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다니엘 3:1~30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2015. 7. 22

 

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제목만 들어도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임을 알 정도로 유명한 내용입니다. 복음성가 중에도 이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불에서도 구원하여 내시고 세상에서 높임을 받는다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적용은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목숨 걸고 지키며 교회에 헌신과 충성봉사를 다하면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해도 우리는 무리 없이 받아왔습니다. 다만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함을 탓하면서 다시 결단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 과 적용을 하게 되면 신앙이라는 것이 내 하기 나름이라는 결론이 납니다.

 

인생은 자신과 주변에 일어나는 환경과 사건들을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단한 예를 들자면 요즈음과 같은 날씨입니다. 장마철이라 무덥고 습도가 높습니다. 불쾌지수가 올라갑니다. 이럴 때에 어떻게 해석을 하면서 살아갑니까? 도시 사람들은 짜증을 내다가 시원한 에어컨을 틀고 지낼 것입니다. 그런데 전기요금 걱정이 되니 또 짜증스럽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무더워야 곡식과 과일들이 잘 자라는 것을 알기에 무더위로 짜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워야할 때 너무 시원하게 되면 냉해를 염려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들은 각자의 삶의 정황에 맞게 해석하며 삽니다.

 

그러면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정황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살아가야 합니까?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대부분 말씀의 해석과 적용을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본받자는 식의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인물들의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구별하여 잘한 것은 본받고 잘못한 것은 본받지 말자는 식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이렇게 해석을 하고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을 성경을 이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각 나라의 지침이 되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내용들과 법들을 가지고 그렇게 해석을 하고 삽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선악체계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결과가 어떻게 나옵니까?

 

어떤 사람이 병이 들거나 사업이 실패를 하거나 사고가 일어나면 그 사람이 무언가 잘못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석을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기준으로 죄를 말하고 이방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근거를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도저히 이러한 환난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될 때에 이방인들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다고 이러는가 하는 말을 합니다.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고생을 할 만큼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항변이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은 어떻게 나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죄가 부모의 죄냐 본인의 죄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제 삼의 답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보는 것이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다니엘서의 배경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섬기는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앗수르에 의하여 이미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는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있었고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망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방 나라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마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의 기구들이 바벨론에 옮겨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다니엘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제사를 드리는데도 나라가 망했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온갖 우상숭배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엄청난 개혁을 합니다. 온갖 우상들을 부수어 버리는 일들도 합니다. 그런데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는 두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길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런 멸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더욱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율법에 언약배반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많을까요? 전자가 절대다수입니다. 적어도 유대인이라면 자신이 한 것이 있습니다. 십일조와 안식일정도는 기본으로 지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한 것은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서 본대로 나라가 망해야 한다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 선지자는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에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고 한 선지자들이 절대다수이며 왕과 백성들도 이들의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어떻게 이런 믿음이 나오게 됩니까?

 

로마서 9:27절입니다.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받는 자들을 남은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겨두시지 않았다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완전히 진멸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남은 자의 고백이 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행위대로 한다면 진멸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로마서 11: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남은 자란 오직 은혜로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기시듯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겨두셨기에 이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러한 해석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지난주에 어떤 분이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어떻게 목숨을 걸고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않을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은 사실 우리 모두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내가 목숨 걸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셨고 복을 주셨다는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1~7절을 봅니다. “1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2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3 이에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4 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5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6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7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은 아주 고대로부터 내려온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신의 대리자이기에 곧 신으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주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주님의 대접을 받고자 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확대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높이가 30미터 넓이가 3미터나 되는 금 신상을 두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어마 어마한 크기의 신상에 금을 입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상의 낙성식에 모든 관리들을 다 소집하였습니다. 그리고 악기를 연주할 때에 그 신상에 엎드려 절하게 하였습니다. 만약에 엎드려 절하지 않으면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음악소리와 함께 모든 자들이 그 신상에게 엎드려 절합니다.

 

8~12절입니다. “8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9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10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11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모든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데 유다사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만 절하지 않습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우뚝 서 있는 모습이 갈대아 사람들이 볼 때에 좋은 고소거리가 된 것입니다. 이방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온 주제에 자기들보다 높은 관직을 얻었다는 것이 기분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호시 탐탐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절호의 찬스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몇 유다 사람이 왕을 높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왕을 높이지 않는 것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않기에 왕을 높이지 않는다고 참소(讒訴)를 합니다.

 

13~15절입니다. “13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왕이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상당한 호의를 베풉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졌는데 엎드려 절하지 아니한 것으로 즉석에서 풀무 불에 던져 넣어도 아무른 할 말이 없습니다. 왕의 말이 곧 법이며 신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이 다시 기회를 줄 테니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맹렬히 파는 풀무 불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왕의 교만입니다. 자신을 막을 자가 천하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꿈 해석을 통하여 다니엘의 하나님을 인정하여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16~18절입니다.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왕의 말에 대답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왕이 격노할 만한 대답입니다. 누가 나의 손에서 건져내겠느냐고 하였는데 당신의 말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식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렇지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금 신상에서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알라고 합니다. 참으로 목숨을 건 대단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이 어떻게 나온 것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주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게 됩니다. 누가 나의 손에서 건져 낼 거냐고 하는 이런 왕들이 어떤 꼴이 났는지 두 곳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5:1~2절입니다.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가 절대적인 왕으로 신의 대리자로 통치하고 있는 나라가 애굽입니다. 그런데 노예들의 신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세와 아론이 내 백성을 내 보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여호와가 누구관대 하면서 거절하다가 열 가지 재앙으로 자기 아들까지 죽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들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죽음의 상황에서 절하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공이나 돈에 엎드려 절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하 18:32~35절입니다. “32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33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34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35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앗수르 왕이 히스기야 왕 때에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한 말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신이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하였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교만한 앗수르 왕이 어떻게 됩니까?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히스기야 왕도 산헤립 왕의 편지를 들고 성전에 가서 기도합니다.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의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칩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고 산헤랍은 혼자 돌아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 신하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듣고 믿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9~23절입니다. “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왕이 세 사람에게 굉장한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당장 풀무 불에 던져도 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왕을 완전히 모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여 집아 넣으니 세 사람은 결박하고 잡아넣는 사람이 그 불길에 타서 죽었습니다. 왕의 명령이 얼마나 급하였든지 왕의 신하는 관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한 관복을 입은 채로 결박하여 불어 던져버린 것입니다.

 

24~27절입니다.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세 사람을 불에 넣었는데 네 사람이 불속에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네 번째 모양이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낸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불러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들이 불에서 나오니 결박된 줄만 불에 타 없어지고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고 불에 탄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왕의 모든 신하들도 이 사실을 목격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주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방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나라가 망하여 포로로 잡혀와 있을 지라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28~30절입니다. “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우리는 이 결론을 알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이 결론을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겠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상에 엎드려 절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이들의 불굴의 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보았습니다. 이 은혜가 임하게 되면 죽음을 이기는 믿음이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실제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위협 앞에서도 두렵습니다. 어떤 단체에서 왕따 당하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리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타협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죽음 이후에 부활의 세계까지 믿기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1:33~37절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세상이 감당 못하는 이러한 믿음의 선물을 우리에게도 주옵소서! 오늘 기도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