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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1:22~31 망령(妄靈)된 자 2018. 2. 7

 

22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허느니라 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24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 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본문 22절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헌다고 합니다. 단순하게 문자대로 보면 삼국지 같은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삼국지에 수많은 용사가 나오고 모사들이 나옵니다. 지혜자를 모사라고 보면 제갈량, 방통, 주유, 육손, 사마의 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지략은 요새화 된 성벽을 공격하여 이기는 이야기들입니다. 성경이 이런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앞에 여러 가지 난공불락의 성벽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겨서 지혜를 얻으면 어떤 성읍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이나 세상의 여러 가지 이긴 이야기를 하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과연 이 말씀을 그렇게 볼 수 있는지 성경에 나타나는 성을 무너뜨리는 내용 몇 곳 보겠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처음 마주치는 성읍이 여리고입니다. 여리고 성이 얼마나 튼튼한지 이중으로 요새화 되어 있는 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성을 어떻게 무너뜨립니까?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나팔을 불면서 하루에 한 바퀴씩 성을 돌고, 칠일 째는 일곱 바퀴를 돌고나서 나팔을 불고 소리를 지르니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전혀 지혜로운 방식이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작전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백성들로 하여금 함구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여리고성의 무너짐이란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그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의 승리 후에 아이 성에서는 아주 작은 성인데 실패합니다. 여리고 성에서 승리를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승리 후에 자신들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 갈 것도 없다고 하면서 여호수아에게 2~3천명만 가도 된다고 하자 3천명을 보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패배하고 36명이나 죽임을 당합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언약궤 앞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기도하기를 우리가 요단 저편에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응답이 임합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나의 언약을 어긴 자가 있다고 합니다. 여리고 성은 여호와께 바쳐진 성읍이기에 그 어떤 물건도 개인이 손에 넣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자가 그 성읍의 물건을 노략하여 자기 장막에 숨겨둔 것입니다. 고대전쟁에 동원되는 군인들은 전리품을 챙기기 위하여 전쟁에 나갑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전쟁에서 이기면 수많은 전리품을 챙겨 올 수 있습니다. 아간은 여호와의 전쟁이 언약의 성취임을 모르고 자기 공로를 챙긴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없애기 위하여 제비를 뽑아 아간을 적발하여 내고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치고 불로 사릅니다.

 

그리고 아이 성을 공격하는데 무려 3만 명이 올라가서 성 뒤에 매복할 것과 성을 공격하다가 거짓으로 패한 척 하여 물러가면 적이 따라 나올 것이며 그 때에 매복한 군사가 성에 들어가 불을 지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패한 척 물러가던 자들이 돌아서면 적들을 포위하여 공격하게 한 것입니다. 참으로 치밀한 작전을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작전대로 하여 아이 성에서 완전한 승리를 합니다. 이러한 전쟁의 이야기들이 성경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적용을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적들을 물리치자는 식으로 해석을 하면 성경의 일부만 본 것입니다.

 

창세기 15:16~18절입니다.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세기 15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신이 아브람의 방패와 지극히 크신 상급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자기는 자식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나의 상이라고 하면서 나에게 자식도 안 주시니 집안에서 기른 엘리에셀이 나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자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물론 이 약속은 그리스도로 성취가 됩니다(3:16). 그리고 약속의 땅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언약을 체결합니다. 이 언약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아브람은 구경만 하고 하나님께서 홀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을 주신다고 하시는데 왜 사대 만에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차지하는 것은 그들이 아모리 족속보다 의로워서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아 나왔기에 의로운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쟁은 하나님의 의를 계시하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의를 버리게 되면 그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전쟁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종교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의 말씀에서 지혜로운 자를 예수님으로 봅니다. 잠언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지혜로운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가 그리스도시라면 우리가 만든 우리의 성들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견고하고 세워놓은 성벽이라고 하여도 무너뜨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성벽을 내가 튼튼하게 세우려고 할 뿐만 아니라 이 성벽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든든하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우려고 하는 그 성벽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창세기 4:16~17절입니다.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4)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 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됩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됨으로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 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자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유리(遊離)하는 자, 곧 떠돌아다니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성을 쌓고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과 같은 이름입니다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더 나은 본향으로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을 쌓고 살아갑니다. 성을 쌓은 것은 도시문명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이 목축하는 조상이 나오고, 음악 하는 자의 조상이 나오고, 구리와 쇠로 각양 기구와 무기도 만드는 자들이 가인계열에서 나옵니다. 이들은 성을 쌓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문명을 발달시키고 무기들을 만들어 더욱 자기의 성을 두텁게 하고 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들이 스스로 세운 성읍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인만이 아니라 노아홍수 전에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기에 바빴습니다. 먹고 마시며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자기들의 집안을 세우고 성벽을 든든하게 만드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노아를 통하여 세상이 물로 심판할 것을 보여주셨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람들이 든든히 자신의 성벽을 세워도 지상의 가장 높은 산보다 약 7미터 더 높게 물이 뒤덮어버린 것입니다. 어떠한 성벽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노아 홍수 이후에도 인간들은 성과 대를 쌓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흩어지라고 하셨는데 인간은 흩어짐을 면하고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들은 노아 홍수의 일을 기억하는 자들이기에 더욱 성과 대를 높이 쌓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지역에서 또다시 자신들의 성벽을 쌓아가면서 살아가는 인생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성벽을 견고하게 세우려고 합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어떤 단체나 국가나 교회도 자기들의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게 하려고 합니다. 정치권도 서로의 이익을 따라 이합집산 합종연횡을 합니다. 국가들끼리도 서로의 이익을 따라 울타리를 만듭니다. 자신들의 울타리와 성곽을 튼튼히 해 놓고서는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닥다리를 걷어 차 버리는 것이 선진국이라든가 강대국들이 만드는 법입니다. 트럼프가 한국과의 무역협상을 다시 하겠다고 합니다. 재벌 부회장이 수백억의 불법은 무죄로 인정받고 36억의 뇌물죄는 인정되었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이것이 재벌의 두터운 성벽입니다. 이러한 성벽을 사람들이 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나 오늘 이 땅에서나 사람들은 자기의 성벽을 든든하게 세우면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자들이 아니기에 그들이 의지하는 성벽을 무너뜨리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면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의 말씀대로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벽을 무너뜨린다고 한 것은 오늘 우리가 세상의 용사처럼 나의 성벽을 쌓아서 지키려고 하지만 지혜로운 주님은 허무십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한다고 합니다. 말에 대하여서는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입과 혀를 지키는 자가 자기 영혼을 보전한다는 말을 교만한 것과 연결이 됩니다. 22절의 말씀처럼 자기의 성벽을 높게 쌓은 자들은 그 말이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능력으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졸부 부모를 만난 덕에 부자로 살아가면서 가난한 자를 조롱하고 멸시한다면 이들의 입과 혀는 교만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환난이 오면 그 말이 심판을 받습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 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망령된 자입니다. 망령된 자를 히브리어의 용례를 보면 조롱하는 자, 비웃는 자, 오만 한 자, 거만한 자로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번역의 망령(妄靈)된 자의 뜻은 이렇습니다. ‘늙거나 정신이 흐려져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났거나 또는 그런 상태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정상을 벗어난 것입니다. 저는 타락한 모든 인간이 다 망령된 자로 봅니다. 자신이 피조물인줄도 모르고 창조주인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례하고 교만한 것입니다.

