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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5:2~8 사랑하므로 난 병 2020. 3. 4          (535장)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5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7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8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요즈음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사회적 거리두기입니다. 이 말과 함께 자가 격리도 있습니다. 마스크 쓰고 밀접 접촉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당에도 가지 말라고 합니다. 동사무소에서 예배를 모이는지 안 모이는지 점검을 합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국가 공권력으로 교회의 문을 닫게 하기에 이런 말을 들으면 안 된다고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 시찰회에서도 어느 교단의 전 총회장의 글을 올려놓고서 목사님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답변한 내용입니다. 질문하셨으니 답변 해 봅니다. 논지는 일견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교회란 예수님의 피로 값을 주고 구속한 성도가 교회이기에 문을 한 번도 닫은 적이 없고 닫을 수도 없는 것이 참된 교회입니다.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 교회인데 어느 국가가, 어느 전염병이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로마의 대 박해 때에 지하 무덤인 카타콤이 교회당이었습니다. 이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머리가 되셔서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심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강건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단어와 자가 격리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언제나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도 있는데 바이러스로 모이지 않으니 편하다고 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였는데도 왜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런 문제가 도대체 언제부터 생기게 되었습니까? 에덴동산에서부터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십니다. 남자에게서 여자를 만드셨기에 둘이 한 몸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격리가 없습니다. 거리두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고 나니 격리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먹은 아담을 찾으십니다. 아담에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찾으실 때에 아담의 대답은 내가 두려워서 숨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최초의 자가 격리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금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으시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합니다. 내 뼈 중에 뼈이며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그 깊은 연합이 완전히 깨어진 것입니다. 여자는 뱀 핑계를 됩니다. 이때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됨으로 인간의 삶은 하나님과 격리되고, 사람과 사람끼리 격리되고, 사람과 피조물간에서 격리가 일어납니다. 단지 격리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피조물과 피조물이 서로를 해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길 것을 약속하십니다.

 

창세기 3: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요한일서 3:8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십니다. 마귀가 처음부터 범죄 한 것은 선악과로 유혹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의 단절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타락 이후에 인간의 탐욕으로 돌보아야 할 피조세계를 착취함으로 모든 피조물이 탄식합니다(8:22).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도 속으로 탄식하면서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8:23).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는 탄식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과 이루신 내용들이 무엇인지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출생과 세례 받으심과 시험 받으심과 사역과 선포는 성령에 의하여 하시지만 성령 또한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을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라고 하지만 이미 이런 내용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독립성과 연합됨의 신비를 우리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그 안에 포함시키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게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보내심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더 이상 자가 격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구약에서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입니다.

 

아가서 4:16절과 5:1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줄여서 말하면 나는 너의 것이며 너는 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온전히 하나가 되어 결혼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행복만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갈등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결혼생활에도 갈등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합니다. 저는 주례할 때에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사랑의 확대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세상이 볼 때에 이타적인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타적인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칭찬하니 결국 자기 사랑의 확대가 됩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면서 참 사랑은 여기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한일서4: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사랑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수많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있다는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은 십자기입니다(5:8). 이 사랑을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미리 나타낸 것입니다. 술람미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왕의 사랑을 받은 여인입니다.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가 왕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아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신랑을 놓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봉독이 상황을 꿈속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이 아니라 자고 있는 중에 신랑이 찾아온 것으로 봅니다. 자고 있었지만 마음은 깨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면 몸은 자고 있지만 마음이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술람미의 깨어 있는 마음은 신랑에 대하여 깨어 있습니다. 그때 신랑의 소리가 들립니다.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부르는 그 사랑의 말들로 부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신랑이 말하기를 머리가 온통 이슬에 젖고, 머리채가 밤이슬에 흠뻑 젖었다고 합니다. 신랑이 볼일을 보고 신부가 보고 싶어서 밤새 신부에게 달려와서 부릅니다.

