니다.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어 다스린 지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요시야는 유다의 멸망 직전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일으킨 왕입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하기 전에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개혁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이집트의 바로 왕 느고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 이후로도 예레미야의 사역은 계속되는데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과 시드기야의 11년 말기까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하기 까지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요시야가 아무리 개혁을 하여도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죄악은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앗수르의 쇠퇴와 바벨론의 일어남을 보았으며 유다의 멸망을 다 목격한 선지자입니다. 이런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들을 예레미야가 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말이라고 하는 1절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전한 것이기에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헤셀은 선지자란 그 귀를 여호와의 가슴에 대고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마음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마음을 읽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슬퍼하고 통곡하고 분노하는 일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헤셀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파토스’(pathos, 정념情念, 정서情緖, 격정激情)를 가리키는 성경의 언급들은 하나님에 관한 영상(image)을 세우기 위하여 사용되는 여러 가지 이론적 개념들(예를 들어, 선하신, 정의, 지혜, 단일성)을 압도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파토스는 성서신학의 역사 가운데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인정을 결코 받지 못했다. 하나님의 파토스는 그분의 모든 속성들의 기저음(基底音, ground-tone)이다. 하나님에 대한 예언자들의 이해에 중심적 범주로서, 하나님의 파토스는 거의 모든 예언자들의 메시지 안에 반향(反響)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추상적인 절대성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한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그는 단순히 명령하시거나 순종을 기대하는 분이 아니다. 그분 역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의해 움직여지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신다. 그리고 그에 따라 반응하시고 하신다. 사건들이나 인간의 행동들은 그분 안에 기쁨이나 슬픔, 즐거움이나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분을 멀리 떨어져서 세상을 심판하는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는 친밀하고도 주관적인 방식으로 반응하시고 발생한 사건들의 가치를 결정하신다. 그는 친밀하고도 주관적인 방식으로 반응하시고 발생한 사건들의 가치를 결정하신다. 성경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행위들은 그분을 움직이기도 하고, 그분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그분을 비통하게도 하고, 아니면 그분을 기쁘게도 하고 즐겁게도 한다. 이것은 자명한 성경의 입장이다. 하나님은 긴밀하게 영향을 받으실 수 있다는 사상, 그리고 그분은 단지 지성이나 의지뿐만이 아니라 ‘파토스’를 소요하고 있다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예언자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헤셀이 이렇게 예언자들을 연구 하였지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교과 기독교의 대화를 주장한 에큐메니칼 운동가였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었다면 더 풍성한 그리스도의 비밀을 예언자들의 심성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한 자들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10절입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시는데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온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도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상들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모든 참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임한 그 말씀이 누구로 인하여 주어진 것인지 베드로전서 1:8~11절을 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이며 복음을 전한 사도들입니다. 이들이 증거 한 말씀을 성령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함 말씀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임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탄식과 고난과 핍박과 죽음은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잘 표현한 류호준 교수의 글은 길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예레미야의 고통과 고뇌, 회유와 협박, 눈물과 좌절 등은 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파토스’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파토스는 신구약 성경 가운데, 특별히 예언서에서 큰 강을 이루며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하나님의 파토스 중 가장 강렬한 것이 있다면 고통하며 비통해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하시는 하나님을 감동적 묘사를 통하여 전해주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하나는 신약 성경의 ‘고통하며 기다리시는 아버지’에 관한 예수의 비유일 것이다(눅15:11~32).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며 유산 상속을 요구하고 집을 떠나버렸던 못된 자식과 그를 위해 비통해 하며 기다리시는 아버지, 그리고 동생의 돌아옴에 대해 노를 발하면서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독선적인 큰아들과 어두워진 황혼녘에 그 아들을 설득하면서 집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결국 읽어버린 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끓는 비통함과 연민의 애정, 기다림의 초조와 고통스런 희망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비유일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심경이 바로 하나님의 파토스다.

 

고통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또 다른 구약 성경의 비유는 한 선지자의 삶 그 자체 속에 반영되어 있다. 부정하고 음탕한 기질을 지닌 한 여인, 한 사람에게 자신을 종속시킬 수 없다는 자존심과 인생의 지상적 향락을 탐닉하여 가정을 버린 여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상실한 여인, 그녀는 아내이기를, 어머니이기를 포기한 병든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기존의 관행들과 풍습, 그리고 토라의 규례들을 파괴해가면서 상당한 값을 지불하고 그녀를 다시 돌아오게 했다. 예언자 호세의 이러한 자전적 이야기를 그 사람의 행동 자체가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 땅에 도래하는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이면서도 가장 충격적인 복음이다.

 

이 두 가지 이야기들은 결국 자신의 ‘잃어버린 아들들’ 혹은 ‘집을 떠나버린 아내’를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고통하시는 하나님’{suffering God)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통하실 뿐만 D니라 적극적으로 고통하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이처럼 그의 지상적 사역자들이었던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중심부에 우뚝 서 계신다. 물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고통하시는 하나님의 절정일 것이다. 그렇다! 성육신(출생, 생애, 수난, 죽으심을 포함)의 근본적인 의미가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파토스’-고통의 ‘파토스’일 것이다. 그분의 자발적인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이 신뢰될 수 있는 분임을 ‘알게’되는 것이다.

 

결국 예레미야의 삶과 메시지는 자신의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하려는 우리들은 단순히 인간 저자의 삶과 생애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예언자의 삶과 메시지를 통행 드러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성경 주석과 성경 해석이란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읽은’ 작업 활동이 아닌가 생각한다.“

 

설교를 거의 인용문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주석과 해석만이 아니라 설교도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것이 설교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 과정을 기계적이고 이론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파토스의 하나님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고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하여 더 깊이 알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