 

에스겔 28:1~5절입니다.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3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4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두로는 바닷가에 위치합니다. 무역으로 인하여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든든한 성벽을 쌓고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하여 성벽을 쌓고,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쌓아두고서 자신이 스스로 보호할 수 있다고 여기는 교만입니다. 이러한 자를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교회당에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성벽을 높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망령된 자가 다 우리들의 모습입니다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이러한 망령된 일을 보게 하십니다.

 

시편 55:6~11절입니다. “6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9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10 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11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성 안에서 강포와 분쟁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멸하시고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은 그 혀를 금하지 않습니다. 사람만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무시합니다. 이러한 성안의 일들을 보았기에 다윗은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본 다투는 아내와 함께 좋은 집에 사느니 차라리 움막에서 살겠다는 말씀도 연결이 됩니다. 그 교만하고 거만한 일들이 성 안에 가득합니다. 죄악과 재난이 있고 악독과 압박과 속임수가 떠나지 않는 성읍입니다.

 

이러한 성읍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는 멀리 떠나려고 합니다. 택한 백성인데도 떠나지 않으려고 하면 강제라도 이끌어 내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롯의 가족을 보면 그 성이 멸망한다고 떠나라고 하는데도 머뭇거립니다. 그러자 두 천사가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을 손을 잡아 이끌어 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는데 그 성안에 롯의 사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성에 미련이 남은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성벽 쌓기에만 몰두함이 저주입니다.

 

말라기 1:2~5절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2)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시자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가 무엇이냐고 따집니다. 이 당시 유다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두신 거냐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땅에서 유리하면서 살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성을 쌓고 문명을 발달시키며 살았듯이, 에서의 후손들도 땅에서 유리하며 살라고 하셨지만 그들이 성벽을 요새화 하여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무너뜨렸으나 그들은 다시 쌓았습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면 두 손 들고 주께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불굴의 의지로 나는 다시 쌓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쌓는 것이 진노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모습은 우리가 믿는 것들을 무너뜨리십니다. 그것이 재산이든, 건강이든, 사람의 관계이든, 교회이든 간에 내가 주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무너뜨려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망령된 짓을 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망령된 자인 것은 또 다시 나의 성읍을 쌓으려고 합니다. 나의 이름을 높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우리의 성읍을 무너뜨려 주심으로 교만하고 거만하여 망령된 길로 가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무너짐으로 인하여 언약의 완성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로 들어가야 영원한 피난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리 봐도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미련하고 거리끼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저주 받아 죽은 십자가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 안으로 들어가야 영원한 피난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어 주십니다. 내게 세상이 믿던 모든 것들을 흔들어 버리고 끊어버리시고 무너뜨려 버리심으로 영원한 도피성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18:1~4절입니다.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1)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1)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지혜로운 자가 용사의 성읍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우리는 다 이 세상의 용사로 영웅호걸로 살고 싶어서 자기들의 성벽을 견고히 세우는 일에 평생을 보내다가 죽어갑니다. 그러나 지혜로우신 주님은 우리의 성읍을 무너뜨려서라도 멸망하지 아니할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입니다. 잠간 있는 것들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에 영원한 것이 보입니다. 그 영원한 것은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기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들을 흔들어 십자가로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 주님의 지혜입니다. 이 일이 일어날 때 당황하지 마시고 그 길로 함께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