 

3~4절입니다. “봉독 옷을 벗고 발을 씻고 누웠는데 다시 일어나는 것이 귀찮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삶의 모습을 잠시 생각해 봅시다. 누가복음 11장에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밤중에 친구가 왔는데 마침 집에 떡이 없습니다. 그래서 옆집에 떡을 구하러 갔는데 그 사람이 나를 괴롭기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없다고 하겠느냐고 합니다. 이 말은 떡을 구하면 지체가 되기는 하겠지만 반드시 주기 마련이라는 말씀입니다. 술람미도 자는 중에 신랑의 말을 듣고 잠시 지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미는 것에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움직입니다.

 

5~6절입니다. “봉독 신랑의 소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여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여는데 몰약이 손에서, 몰약의 즙이 손가락에서 문빗장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동안 몰약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몰약이 어디에 사용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에 몰약을 시체에 바르고 세마포로 샀습니다(19:39~40). 지금 아가서에서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밀어 넣을 때에 그 문에 몰약이 듬뿍 묻어있다는 것은 신랑이 다녀간 흔적입니다. 그래서 신부가 일어나서 문을 열 때에 그 손에서 몰약이 묻은 것입니다. 얼마나 흥건하게 많은지 손가락에 묻은 몰약이 문빗장에까지 떨어집니다. 그렇게 몰약 묻은 손으로 문을 열었지만 그 사랑하는 임은 벌써 물러간 것입니다. 그때 하는 말이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고 합니다. 몸은 자고 있을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었는데 신랑이 부르는 소리에 잠시 지체하였는데 신랑이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7~8절입니다. “봉독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이 여인을 만났는데 순찰하는 자들이 술람미를 쳐서 상하게 합니다.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겉옷을 벗겨 가 버립니다. 그 사랑받던 술람미의 꼴이 말이 아닙니다. 신랑의 사랑을 받아 결혼하였으니 신랑이 준 모든 것으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겉옷도 당연히 신랑이 마련하여 준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을 놓쳐버리니 그 겉옷마저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때 술람미가 예루살렘 딸들에게 부탁합니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알려달라고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면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전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병을 상사병(相思病)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몹시 그리워하여 생기는 병입니다. 이 병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고쳐지지 않는 병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병이 들었습니까? 사이비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서도 자신을 숨기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로 144천에 들어간다는 세뇌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민중앙교회도 열심히 모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세뇌로 인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런 저런 핑계로 지체하다가 신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잃어버릴 지라도 그분은 자기 신부를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흔적을 남겨둔 것이 몰약입니다. 신랑이 남겨둔 흔적이 죽음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고 함께 하늘에 앉힌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죽음으로 나타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교회에 온 많은 사람들이 왜 이곳까지 왔느냐고 등록전후에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이 예수님이야기 듣고 싶어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보면 늘 예수님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식상한지 점점 시큰둥해 지는 경우를 봅니다. 앞자리에서 뒷자리로 점점 멀어져 갑니다. 물론 제가 겉으로만 보지만 말씀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을 듣고 싶어서 병이 날 정도가 되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3:1~6절입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사데 교회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 말씀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요한계시록 3:14~22절입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술람미 여인에게 솔로몬이 문을 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체하다가 신랑을 놓칩니다. 찾아 나섰다가 겉옷까지 빼앗겨 버립니다. 그제야 신랑을 사랑함으로 병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데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가 둘 다 옷이 없다고 책망합니다. 이런 모습이 예수, 복음, 십자가는 많이 들어서 배부르다고 하는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상은 벌거벗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0절에서 문 밖에서 두드리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는다는 교회에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말로 우리 안에 주인이 예수님이 맞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온전히 나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합시다.


요한계시록 16:15절입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술람미 여인이 겉옷을 빼앗기고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임을 찾아 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사랑함으로 병이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 병이 들어있습니까? 몸이 아픈 병은 너무나 잘 압니다. 돈이 없는 고통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입혀주신 의의 옷이 없어서 고통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신자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신부라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없을 때 병이 드는 겁니다. 이 병에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치료가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만나고 그분으로 만족할 때만 치료가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