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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4:11~21 마음을 달아보심 2018. 4. 11

   

11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12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 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14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5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9 너는 행악 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20 대저 행악 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21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

 

잠언을 보면 반복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왜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번 주일 오전에 볼 빌립보서 3:1절의 말씀에도 내가 같은 말을 쓰는 것은 나에게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 안전하다고 합니다. 중요하기에 다시 반복을 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잠언을 처음부터 자세하게 살펴보았기에 반복되는 부분은 간략하게 보고 반복되지 않는 부분만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마음을 저울질 하신다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본문 13~14절을 먼저 봅니다. 전도자가 양봉업자도 아닐 텐데 꿀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것도 가장 극상품인 송이 꿀을 먹으라고 합니다. 우선 꿀에 대하여 잠언에서 몇 곳을 봅니다. 25:16절을 보면 꿀이 몸에 좋고 입에 달다고 과식하면 토할까 두려우니 족하리만큼 먹으라고 합니다. 25:27절은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꿀이 좋다고 많은 먹는 것처럼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됨을 말합니다. 27:7절은 배부른 자에게는 꿀이라도 싫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말씀들은 우리에게 지혜를 훈계하는 말씀입니다.

 

잠언 16:24절입니다.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고 합니다. 꿀을 선한 말과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달고 양약(良藥)이라고 합니다(19:10, 119:103절입니다). 그러므로 꿀이 좋다고 먹으라고 하는 말씀을 14절과 연결하여 보면 지혜가 네 영혼에 이와 같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 꿀이 좋은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 꿀처럼 좋은 것이고 몸의 양약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면 정녕이 장래가 있겠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어떤 장래와 소망이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 무너져도 남는 소망입니다.

 

15~16절입니다. 악한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라고 합니다. 시편에서 의인의 표상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처럼 의지할 데가 없어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압제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고 합니다.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세상의 칠전팔기라는 말은 인간의 의지를 말합니다. 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극복할 때에 주어지는 말입니다. 복싱선수 홍수환이 네 번 다운되고서 일어나서 상대를 이겼다고 간증하고 다닙니다만 의인이 왜 일곱 번이나 넘어지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주님께서 의인의 손을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욥기에서 욥의 세 친구보다 욥의 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의인이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지면 날마다 넘어지는 자로 드러납니다. 내가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해석하고 비추어버리면 우리는 날마다 넘어지는 자라는 말입니다. 분초마다 넘어지며 침 삼킬 동안도 넘어지지 않을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잠시 잠간 맛보는 것 같은데 넘어지는 것은 아주 자주, 아주 오랫동안 넘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 일어서고 넘어짐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가 의인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힘으로 일어선다고 하면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1~4절입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이 당시에는 유대인의 율법을 따른 음식규례로 인하여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간에 다툼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받는 자가 있고 그렇기 못한 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형제가 거리낌이 된다면 바울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 넘어져도 주께서 일으키심을 믿는 자들은 의인이라는 말씀입니다.

 

17~18절입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명기 22:1~4절을 보면 네 형제가 소유물을 읽어버리거나 나귀나 소가 넘어지면 못 본체 하지 말고 적극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원수가 넘어진 것을 즐거워하지 말고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않으셔서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렵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원수에게 임하는 진노가 너에게 올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원수에게 내리는 진노가 그쳐진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원수에게 임하는 진노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져 죽은 자들이 너희들보다 죄가 커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나의 원수였다고 하여도 그가 넘어지는 것으로 보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봐야 합니다.

 

19~20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 어떤 청년이 상담을 왔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는데 세상을 살면서 가장 큰 고민거리가 세상에서 악한 자가 형통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고생한다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악하게 살아야하는지 아니면 악한 자를 응징해야 하는지 고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을 다 읽어가면서 교제를 하니 어느 정도 해답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73편의 기자도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으로 인하여 죽을 만큼 큰 고민을 한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한데 죽을 때에 고통도 없고 소득은 계속 늘어나고 자식들도 그렇게 잘들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본인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려고 하는데 아침마다 재앙을 당하니 이럴 바에야 내가 왜 이 모양으로 살아야 하느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소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은 것은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악인이 눈에 보이는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눈으로 본다면 아무도 악을 행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늘과 땅에서 사모할 이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주 밖에 없는 것입니다.

 

21~22절입니다.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와 왕을 반역하는 자들은 그들의 재앙이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겠느냐고 합니다. 그 둘이란 반역자와 함께 사귀는 자들입니다.

 

시편 2편을 보면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나서서 분주하고 요란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매인 것을 끊어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반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비웃으시면서 시온에 한 왕을 세우십니다. 그 왕을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왕을 반역하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과 사귀는 자들에게 재앙이 임하는데 보이지 않으니 그 멸망을 누가 알겠습니까?

 

오늘 본문 11~12절입니다. 사망으로 끌려가며 살육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즉 그들의 곤경을 못 본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망으로 끌려가며 살육을 당하는 자들이 악인으로써 정당한 벌을 받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는 자가 있다면 그들을 모른 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나는 몰랐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언제 몰랐다는 말을 합니까? 정말로 몰라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악으로 인하여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할 때에 자끄 엘륄이라는 사람은 국제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고 하였습니다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땅히 도움을 베풀어야 할 자리에도 눈 감고 지나갑니다. 그러면서 온갖 변명과 핑계를 들이 됩니다. 그것도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분 앞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저울질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처음에는 내가 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나를 읽기 시작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다 나의 마음을 달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한 말씀에도 내가 온전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온전하기는커녕 단 한 구절의 말씀 앞에서도 나의 전 존재가 달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은 것이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주님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율법사가 어떻게 해야 영생에 얻는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되 질문을 하시면서 율법에서 어떻게 읽고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사가 하나님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대답을 잘 했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자기를 잘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은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합니다. 강도 만나서 다 죽어 가는데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시자 사마리아 인이라고 하면 율법사가 자존심이 상하니 친절을 베푼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오늘 말씀과 연결해 보려는 부분은 제사장과 레위 인이 강도 만난 자를 못 본체 지나가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는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을 저울질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살육을 당하며 죽음으로 끌려가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이 질문에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대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대답도 할 것입니다. 복음적인 시각으로 보면 복음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듣지 못하고 죽어 가는 자들을 향하여서도 모른 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몰랐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모르실까요? 주님께서 저울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가 저울에 달려봅시다.

 

다니엘 5:25~31절입니다. “25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 30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바벨론 제국의 왕이라면 그 권세가 대단합니다. 이런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그릇으로 술을 마시다가 왕궁의 벽에 손이 나타나 글씨가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얼마나 놀랐는지 무릎이 달달 떨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해석하기를 메네 매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하면서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하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습니다. 대제국의 왕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였다고 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나라를 파괴하고 무너뜨린 힘을 가진 제국의 왕이 하나님 앞에서 저울에 달아보니 저울에 달 것도 없는 입김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시편 62:9~12절입니다. “9 ,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하나님 앞에서 저울질 당해봐야 인생이 속임수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포악을 의지하거나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고 재물이 늘어도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권능은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저울질 하시면서 우리가 행하신 대로 갚으신다면 우리는 입김처럼 가벼워 아무 것도 달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전 존재가 말씀의 저울에 달려질수록 우리는 주님의 인자함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늘과 땅에서 사모할 분이 주님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