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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애가 1:1~22 슬픈 노래(1) 2015. 5. 20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선지자입니다. 지금까지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을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슬픈 노래가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위치가 천연적인 요새이기도 하였지만 이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무너진다는 것은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조차 의심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사건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두시겠다는 거룩한 성전마저 언약을 배반하면 던져 버리시겠다고 하신 그 말씀을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위협하기 위하여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언약을 배반하면 성전도 파괴하여 버리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지금 사실로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갔는지 이미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열왕기상 9:6~9절입니다. “6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금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조롱을 당하는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슬픈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와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전부 다섯 편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다섯 편의 노래가 다 히브리어의 알파벳 철자를 따라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시편을 볼 때에도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만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의 자음을 가지고 차례대로 그 자음에 맞춘 단어를 택하여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1~3절을 봅니다. 봉독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가 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그 슬픔의 탄식들이 구구절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그 영광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전에는 시녀를 거느리던 자가 시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서러워 목 놓아 우는데 흐르는 눈물이 끝이 없습니다. 사랑을 속삭이든 연인들과 벗들마저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등을 돌려 원수가 되었습니다. 한때 애굽을 의지하고 주변의 나라들과 연대도 하였지만 그러나 정작 나라가 망하니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나를 안다고 하는 자들도 등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이런 세상이 참으로 슬픈 세상입니다. 이런 슬픈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나 온 세상이나 간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서 서로 서로 자기의 웅덩이를 파기 위한 삶이기에 슬픈 일들이 일어납니다.

 

4~6절입니다. “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었으니 시온으로 향하는 도로들이 슬퍼합니다. 도로가 처량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문도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습니다.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에서 그의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죄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곤고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가서 그의 지도자들이 꼴을 찾지 못한 사슴과 같이 뒤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다고 합니다.

 

7~9절입니다. “7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 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할 때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옛날의 즐거움을 지금 누리지 못하고 대적의 손에 넘겨졌으며 돕는 자도 없고 대적들이 그의 멸망을 비웃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8절에서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슬픈 노래 속에 계속하여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9절을 보시면 그의 더러운 것이 옷깃에 묻었다는 것은 온갖 부정함이 있음에도 나중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낮아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낮아지니 원수들이 자기들의 잘 나서 큰 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워서 우리의 환난을 감찰하여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들이 큰 체 하면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한 사실보다 그들의 교만이 나타났기에 환난을 감찰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러한 심판들은 바벨론의 멸망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스라엘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여 달라는 간구가 되는 것입니다.

 

10~11절입니다. “10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방인들이 성전에 오려면 개종을 하고 올 수 있지만 성전 안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거룩한 성전에 이방인들이 지성소까지 들어와서 모든 성전의 기구들까지 다 빼앗아 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참담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되도록 성전을 버려두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우상의 전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성전 안까지 온갖 우상으로 가득 채워버렸습니다. 이러한 성전은 이방인의 손으로 파괴되는 것이 마땅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양식까지 떨어집니다. 적들이 포위하고 있으니 보물로 먹을 것을 바꾸려 하여도 먹을 것이 없는 지경입니다. 이렇게 비천하여 졌기에 여호와께 돌보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12~13절입니다. “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13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서 지나가는 자들에게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하면서 묻습니다. 너희에게는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지 보라고 합니다. 이러한 고통은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우리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네팔의 지진으로 한국에서 구호하려고 간 의사가 네팔에 지진이 온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였답니다. 우리가 재앙을 당하고 있지 않는 것은 그들보다 의로워서 재앙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앙을 내리지 않는 것이 버려둠의 심판입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재앙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그런 재앙이 없다고 나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이 어리석은 자의 모습입니다. 무릇 지나가는 자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하는 이 질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4~16절입니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4절에서도 내 죄악의 멍에라고 합니다. 내 죄악으로 인하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넘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영토 안의 용사들을 없는 것처럼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청년들을 부수시고 처녀 딸 유다를 술틀에 밝으셨다고 합니다. 포도를 따서 술틀에 넣고 밟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나를 위로하고 생명을 회복시켜 줄자가 멀리 떠났다고 합니다. 죄로 인한 결과가 이렇게 무섭고 외롭고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알게 되는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자기 힘과 세상의 힘을 믿고 사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가 죄의 개념은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고 사십니까?

 

17~19절입니다. “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

 

시온이 두 손을 폈다고 하는 것은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위로 할 자가 없는 것은 이미 시온의 백성들이 평소에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온갖 세상의 신들에게 도움을 구하였기에 이제 도움을 요청하여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도 이미 수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 사로잡혀가고 장로들은 목숨을 위하여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서 기절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18절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고 합니다. 선지자가 죄에 대하여 심판을 당하면서도 여호와께서 의로우시다고 고백하는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 주의 영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가는 단지 슬픈 노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한 계시의 말씀입니다.

 

20~22절입니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21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22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첫 번째 슬픈 노래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보아주시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죄임을 고백하면서 이렇게 심판하신 것이 주의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환난과 마음이 상하는 것도 나의 반역이 크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대신하여 선지자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반역으로 인하여 아들이 빼앗기고 집안에 죽음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재난을 원수들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에게도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여서 심판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들의 모든 죄악대로 주 앞에 가져오게 하셔서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의 모든 나라들보다 훨씬 환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약을 받지 않는 나라들이 이러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온갖 조롱을 다한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받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두려움을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마저 조롱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근거로 예루살렘 주변부터 바벨론까지 심판하시는 내용을 예레미야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하여 자신들의 회개하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슬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 영으로 인하여 예레미야 애가가 기록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1:9~11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한 은혜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슬픈 탄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봅니다.

 

이사야 53:1~4절입니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 1장을 통하여서 살펴본 대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자신들의 죄로 인한 것이며 이것이 여호와의 의로움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원수들이 조롱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여호와의 의로움으로 심판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자기들의 죄를 알고 회개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예루살렘이 자기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망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예루살렘 백성들을 조롱하고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도 조롱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죄가 없이 심판을 받으십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른 볼품이 없는 분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는 아는 분입니다.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는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이 볼 때에 결코 구원의 능력이 될 수가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바로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임을 아는 것을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모두가 그 십자가 앞에서 침을 뱉고 돌아서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보면서 자기 죄를 보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으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사야 53:5~8절입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자기들의 죄를 아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누가 자기 죄로 인한 것이라고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어내시고 그 은혜의 선물을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심으로만 십자가를 보고 애통하며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믿음으로 인하여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기뻐하는 것들로 나의 기쁨을 삼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능욕 받고 애통하는 길로 가는 자들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6:20~26절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예레미야의 슬픈 노래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