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 4:5~22 슬프고 아프다 2013. 6. 12

 

5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6 시온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 7 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왔으며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나아 왔으되 네 땅을 황폐하게 하려고 이미 그의 처소를 떠났은즉 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되리니 8 이로 말미암아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왕과 지도자들은 낙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 10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이르렀나이다....................... 19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20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21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전달만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심판의 말씀을 전하지만 선지자 자신이 심판을 받는 자와 동일한 자로 여깁니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기도 하며, 때론 항의를 하기도 합니다. 심판받는 자기 백성과 함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탄식하며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고통인지 선지자의 고통인지 모를 정도로 함께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예레미야 시작할 때에 파토스의 하나님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탄식하며 고통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 단락 중에 마지막 단락의 내용인 슬프고 아프다는 말씀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은 묵은 밭을 기경하고 마음의 가죽을 베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옛 언약 하에서는 겉옷을 찢고 몸의 할례는 행할 수 있었지만 마음을 찢고 마음의 가죽을 베는 일은 새 언약으로만 가능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구약에 나타난 회개들을 보아야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마음의 생각과 계획들이 어떠한지가 이런 말씀으로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구약의 모든 성경이 우리를 위한 거울이 되고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경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10:11).

 

예레미야 4:5~9절입니다. 먼저 예레미야 4:4절에서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너희의 마음의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고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의 가죽을 벨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이 심판의 소식을 전하면서 먼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나팔을 불라고 합니다. 나팔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과 전쟁의 소집과 경계와 절기를 선포하면서 붑니다. 지금 나팔소리는 전쟁의 소식을 전하는 나팔소리입니다.

 

그 내용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이 다가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공격을 알려줍니다. 바벨론이 수풀에서 올라오는 사자와 같이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벌써 그 처소를 떠나서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오면 네 땅을 황폐하게 할 것이며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전쟁의 소식을 전하면서도 회개하라고 합니다. 8절에서 이로 말미암아 굵을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고 합니다.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우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에게서 돌이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자신도 심판 받는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돌이키지 않습니다. 굵을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고 하였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거짓된 평안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짓 평안을 주도하는 자들이 왕과 지도자와 제사장과 선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임하게 되는 그 날에 왕과 지도자들은 낙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랄 것이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먼저 아는 자며 먼저 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자기들의 마음에 나오는 대로 거짓된 평안을 전하였기에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선지자가 슬프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였다고 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고 하시고서는 칼이 생명에 이르렀기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속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평강을 약속하신 것은 여호와를 신뢰하여야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우상을 의뢰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평강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속인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이 속인 것입니다. 물론 자기도 속은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평강을 어떻게 전하였는지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6:13~14절입니다. “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모든 백성들이 총체적으로 탐욕을 부리며 거짓을 행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평강을 전하지만 평강이 없습니다. 상처를 가볍게 여긴다는 말은 긴급하게 수술하여야 하는 것을 알약 하나 주고 다 나았다고 하는 식입니다. 오늘날도 재앙을 선포해야 당연한 설교자들이 거짓된 축복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내면에는 서로의 탐욕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4:13~14절입니다. “13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이 말씀이 구약의 예레미야 시대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땅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기 마음의 거짓된 것으로 축복이나 빌어주는데 그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슬프고 아픈 것입니다.

 

예레미야 23:16~17절입니다.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거짓 선지자들이 많은 이유는 이런 거짓 선지자를 좋아하는 백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5:30~31절입니다. “30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고 김성수목사 입관 예배 때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합니다. 거짓을 예언하는 내용이 위에서 찾아본 세 곳의 말씀들입니다. 여호와께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나오는 대로 거짓 평안을 빌어주고 복채나 받는 무당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 4:11~1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뜨겁고 강한 바람이 몰려옵니다. 곡식을 키질 하거나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구름같이 몰려오며 회오리바람 같고 그들의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기에 우리가 멸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임박한 심판 앞에서도 선지자는 회개하라고 합니다. 14절에 네 마음의 악을 씻으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면서 언제까지 네 속에 악이 머물겠느냐고 합니다.

 

적의 공격이 코앞에 다가 왔지만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런데 그 회개의 촉구는 마음의 악을 씻으라고 합니다. 악이 마음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는 것은 이미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심판을 자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18절에서 네 길과 네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19절입니다. 슬프고 아프다고 합니다. 애통(哀痛)입니다. 마음의 슬픔이 격하면 몸의 고통도 따라옵니다. 단지 마음의 아픔만이 아니라 실제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수반이 됩니다. 정말로 큰 슬픔을 겪어본 사람은 몸이 함께 아프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프고 아프다는 이 표현의 히브리어는 “내 창자여 내 창자여” 하는 말입니다. 내장이 끊어지는 고통, 임산부의 해산의 고통과 같이 아프고 답답하여 잠잠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의 심령에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듣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나와 우리 교회와 이 세상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이 들리지 않습니까?

 

20~21절입니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며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저 깃발과 나팔 소리가 계속하여 들리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지 탄식합니다. 그런데 유다의 예루살렘 백성들은 어떠합니까?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고 합니다. 악을 행하기는 지각이 있지만 선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여도 거짓된 회개나 할 뿐이기에 결국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셔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알려주신 70년의 때가 차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성전도 재건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 재건된 성전을 향하여 예수님은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애통해 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레미야의 심정이 아니라 예레미야가 예수님의 심정으로 슬퍼하고 아파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들에게 임하여 이런 예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벧전1:11).

 

예레미야 15:5절입니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누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불쌍히 여기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며 네 평안을 물을 자가 누구냐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울고 있지만 아무도 예루살렘을 위하여 우는 자가 없습니다. 참 평안에 대하여 묻는 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서 거짓 평안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8절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것이 왜 복이 있는 사람인지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모두가 거짓 평강과 거짓된 축복을 말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는 자들은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애통하는 자가 과연 누구입니까? 거대한 예루살렘의 성전과 그 위용을 자랑하는 자들은 다른 것이 애통이 아닙니다. 제사가 잘 드려지지 않는 것이 애통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을 보시며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시면서 애통합니다(막11:17).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의 위하여 울며 평안을 물을 자가 누구냐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그 말씀의 성취를 지금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의 성전은 예레미야 시대 때 바벨론에 의하여 파괴된 것처럼 로마에 의하여 파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일 만에 성전을 일으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성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전입니다. 이제 다른 성전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뿐입니다. 그러함에도 가짜 성전을 오늘날도 세우는 이 땅의 현실을 보고 누가 울겠습니까?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예수님의 그 마음이 우리에게 부어져서 애통하는 자의 복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