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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2:17~29 지혜자의 말을 들으면 2018. 3. 7

 

17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18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19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20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잠언 1:1절부터 지금까지의 잠언은 거의 한 절로 된 잠언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두 세절씩 한 주제를 다루는 잠언이 나옵니다. 잠언 1:1절에서는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시작한 것이 22:16절까지입니다. 오늘부터 보는 22:17~24:22 절이 지혜 자들의 잠언이라고 하고, 24:23~34절도 지혜 자들의 잠언이라고 합니다. 이 두 묶음은 다른 지혜 자의 잠언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25:1절을 보면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인데 히스기야 왕 때에 편집한 것이라고 해서 29장까지 나오고, 30장은 아굴의 잠언이며, 31장은 르무엘 왕이 말한 것인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잠언의 목적은 여호와 경외이며 여호와 경외는 결국 오늘 본문 19절의 여호와를 의뢰함과 연결이 됩니다. 오늘 본문 22:17~21절은 몇 절씩 나오는 잠언의 서론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봅니다.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두라고 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복수입니다. 지혜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도 솔로몬 만이 아니라 아굴과 다른 사람의 이름도 나옵니다. 그러면 이러한 지혜 자들의 지혜도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잠언 서론에서 잠언의 기록 목적이 여호와 경외입니다. 지난주 오전에 본 신약까지 연결하여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주로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2:11). 그러므로 지혜 자의 말을 듣고 마음에 두라고 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지혜자의 말을 네 속에 보존하라고 하는 것은 문자대로 하면 배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실제로 다 외우다 시피 하였습니다. 그렇게 외우는 것이 속에 간직하는 것이며 실천하는 것이며 늘 입으로 말할 수 있기까지 하는 자들이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지혜자의 말씀을 듣고 속에 간직하고 입술에 있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인데 왜 아름다운가 하면 그렇게 하면 여호와를 의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19~21절입니다. “19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20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지혜 자의 말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이며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를 보내는 자에게 대답할 말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 자들의 말을 들으면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떻습니까? 여호와를 의뢰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배척한 것입니다. 이러한 배척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은 처음 사람 아담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음 없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을 먼저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후에 430년이 지나서 모세 언약을 주신 것은 왜 인간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확증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가 없음을 율법과 선지자가 무수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구절만 봅니다.

 

예레미야 13:23절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미야 선지자는 남 유다의 멸망을 목격한 선지자입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혜 자와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여도 듣지 않았습니다. 흑인이 그 피부색을 바꿀 수가 없고 표범이 그의 반점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에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본문 17~21절을 봅니다. 지혜자의 말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입술에 두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을 통하여 주어진 이 말씀들이 무효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다 성취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여호와께서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 언약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돌 판에 기록이 된 것이지만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새 언약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로 이루어내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입니다. 십자가로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면 그 성령이 임한 자는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지혜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이미 잠언 서를 보면서 많이 찾아본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아주 상세하게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자 율법을 지킨다는 자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아붙여서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담을 자가 있다고 합니다. 누가 그런 자인지 마태복음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1:13~19절입니다.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2)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 까지라고 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 4:5절에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를 세례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가 말한 그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이 모든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면서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비유로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호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지혜가 어떻게 자기 일을 이루어 내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는 각주를 보면 지혜는 그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낳은 자들만이 예수님을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참 지혜의 말이 임하여 그 지혜의 말을 전하는 자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핍박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먼저 나를 미워한 것을 알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 하겠지만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언약을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게 된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이 듣기 싫어서 이를 갈면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세상이 지혜의 말씀을 듣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보여줍니다. 명심보감이나 세상의 좋은 말들은 사람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싫어하는 것입니까? 지혜자의 말을 제대로 들으면 자기의 주체성이 세워지고 자신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것이며 여호와를 의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어떤 죄인인지를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지혜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말을 들으면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는데 여호와 경외의 결론은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본문 22~23절입니다. “22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3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성문이란 옛날에 재판이 벌어지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힘이 없고 약하다고 해서 탈취와 압제를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호와께서 그 약한 자를 신원하여 주시고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나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하실 분이 계십니까? 요즈음 미투운동이 일어나서 요란합니다. 성추행과 폭행은 대부분 힘이 있는 자리에 있는 자가 약한 자에게 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피해자가 많지만 여자가 상사일 경우에 남자도 피해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무엇을 얻기 위하여 다가간 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이런 과정에서 억울한 사람들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가해자에 대한 분노도 일어나지만 내가 가해자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저는 어려서 나름 착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저보다 약한 자를 괴롭힌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 우리 마을에 가장 가난한 집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에게 가방을 들고 가게 한 적이 있습니다. 한해 후배였는데 저와 앞 뒤 집의 아이 세 명이 그 아이에게 가방을 들고 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담임선생님께 고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빼고 두 명만 고발을 한 것입니다. 왜 그랬느냐면 제가 주일학교에서 상을 받은 연필을 그 아이에게 싸게 팔았기 때문입니다. 연필 사려면 계란을 들고 가서 사기도 하고 그런 때에 십 원이면 연필 한 자루인가 주었습니다. 저는 십 원을 받고 두세 자루를 주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했다고 상을 받은 것을 팔아먹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에게 가방을 지운 것입니다.

