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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3:19~35 사귀지 말라 2018. 3. 28

 

19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20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21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교회를 다니면서 술을 즐기는 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있지만 술을 먹지 말라는 말씀은 없다고 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보지도 않으면서 자기의 행위를 합리화 하려는 인간의 교묘함이 숨어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술을 보지도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에 이런 말을 하는 분에게 이 말씀을 찾아주었습니다. 술을 즐기는 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동일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 안에 갇혀있다고 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다른 사람과 취향이 다른 것을 가지고 자기 의로 삼고 살아갑니다.

 

전에 제가 바람피우는 것이나 커피 마시는 것이 무슨 차이냐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라서 각자의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성경을 해석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경을 읽으면 교만해 지지만 성경이 나를 읽으면 회개하게 된다고 말씀을 드린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기에 우리를 찔러 쪼개어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벌거벗은 듯이 드러냅니다. 말씀이 일하시면 자기 죄를 알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14:12~16).

 

본문 19~21절을 봅니다. 지혜 자가 내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라고 합니다. 그 지혜 자의 말은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합니다. 술을 즐기고 먹기를 탐하는 자만이 아니라 게을러서 잠자기를 즐기는 자와도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자들과 사귀게 되면 그들을 따라 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가난하게 될 것이기에 그들과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특한 문화가 회식문화입니다. 회식을 하면 술이 기본입니다. 폭탄주를 마시면서 먹고 죽자고 합니다. 이러한 회식에 참여하지 않으면 왕 따를 당합니다. 거래처 손님을 접대하는 것도 이런 식입니다. 물론 지금은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이런 문화 속에서 예수 믿는 자의 고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하는데도 단지 함께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불이익을 당한다면 불이익 당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본문 22~25절입니다. “22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23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24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지혜 자가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비와 늙은 어미, 부모를 말하는 것은 지혜의 전달자로 봐야 합니다. 단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은 성경 아니라도 얼마든지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단지 유교적인 효의 사상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부모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는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여호와의 말씀을 가르치고 들으라고 하는데 듣지 아니하면 부모가 자식들을 재판에 넘겨서 죽게 까지 하라고 합니다.

 

신명기 21:18~21절입니다.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으면 성읍의 장로들에게 고발하게 합니다. 그러면 성읍의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서 죽입니다.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고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지만 그렇게 함으로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이 지혜와 훈계와 명철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부모가 즐거울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가 부모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얻은 자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딤후2:1). 빌립보서 2:3~4절입니다.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듯이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이든 복음이든 그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 전달자에게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합니다.

 

본문 26~28절입니다. “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27 대저 음녀는 깊은 구덩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28 참으로 그는 강도 같이 매복하며 사람들 중에 사악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

 

지혜 자가 또 아들을 부릅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라고 합니다.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디로 갑니까?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사람마다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 보물이라고 합니까? 잠언에는 지혜가 보물이라고 합니다. 이 지혜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물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즐거워합니다. 저도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납니다만 늘 만나고 싶은 사람은 그 마음을 예수님께 두는 자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길과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께 두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음녀의 미혹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음녀는 아주 매혹적으로 다가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되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깊은 구덩이며 좁은 함정이라서 빠지면 헤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음녀들이 강도같이 매복하여 기다리다가 덮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와 사겨야 할지를 잘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성공과 쾌락과 이익을 위하여 사귀려고 한다면 그 결국이 멸망입니다. 반면에 봉사와 나눔을 위한 사귐도 있습니다. 이런 사귐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누가 사귀겠습니까?

 

요한일서 1:1~4절입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1)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과의 사귐을 위하여 사도들이 증거 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깊어지지 않으면 끊임없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눈으로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보고 만졌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성육신을 한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려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사귄다는 것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원한 생명과의 사귐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대로 술을 즐기며 먹기를 탐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온갖 취미 생활을 다 해 봅니다. 유행 따라 살아가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취미나 유행이라며 신상이라고 해도 해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늘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여도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성취로 일시적인 만족감을 있을지라도 그 성취 뒤에는 더 큰 공허감이 몰려와서 술과 마약으로 빠지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 공허함을 세상의 것들로 도피하려고 하는 것 중에 하나인 술에 대한 말씀을 봅니다.

