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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6:11~13 마하나임의 춤마당 2020. 4. 1     (524장)

 

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지난주에 톡으로 문자가 왔습니다. 자신은 아가서의 술라미를 하늘의 지혜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 문자를 보면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잠언 8~9장에서 보았듯이 지혜가 인격화 되어서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창조주와 함께 천지를 창조한 지혜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집을 짓는데 일곱 기둥으로 다듬은 궁을 만들어 놓고 잔치를 열어놓고 부르고 있습니다. 문자를 보낸 분은 현직 변호사인데 가끔씩 연락이 옵니다. 몇 사람과 함께 열심히 성경을 보고 함께 나누기도 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보낸 관찰질문에 답을 주고받으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늘의 지혜가 솔로몬을 사랑하고 솔로몬이 하늘 지혜의 완벽함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늘의 지혜가 주도권이 있고 그 지혜를 받은 솔로몬이 그 하늘 지혜와 상호 사귐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늘 지혜란 세상 지혜로 알 수 없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게달의 장막과 같은 모습이기에,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냈더니 그분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잠언120절 이하, 81절 이하, 91절 이하를 보면 지혜 즉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라는 답이 왔습니다. 지혜가 술람미라는 여성으로 보든지 하늘의 지혜로 보든지 참 지혜이신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하는 말로 주고받았습니다.

 

아가서를 처음 시작할 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지혜로 참된 지혜를 찾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온갖 지혜들을 다 찾아보았지만 참된 지혜는 여호와 경외임을 잠언과 전도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의 결론이 아가서에서 사랑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표현되든지, 지혜를 사랑하는 것으로 말하든지 간에 완성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표현으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모습이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하나님의 남편 되심과 이스라엘의 아내 됨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신랑이 되셔서 자기 피로 값 주고 구속한 성도를 신부된 교회라고 함을 성경이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기에 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본문 11~12절을 봅니다. “봉독 4절부터 이어지는 내용을 남자의 노래로 보기에 11~12절도 남자의 노래로 보는 번역도 있지만 어떤 번역은 여자로 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의 성과 수와 격에 따라 그렇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귀한 백성들이 타는 병거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가 암미나답의 병거로 되어 있기에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포도나무의 꽃을 보려고 호두나무 동산으로 내려갔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암미나답의 병거에 올라앉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혼자 탄 것이 아니라 여기에 술람미도 함께 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표현이 부지중이라고 합니다. 솔로몬도 술람미도 부지중에 병거를 탔다면 이들을 태우게 한 근원이 솔로몬과 술람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끄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3절 상반절 표준 새 번역입니다. 술람미의 아가씨야,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 눈부신 너의 모습을 우리가 좀 볼 수 있게,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 술람미의 아가씨야.” 이 노래는 합창으로 봅니다. 여인들이 술람미를 보고 싶다고 돌아오라고 네 번이나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신랑이 병거를 타고 와서 신부를 태워가기에 그렇게 부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술람미를 지혜라고 본다면 지혜를 보고 싶어서 돌아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인간도 인간이 스스로 지혜를 찾아 나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찾아 나서서 찾았다고 하는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찾아와서 알게 된 지혜여야 합니다. 이런 지혜는 사람이 결코 원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본문 13절 하반절 표준 새 번역입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마하나임 춤마당에서 춤추는 술람미의 아가씨를 보려 하는가?” 이 부분은 남자의 노래입니다. 솔로몬이 여인들의 합창을 듣고 답변하는 형식입니다. 그대들이 어찌하여 마하나임 춤마당에서 춤추는 술람미의 아가씨를 보려고 하는가라고 합니다. 지금 술람미는 이미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하고 있는데 너희는 왜 그를 부르느냐고 합니다. 너희가 술람미를 부르는 이유가 마하나임의 춤을 보려고 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이것을 다시 지혜로 보면 너희가 이미 지혜를 만난 자를 돌아오라고 해서 돌아오겠느냐는 말이기도 하고, 참 지혜를 찾는 길이 무언지 아느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술람미가 왕의 사랑을 받아 왕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 고난이었습니다. 상처입고 겉옷을 빼앗긴 채로 그 사랑하는 임을 찾아 나선 것은 이미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마당으로 번역된 마하나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32:1~2절입니다.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마하나임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라는 말이 엘로힘 마하네입니다. 야곱이 이곳을 마하나임이라고 합니다. 이곳이 지명이 되었기에 다른 곳의 마하나임은 다 지명입니다. 그런데 아가서의 마하나임은 정관사가 붙어 있어서 지명으로 볼 수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하나임은 그 사건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마하나임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내용의 배경을 봐야 합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후에 형에게 죽지 않으려고 외삼촌 집으로 피난을 갑니다. 피난을 가는 중에 밤에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늘과 연결된 사닥다리 사이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그 위에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을 너에게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일어난 후에 돌베개를 세우고 기름을 붓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합니다. 그 서원은 자신을 지켜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셔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또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이런 서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하심과 그 성취를 믿지 못하여 이렇게 서원한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서원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그 약속을 야곱에게도 신실하게 이루어내십니다. 외삼촌 집에서 두 아내를 위하여 14, 자신의 재산을 위하여 6, 2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면서 가산을 이루어냅니다. 이제 때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가라고 하십니다. 야곱이 야반도주를 하고 라반은 추격합니다.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라반과 야곱이 해어진 후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창세기 32:1~2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야곱이 길을 간다는 것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그래서 그곳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여호와의 군대를 만났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20년 동안 야곱을 돌보셔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2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면서 자기 꾀를 써서 네 아내와 여러 자식들과 많은 재산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군대가 야곱 가족과 재산을 지켜주기 위하여 왔습니까? 야곱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전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의 꾀로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곧 에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온갖 꾀를 써서 강을 건넌 후에 혼자 있다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씨름하다 허벅지 관절이 위골됩니다. 이때부터 야곱은 이스라엘이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마하나임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것은 야곱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야곱의 뜻이 깨어지는 장소입니다.