 

만약 제가 더 큰 권력을 가졌다면 얼마나 약한 자를 착취하면서 살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아주 낮추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낮추어짐 속에서도 나 보다 약한 자를 괴롭힌 것입니다. 아내나 자녀도 나보다 약하기에 사랑으로 대하기보다 괴롭혔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한 절만 적용시켜도 저는 이미 심판을 받아 생명이 끊어져도 할 말이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 작은 죄가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한절의 말씀만을 통하여서도 전적인 죄인임이 드러나기에 제가 가해자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은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를 받아들이려면 내가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 분노하여 사도들을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이는 것입니다.

 

본문 24~25절입니다. “24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25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노를 품고 쉽게 화를 내는 사람과 사귀면 다툼을 일으킵니다(15:17). 죄에 빠집니다(29:22). 영혼을 올무에 빠뜨리지 않으려면 노를 품은 자와 사귀거나 동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노를 품고 울분을 토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이 억울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분노를 합니다. 저도 분노할 때가 많습니다. 무언가 억울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분노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살해한 가해자가 나 인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앞에서 회개할 것뿐입니다.

 

본문 26~27절입니다. “26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27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보증에 대하여서는 앞에서도 말씀을 많이 보았습니다. 보증설 능력이 없는 자가 보증을 서게 되면 모든 것을 다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보증설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죄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른 갚을 것이 없는 죄인들의 보증을 서셨기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생명으로 보증하신 것이 아브라함 언약 체결에서 드러났습니다(15:117,18). 이러한 언약을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로 이루시고 그 보증선 자들에게 담보물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고후1:22, 5:5. 1:14, 7:22).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은 자신이 보증을 설 자가 아님을 알고 보증을 서신 주님만 의지합니다.

 

본문 28절입니다.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 석을 옮기지 말지니라이 말씀은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9:14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약속의 땅은 여호와의 전쟁으로 하사 받은 땅입니다. 이 땅은 사고 팔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없이 하여 이 땅 가운데 홀로거주하려고 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책망합니다(5:8). 호세아 선지자는 유다 지도자들이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기에 여호와께서 진노를 물 같이 부으리라고 하셨습니다(5:10). 율법과 잠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담으라고 하여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이미 이스라엘이 멸망한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도 망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이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도 망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도 세상은 땅 따먹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를 하고, 국가 간에도 땅 따먹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영토가 땅만이 아닙니다. 얼마나 보암직한 기술을 보이느냐에 따라 경제적인 영토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미 세계의 경제는 하나입니다. 거대 자본이 넘나들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 물결에서 고립되면 북한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도 남북대화를 하고 미국과 대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날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성경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목표가 땅의 지계 석을 옮기는 방식으로 자기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토만이 아닙니다. 모든 경제활동도 포함이 되는 것이며, 목사이면 교세 늘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으로 오르려고 하니 자전거 페달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밤낮 쉼이 없는 지옥이 기다립니다(14:11).

 

어려서 학교 운동장에서 땅 따 먹기 놀이를 했습니다. 점심기간에 여유가 있으니 크게 네모를 그려놓고 병뚜껑으로 세 번 손가락으로 튕겨서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 그것이 자기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종이 치면 발로 쓱쓱 문지르고 교실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주님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나팔 소리에 이 하늘과 땅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땅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거처할 곳은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90:1,2).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주님의 거처가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성도가 성전입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땅 한편 마련하지 못하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위에 것을 찾는 자들이 됩니다.

 

본문 29절입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자기의 일에 능숙하려면 자기의 일을 충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왕 앞에 설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일을 잘 함으로 출세한다는 이야기로 읽으면 세상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왕이 누구십니까?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7:20~24절입니다.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4)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 전체의 주제입니다.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려고 할 필요가 없고, 할례 없는 자가 할례를 행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 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종이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종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것처럼 여기고, 물건을 사고파는 자들은 그 물건을 다 쓰지 못할 것인 줄 알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형적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주와 함께 동행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각자가 부르심을 입은 대로 주와 함께 동행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만왕이 왕이시며 만주의 주와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말을 듣고 마음에 새겨서 주를 의지하는 자들의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