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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7:1~21 침 삼킬 동안도    2016. 2. 10

 

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오늘이 무슨 날이죠? 대체 공휴일입니다. 대체(代替)라는 것은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국가지정 공휴일이 일요일에 중첩이 되면 다른 평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체 공휴일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대체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것입니까? 또는 절대로 대체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대체하고 싶은 것은 수치와 멸시와 실패와 고통과 같은 것들은 대체하고 싶을 것입니다. 반면에 기쁨과 즐거움과 성공과 영광은 절대로 대체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16년 전 요한복음을 설교하면서 대체용품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의약 분업으로 데모를 하였는데 의사들이 주장한 내용 중의 하나가 대체 조제 금지였습니다. 의사가 약을 처방하면 같은 효력을 내는 것이라도 자신이 지정한 제품 외에는 조제를 금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의사가 임상실험으로 통하든지 연구를 하든지 해서 그 회사 약품이 정말 좋아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말이야 환자를 위하여 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말 안 해도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도 대체하려고 합니다. 물론 대체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이지만 요한복음 13장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서로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입니까?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업적들을 대체용품으로 개발하여 놓은 것입니다. 그런 대체용품들 예를 들어봅니다. 명절에도 본 교회 출석하기,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기본이며 교회와 목사의 비전에 적극 협조하기 입니다. 이런 것만이 아니라 수많은 봉사와 선교의 동참들을 하는 것으로 사랑을 대체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욥기를 보면서도 욥이 재앙 당하기 전과 재앙 당하고 나서 배나 복을 받았다는 그런 내용은 절대로 대체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대체하고 싶은 내용은 욥이 재앙을 받는 부분만 대체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 전체가 욥의 고난과 그에 대한 해석과 반론들입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을 대체하여 버린다면 욥기서는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는 늘 고난이 두렵습니다. 욥과 같은 극한 고난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미리 선한 업적을 쌓으므로 고난을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성입니다.

 

욥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욥을 인정하셨지만 욥의 자녀들이 생일잔치를 하고 나면 혹시 범죄 하였을까 하여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모든 소유물과 자녀들조차 다 빼앗기고 죽어버리는 엄청난 재앙을 당합니다. 이렇게 되었어도 욥은 원망하지 않고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아내가 그런 하나님 욕하고 죽으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에 재앙도 주시지 않겠느냐며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왔을 때에 욥은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하여 첫 번째로 욥을 공격한 사람이 엘리바스였습니다. 엘리바스는 철저한 인과응보로 욥을 공격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욥이 반론하는 내용이 지난주에 본 6장과 오늘 보는 7장의 내용입니다. 욥을 공격하는 자들의 모습이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이 설교하는 내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특히 번영신학을 전하는 자들은 예수를 잘 못 믿어서 복을 받지 못하고 재앙을 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았기에 우리는 축복만 받아야 바른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지난해 금요일 성경공부하면서 기계적 대속 론이라는 말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을 받았기에 우리의 고난을 대신하였고 대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나 재앙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하게 반복하면 그렇게 세뇌가 됩니다. 믿음이란 들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인간들이 교묘하게 꾸며낸 말로 그리스도의 말을 대체하여 듣게 되면 그 말이 마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4~5절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질병이 와도 안 된다고 하는 설교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질고라는 것이 질병과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질고가 있다는 것은 믿음이 잘 못 되었으니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 회개라는 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대체용품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도 질병과 고통이 싫기에 그런 말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나에게 좋은 것만 취하여 낸다면 그것이 이단입니다. 이단이란 끝이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이단이란 끝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출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의 영광, 자기의 구원, 자기의 행복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에 처음부터 틀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아도 늘 자기 좋은 구절만 밑줄을 그은 것입니다. 앞뒤 다 잘라먹은 것입니다. 방금 찾아본 이사야서의 말씀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주어질 의의 선물이 무엇인지는 관심도 없고 그저 질병과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에 와 닿도록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나 그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말이 오늘날 이 시대의 대부분의 설교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현세에서도 복을 받고 내세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도 욥에게 하는 말이 나라면 빨리 회개하여 다시 복을 받겠다는 말을 욥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그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을 받는 복은 잘 알아듣지 못하기에 또 다시 성경의 복을 세상의 것으로 대체시킵니다. 그래서 나온 대체용품들을 사고파는 종교시장이 한국교회에 가득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반박할 말씀들이 너무 많지만 몇 곳만 찾아봅니다.

