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 2:31~37 심판 받는 이유   2013. 5. 15

 

31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 32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33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34 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35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36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 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 37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하여 분노하고 계십니다. 시편 7:11~14절입니다. “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14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매일 분노하십니다. 왜 분노하십니까? 14절을 보시면 악인이 죄악을 낳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아이를 잉태하여 출산하는 것처럼 재앙을 잉태하여 거짓을 낳는다고 합니다. 사람 마음의 생각과 계획들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에(창세기 6:5, 8:2) 그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항상 죄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바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라고 합니다(마15:19). 시편7:14절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악한 생각 빚어서 몸속에 사악을 품었다가 속임수를 낳는 원수들아!” 우리가 이런 말씀들에 전적으로 아멘이 되십니까? 아니면 죄도 있지만 선한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난주일 오후 예배 후에 처음 오신 몇 분과 교제를 하였습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도 몇 분 함께 하였는데 구체적인 교회의 이름들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세분이 오셨는데 두 분은 은퇴하신 장로님과 권사님이시고 한 분은 그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미국에서 교수로 계시는데 서머나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저의 설교도 보고서 장유에 계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오셨답니다. 아들은 부모님이 복음을 듣기를 원하는데 부모님을 자기 의로 가득한 것입니다. 자신은 교회에서 하라는 것 다 하고 그보다 더 열심히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권사님의 기도생활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이 서울대 가는 것도 힘 드는데 서울대 교수도 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으니 자기의 기도에 대한 자부심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질문하였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자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분에게 무엇이 제일 문제입니까? 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이런 내용조차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한다고 회도 거저 윤리 도덕적인 차원이거나 교회의 일에 조금 소홀히 한 것들이 죄로 여기기에 그런 것들을 얼마든지 본인의 행위로 상쇄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이런 믿음은 신앙이 아니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므로 아들과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나마 이제 복음적인 설교를 들으면 그런가 보다 하다가 다른 설교를 들으면 또다시 그것도 옳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심판의 받는 이유’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 남 유다도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죄를 책망하자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합니다(35). 그러면서 선지자를 죽였습니다(30).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너희가 나에게 대항하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너희가 다 잘못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 자녀를 매를 들고 때린 것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이들은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여기기에 선지자의 책망도 소용이 없습니다. 책망 하는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31절입니다.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고 하느냐고 합니다. 말을 듣지 않는 자녀에게 부모가 내가 너에게 무엇을 안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광야와 캄캄한 땅이란 아무른 도움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이고 반석에서 생수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도 들여놓았습니다. 그런데 왜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으면서(20)우리가 놓였으니 이제는 주께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느냐고 합니다.

 

32절입니다. 처녀가 신랑에게 받은 패물을 잊을 수가 있겠느냐고 합니다.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고 합니다. 이것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신부가 신랑이 준 선물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단지 패물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신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말씀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 백성은 나를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 백성이라는 말씀은 여성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약혼자와 나의 신부로 부르고 계시지만 신부로 부름 받은 자는 남편을 잊어버린 그 날 수를 셀 수가 없다고 합니다.

 

33절입니다. 참된 신랑의 사랑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얻기 위하여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민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로 다른 여자들까지 그 행위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들의 남편이신데 다른 신들을 섬기며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을 여인이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편을 구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야 할 나라인데 이들이 이렇게 우상숭배로 가는 모습으로 인하여 주변의 다른 나라들까지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다시 오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종말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힘과 영광을 얻는다고 전하고 있다면 전도가 아니라 오히려 천국 문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13~15절입니다.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들의 전도는 무엇을 위한 전도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성전보다 성전의 금으로 맹세한 것과 제단보다 제단의 예물로 맹세한 것은 지키라고 합니다. 결국 돈으로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 이라고 하면서 전도를 강조하지만 그 안에는 자기 교회 키우기에 대한 욕망이 과연 없을까요? 그러므로 전도란 전하는 자와 전함을 받는 자가 함께 십자가에서 죽자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런 전도는 효과가 없으니 온갖 전도전략을 개발하여 인기 있는 상품으로 개발해 놓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천국 문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전도하여 배나 지옥자식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들의 피가 묻었다고 합니다. 이 피는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들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 신랑 되신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사랑을 구하는 자들의 옷에 피가 묻은 것이 도둑질하는 자들이 밤에 도둑질할 때에 그를 물리치기 위하여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흘린 피라면 정당방위가 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2:2~3절입니다. “2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3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도둑이 밤중에 담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지만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그들의 옷단에 묻은 피가 밤에 도둑을 물리치기 위하여 흘린 피가 아니라 죄 없는 가난한 자들을 죽인 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의 가난한 자들이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들도 포함합니다.

 

출애굽기 23:6~7절입니다. “6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7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여 놓고도 이들은 무죄하다고 합니다.

 

35절입니다. 오늘 본문 전부가 다 죄를 책망하고 고발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신들은 무죄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기에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러한 배경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 선지자의 거짓 평안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처럼 거짓 선지자들은 절기를 지키며 제물만 많이 가져오면 평안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평강하다고 하지만 평강이 없습니다(렘8:11). 또 하나는 국제정세로 인하여 잠시 안정이 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착각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떠났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렘37:5~10). 이런 거짓 평안을 남발하며 백성들을 속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가서 3:10~11절을 봅니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뇌물과 삯과 돈을 위하여 일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니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죄로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모습을 봅니다.

 

36~37절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쫓는 길에서 돌이켜 부지런히 돌아다닙니다.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에 수치를 당함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였습니다. 유다도 한때 앗수르를 의지하였지만 앗수르가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수치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애굽을 의지하기 위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애굽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간다는 것은 두 손이 묶여서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사30: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의지하려고 하는 애굽을 약하게 만들어버리심으로 다시는 애굽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애굽이 미약해 진 것은 이스라엘이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겔 29:12~16).

 

오늘 우리의 죄가 무엇입니까? 절대적으로 의지하여야 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도울 힘이 없는 인생과 세상을 의지한 것이 죄가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또는 세상을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도 부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죄라고 책망을 하는데 나는 죄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세상 사람보다 더 강하고 잘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 없다고 하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이들이 믿던 세상의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며 동시에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1:8~10절입니다. “봉독” 예레미야 시대나 오늘 이 시대나 범죄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셨는데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죄를 지적받을 때에 인정하는 것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