 

본문 29~35절입니다. “29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30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32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33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34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재앙, 근심, 분쟁, 원망, 까닭 없는 상처, 붉은 눈이 누구에게 있느냐고 합니다.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다고 합니다. 포도주가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간다고 합니다. 아주 매혹적이기에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지혜 자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하여 술을 먹게 되면 술이 뱀과 독사 같이 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술을 먹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부르고 결국은 술이 사람을 잡아먹게 됩니다. 그래서 알코올 의존증이 되고 알코올 중독이 되면 술을 마시지 못하면 불안해 진답니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이고 구부러진 말을 하고 바다 가운데, 돛대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나를 때려도 아프지 않고 상하게 하여도 감각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어 술을 더 이상 마시지 못할 정도가 되었는데도 하는 말이 술이 깨면 다시 술을 찾겠다고 한답니다.

 

교부의 주석을 보면 이러한 술 취함을 나병과 같다고 합니다. 나병은 몸에 상처가나고 지체가 떨어져 나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술에 취하면 상처가 나도 모르고 때려도 아프지 않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술을 즐기고 먹기를 탐하는 자와는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술과도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술을 보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술을 좋아하고 자주 마시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씀을 듣고도 나는 알코올 중독이 아닐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전에 제가 어느 방송에서 본 내용인데 술 광고를 보고서 마시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이미 알코올 중독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들의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의 평생을 술을 마시는 분이 자신은 병이 아니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가족이 입원을 시켰습니다. 병원에서 알코올 중독이 병이라는 것을 인식 시켰답니다. 그러자 병을 치료하려고 적극 치료에 응하여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또 한 사람은 병원에 상담을 했는데 술이 문제가 아니라 스트레스가 문제라고 하였답니다. 스트레스로 술을 마시니 스트레스를 해소하라고 하여 그렇게 하니 조금 자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트레스의 근원이 더 잘살려는 욕망이기에 아직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살아갈 소망이 별로 없다고 여긴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갈 소망을 조금 가진다고 합니다. 술을 마시고 술에 중독이 되는 것은 여러 가지 환경적이고 심리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말씀을 전하는 자의 시각으로 보면 그 마음에 갈증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레미야 2:1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이며 또 하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합니다. 이 악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악입니다. 잠언에서 지혜는 생명나무라고 하였는데 생명 나무에서 끊어진 상태로 스스로 자신을 살리려고 하지만 결국 말라죽어갈 뿐입니다. 이런 근원적인 갈망을 세상의 어떤 것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결코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입니다. 곧 전도서를 보겠습니다만 세상의 쾌락이라는 것을 다 즐겨보아도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것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에 연결되어야 참된 만족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우물가에 예수님께서 찾아가십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가고 예수님 홀로 계시는데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자 여자는 유대인이 왜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자가 누구인줄 네가 알았다면 네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생수를 너에게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당신은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을 깊은데 어떻게 물을 주겠느냐고 합니다. 이 우물을 우리 조상 야곱이 주었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크냐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령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 여인은 알아듣지 못하여 동문서답을 합니다. 그런 물 주어서 다시 물 길러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하면서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네 남편이 아니었고 지금 여섯 번째 남편과 있지만 그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 여자가 바람기가 많아서 남의 남편과 여섯 번째로 살고 있었는지, 아니면 과부가 되어 살기 고단하여 기둥서방으로 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과거를 다 아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당신은 선지자라고 하면서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곳도 저곳도 아니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이 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그 우물가가 예배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목마름을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영원한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수로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근원적인 갈증이 해갈이 됩니까? 이렇게 기록된 말씀을 보고 믿으면 됩니다. 물론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수가 되심을 믿게 되는 것은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매일 밥 먹듯이 보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가장 기본입니다. 밥을 먹어야 활동할 에너지가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사귀어 사는 것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생명도 아닌 것, 썩어질 것들을 더 얻으려고 갈망을 하는 사람과 사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자들을 책망해야 합니다. 만유를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와 깊이 사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귀는 것은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중점을 두었던 내용입니다. 그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다른 뾰족한 방법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원에 며칠 간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금식 며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고 반찬을 먹듯이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것이 주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6절입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세상의 향락(享樂)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모습 같지만 죽었다고 합니다. 어디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추구하는 것이 세상의 썩어질 것이라면 그 사람은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술 취하지 말고 술을 보지도 말라고 하는 말씀은 단지 술에만 관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썩어질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자들과도 사귀지 말고 그런 것들과도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5:15~21절입니다. “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러한 말씀을 묵상하며 이 말씀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와 사귀며 살기 바랍니다. 찬송가 5394절 가사입니다. “너 주님과 사귀어 살면 새 생명이 넘치리라 주 예수를 찾는 이 앞에 참 밝은 빛 비추어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주님과 사귐으로 새 생명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