 

누가복음 9:22~24절입니다.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영광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죽음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너무나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동일하게 간 길입니다. 오늘날 성도도 반드시 이 길로 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9절입니다.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옥에 갇혀서 보낸 편지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받게 되면 그를 믿게 됩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습니다. 이 뿐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습니다. 이 고난도 은혜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인하여 믿음의 선물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고난을 받음으로 믿음으로 인한 은혜의 세계가 분명하여 집니다.

 

오늘 본문 7:1~6절입니다. “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욥의 고난을 처절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종과 품꾼이 저녁 그늘을 기다리고 그 삯을 기다린다는 것은 종이나 가난한 노동자가 되어봐야 아는 내용입니다. 종은 저녁이 되면 좀 쉴 수가 있습니다. 품꾼도 저녁이 되어야 일당을 받아서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쉼을 원하지만 몇 달째 고통을 받으니 그 밤도 쉼이 아니라 고달픈 밤입니다. 그래서 누울 때면 언제 일어날까? 언제 밤이 갈 까 하는 것입니다. 종도 품꾼도 쉴 수 있는 밤이 자신에게는 고통의 밤이라서 그 고통으로 밤새 뒤척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상처는 구더기가 생기고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진 것입니다. 이제 아무른 희망 없이 산송장처럼 그저 날만 빠른 베틀의 북처럼 지나가고 있습니다.

 

몸에 구더기가 생긴 것은 죽은 송장에게나 일어날 일입니다. 지금 욥은 마치 죽은 송장처럼 몸에 구더기가 생긴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고난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한글 성경에서 구더기라는 단어가 8회 나오는데 그 중에 6회가 욥기에서 나옵니다. 욥의 고난이 어떤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욥의 몸에 구더기가 생긴 것입니다. 욥기 17장은 엘리바스가 욥을 두 번째 공격한 말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이 무덤에 내려가 무덤을 아버지라 구더기를 내 어머니, 내 자매라고 할지라도 나의 희망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합니다. 더 바닥으로 내려 간 표현입니다. 욥이 21장과 24장에서 자신의 고난을 구더기에 비유를 하자 빌닷이 인생 전체를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라고 25장에서 말합니다. 이러한 구더기라는 말은 결국 인생의 썩어짐과 무덤에 들어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본문 7~11절입니다. “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욥은 지금 살아 있으나 마치 죽은 자처럼 구더기가 몸에 덮여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음에 내려가는 자와 같다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한낱 바람임을 생각하여 달라고 합니다. 잠시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인생이기에 곧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욥을 본 자들이 욥을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구름이 사라지는 것처럼 스올로 내려가는 자도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기 처소도 그를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인생이 지나가는 바람 같고 쉬 사라지는 구름과 같은 것인데 이제 죽어지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인데 내가 무엇이라고 이렇게 괴롭히느냐는 불평입니다.

 

본문 12~16절입니다. “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바람 같고 구름 같은 인생인데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대단한 존재인양 지켜보시느냐는 원망을 합니다. 내가 바다입니까? 내가 바다의 괴물입니까? 바다의 괴물이란 용으로 번역되는 리워야단입니다. 혼동과 무질서를 일으키는 세력으로 표현되는 바다 괴물을 창조 때에 감금하여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다라고 말하거나 바다의 괴물로 말하거나 간에 이러한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늘 지키시는 것이 마땅하시지만(38:8) 나 같은 자를 무엇이 대단하다고 지키시느냐는 것입니다.

 

앞에서 무엇이 위로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릴 때에 살펴본 내용이지만 나의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리라고 하면서 침상에서 나의 수심을 풀리라고 하지만 주께서 꿈으로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한다고 합니다. 시편 127:2절에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잠자리에서도 쉼이 없습니다. 몸이 악창으로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마음의 괴로움으로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러므로 욥의 마음은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겠다고 합니다.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입에 발린 소리가 죽고 싶다고 하지만 욥의 고난 근처에도 가보지도 못하고 하는 소리입니다. 욥 앞에서도 죽고 싶다고 하시겠습니까? 욥은 그림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욥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옵니까? 죽고 싶다는 말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항변입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욥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고통이 가중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을 수 없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정말 살기를 원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죽을 수 없는 것은 주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주께서 나를 놓아달라고 합니다. 내 날이 헛것인데 이런 인생의 목숨을 붙들고 계신들 하나님께 무슨 득이 되겠느냐며 제발 죽여 달라는 말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사람이 무엇이라고 주께서 마음을 두시느냐는 불평입니다. 시편 8:4절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돌보시느냐고 합니다. 시편은 찬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편 8편의 인자의 내용도 히브리서에서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2). 그러면 욥기의 탄식이나 시편의 찬양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취가 되는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그리스도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성도들에게도 일어납니다. 탄식과 찬송이 날줄과 씨줄처럼 엮어져 직조되는 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그런데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나를 붙들고 계시는 그 손을 놓아버리시면 좋겠다고 합니다.

