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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5:11~18 경우에 합당한 말 2018. 5. 2

 

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12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14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15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16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18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잠언에서 말에 대한 내용은 많습니다. 잠언 15장에서도 말에 대한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주로 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람사이에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설화(舌禍)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잘 못하여 재난을 당하기에 혀로 인한 화가 닥친 것을 말합니다. 말에 대하여 야고보 3장에서는 아무도 길들일 수가 없고 꺼지지 않는 지옥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의 문제는 말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라고 합니다. 아로새긴 은으로 만든 쟁반에 금으로 된 사과는 아주 귀중한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상황이든지 그 분위기에 맞는 적절한 말이 경우에 합당한 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합니다(12:5). 그런데 로마서의 말씀은 한 믿음의 형제일 때에 고락을 함께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경우에 합당한 말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봐야 합니다.

 

본문 11절은 12절과 연결하여 봐야 합니다. 11절의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12절의 슬기로운 자의 책망과도 연결이 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 아로새긴 은 쟁반의 금 사과라면 슬기로운 자의 책망을 청종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귀에 금 고리와 정금장식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경우의 합당한 말이란 슬기로운 책망이며 이러한 슬기로운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러한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그러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잠언 15:23~24절입니다. “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24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여기서는 때에 맞는 말이 아름다운 말이라고 합니다. 때에 맞는 말은 지혜로운 자가 하는 말입니다. 잠언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지혜이기에 그리스도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경우에 합당한 말이나 때에 맞는 말은 곧 지혜자의 말이기에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음의 길을 떠나 생명의 길로 인도를 받습니다. 지혜를 얻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고 합니다. 더운 여름 타작마당에 얼음냉수가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주인에게 충성된 일꾼이 주인에게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충성된 사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사십니까? 참으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예수님께 적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단 한 번도 자기의 뜻을 위하여 사시지 않으시고 오직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언제나 경우에 합당한 말씀을 하시고 때에 맞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보배가 됩니다.

 

마태복음 11:13~19절입니다.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2)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란 구약 전체를 말씀합니다. 모든 구약이 예언한 것이 요한의 때 까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라기 4:5절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구약 성경이 세례요한의 손가락으로 모아져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가리키는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놀이하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슬피 울면 가슴을 치는 놀이를 합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슬피 우는 역할을 하면 백성들이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런데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것을 보고 귀신이 들렸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피리로 붑니다. 그 천국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춤을 춰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경우에 합당한 말씀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말씀도 경우에 합당하지 않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시며(요일3:5)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고후5:21).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충성된 사자로서 참으로 온전하고 완전하게 경우에 합당한 말씀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들이 타락한 죄인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말씀이 아니기에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세례요한은 선지자로 인정을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받아들였다면 세례요한이 증거 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들을 귀가 없었기에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전건물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은 이 건물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 쫓으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는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여기면서 자신들의 의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저주를 퍼 부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은 전부 경우에 합당한 말씀이며 때에 맞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배척하고 결국 죽입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습니까?

 

마태복음 11:19절을 보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 행한 일의 각주를 보면 지혜의 자녀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낳은 자녀들만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지혜가 낳은 자녀에 대하여서는 이미 앞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로 낳아진 자녀라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다 경우에 합당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달콤하게 들리는 말씀만 밑줄이 그어져 있고 나에게 불리하고 부담되는 말씀은 넘겨버린다면 우리는 취사선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경우에 합당한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낳은 자녀만이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합당한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보배가 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좋은 말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좋은 말만 해 주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제물만 많이 바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재판하는 자들도 뇌물을 받으면 좋게 재판을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평화를 이야기하였지만 말 뿐이었지 오히려 재앙을 불러오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종인지 아닌지를 사람을 기쁘게 하는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지로 구별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땅은 비를 흡수하는 땅이기에 때에 따라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때에 내리는 비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농사지을 때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비가 오기를 잔뜩 기대했는데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구름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얼마나 실망이 크겠습니까? 그처럼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같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늘 복을 말하고 평안을 말하지만 그러나 참된 복과 평안이 아닌 것을 전하는 자가 있습니다.

 

유다서 11~13절입니다.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12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유다서는 거짓 선생들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이 당시에 이미 영지주의자들이 활동을 한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들의 특징들이 이미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지식을 가진 자들처럼 말하였지만 오히려 그들은 구약의 모든 거짓 선지자들의 계열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함께 어울리고 있었기에 책망을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고 합니다. 이들은 거짓말로 선물한다고 하는 자와 같습니다.

 

만민중앙성결교회 사건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요즈음 뉴스를 보고 그곳의 설교를 들어보았습니다. 요즈음은 주로 부목사들이 설교를 하는데 마지막 순서는 이재록목사가 축도를 하는데 수십 종류의 병명을 말하면서 낫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나온 어떤 분이 전화가 왔습니다. 공황장애가 있었는데 이재록 목사가 안수한 손수건을 가슴에 얹으니 낫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몇 년을 그곳에 충성하다가 빠져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을 붙들어야하는지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분과 이야기 하면서 위약(僞藥)효과를 말했습니다. 플라시보 효과 인 것입니다. 환자가 이 약을 먹으면 반드시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밀가루 환을 주어도 그것을 먹고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적으로 세뇌가 된 사람들은 손수건만 얹어도 병이 낫는다는 말을 믿었기에 공황장애도 낫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또 다른 것에 붙들리기 쉬운 사람이기에 우선은 복음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무언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비 없는 구름과 같은 것에 속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무른 표적과 능력과 효과가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는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은 이렇습니다. ‘분노를 오래 참으면 지배자도 설득되고, 부드러운 혀는 뼈도 녹일 수 있다.’ 이것도 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래 참고 부드럽게 말하면 강한 것도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의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들에게는 한 없이 부드러운 말씀이시며 경우에 합당한 말씀으로 들린 것입니다.

 

본문 16~17절입니다. 꿀에 대하여는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17절과 연결하여 봐야 합니다. 꿀은 좋은 것이지만 과식하면 토하게 되기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이 친하다고 해서 너무 자주 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그가 너를 싫어하고 미워할까 두렵다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로 쓸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너무 친하다고 함부로 대하면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자주 나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4:16).

 

본문 18절입니다.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라고 합니다. 십계명에서도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가장 큰 거짓 증거는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하여도 저주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뱀이 하화를 미혹하듯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사람의 눈치를 살펴서 분위기 좋게 하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당하는 모든 생로병사의 현장에서 가장 경우에 합당한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복음으로 울고 웃을 수 있는 자가 한 믿음의 형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영원한 보배가 된다는 소식이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