 

본문 18~19절입니다.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사람에 대하여 오늘 읽은 말씀에서만 보아도 한낱 바람과 같고 구름 같고 구더기 같은 인생인데 왜 사람을 크게 보시고 마음을 두셔서 아침마다 권징하시면 순간마다 단련하시느냐는 불평입니다. 어느 정도로 눈을 돌이키지 않고 살펴보시는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않는다고 합니다. 몸이 정말 아플 때에 침 한번 꼴깍 삼키는 것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 잠시라도 주의 손이 놓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 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참으로 별 것 아닌 인생이 죄를 범한 들 주께 무슨 해가 되겠느냐고 합니다. 바다에 눈물 한 방울 흘린들 그것이 바다의 염도에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이와 비교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께 욥이 죄를 범한 들 무슨 해가 된다고 나를 과녁 삼으셔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시느냐고 항변을 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내가 무엇이라고 하나님의 짐이 되겠느냐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욥이 무슨 무거운 짐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놓아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본문을 하나님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으로 유대인들이 수정한 곳이 몇 곳이 됩니다. 욥이 어떻게 하나님께 짐이 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욥을 짐으로 여길 수가 없다고 보기에 욥이 짐을 지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창세기 18:22절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소돔과 고모라로 가고 이 두 사람은 천사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앞에 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이나 또는 유대인의 하나님께서 대한 충성심으로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아브라함 앞에 서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서 있는 것으로 고친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으로 보기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욥은 엘리바스가 욥의 죄를 회개하라고 할 때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사하여 주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비록 인간이 죄를 지은 들 하나님께 무엇이 그리 큰 해가 되겠느냐며 자신의 죄는 모르지만 혹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것을 사하여 주셔서 자신의 고통을 들어주시든지 아니면 나를 붙들고 주목하여 보시는 그 하나님의 눈길을 거두어 들이시고 붙잡고 계시는 그 손길을 놓아 버려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것은 욥의 표현대로 아침 마다 돌보시고 순간마다 권징하십니다. 침을 한번 꼴깍 삼킬 만큼의 틈도 주지 않으시고 살펴보시고 붙들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의식하십니까? 하나님을 이렇게 인식하십니까? 구약은 주의 영이 내주하심을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신약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의 영을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면 그 영이 우리 안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 영이란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동일하게 욥처럼 하나님께서 다 살펴보시고 계시며 붙들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인식을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욥처럼 다루시면 우리 모두는 욥보다 더한 원망을 쏟아낼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힘들어도 왜 부모님은 나를 흙 수저로 태어나게 하였느냐고 원망이 나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욥과 같은 고난이 온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하나님이라면 차라리 믿지 않겠다고 도망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욥이 도망갈 수가 없었고 오늘날 고난 받는 성도들이 도망을 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는 그 손을 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손길이 바로 언약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결코 놓으실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 언약하셨기에 죽음도 그 언약을 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굴곡이 일어날 것입니다. 쟌의 귀용의 영혼의 폭포수라는 책을 명절에 읽었습니다. 성도의 일생을 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비유를 합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계곡을 흘러내리고 웅덩이에 고이고 차고 넘쳐서 강물이 되고 바다로 흘러가서 바다와 하나가 되는 비유로 성도의 일생을 설명합니다. 어떨 때는 기뻐서 춤 출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정말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과 같은 고독과 절망이 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침을 거듭하면서 십자가를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시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님을 주신다는 말을 합니다.

 

침 삼킬 동안도 우리를 놓지 않고 주목하시고 붙들고 계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 십자가와 하나 되기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필수적인 길입니다. 이 길 외에 달리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길은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과 눕는 것과 마음의 생각까지 다 밝히 보고 계십니다. 여기서 피하여 보려고 하늘에 올라가도, 스올에 가도, 땅 끝까지 가도 그 곳이 하나님 앞이라는 시편 139편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 그 사랑을 받는 자들이 고난의 길을 가는 성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