 

여호수아 5:13~15절입니다.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야곱이 만난 여호와의 군대와 여호수아가 만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야곱이나 여호수아의 개인적은 뜻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다시 봅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이 문장이 두 개로 나누어짐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여린들이 술람미 여인을 돌아오라고 네 번이나 말합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를 왕의 병거에 태워 가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이 말하기를 너희가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를 보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마하나임마하네라는 진지의 복수 형태라서 두 무리의 춤추는 자들로도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보았듯이 여호와의 군대를 만나서 깨어짐을 당하는 그런 모습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어떤 인물의 성공한 점을 좋아합니다. 물론 성경은 그런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기에 그렇게 보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야기해도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겨 복을 받았는가 하는 식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런 식의 설교를 들어왔고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일에 부름을 받아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요셉은 어떠냐고 말하겠지만 요셉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엄청난 환난을 당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의 입니다.

 

출애굽기 15:19~21절입니다. “19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을 그들 위에 되돌려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간지라 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가 먼저 찬양하고 화답으로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찬송하면서 소고 들고 춤을 춥니다. 야곱의 이야기, 여호수아의 이야기, 출애굽의 이야기,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다 여호와의 군대와 여호와의 전쟁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전쟁으로 빼낸 자들이 춤을 추면서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이 춤을 추는 자는 결코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하 6:15~16절입니다.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다윗이 정병 삼만 명을 동원하여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자신이 호위하여 가려고 하다가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갑니다. 다윗도 에봇을 입었습니다. 언약궤가 동행함을 인하여 다윗이 기뻐서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미갈이 업신여깁니다.

 

이어지는 20~23절입니다. 봉독오늘 본문과 연결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 안의 여인들이 술람미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나 왕의 사랑을 입고 고난을 받은 술람미는 마하나임의 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를 만난 자들의 공통점이 자아의 깨어짐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예루살렘 성 안의 여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 여인이 바로 미갈입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의 언약궤가 자기와 함께 함을 인하여 기뻐 뛰며 춤을 추는 마하나임의 춤마당을 이해 못한 미갈은 다윗의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왕비가 왕자를 생산 못하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신부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자들인데 이들은 자기가 부인되고 그리스도로만 기뻐 춤추는 자들입니다.

 

예레미야 3:14~16절입니다.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합니다. 나는 너희 남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아오라고 해도 돌아올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데려오시는데 성읍에서 하나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데리고 옵니다. 참으로 극소수입니다. 이들을 데려와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주신다고 합니다. 그 목자는 지식과 명철로 돌아온 자들을 양육하는데 그 때에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가면서 춤을 추었는데 이제는 그런 언약궤를 말하지 않고 언약의 완성인 새 언약의 때입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 새 언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자들은 춤추며 즐거워합니다(31:4) 이들은 다 고난의 흔적이 있습니다(31:8). 이들은 기뻐하며 춤을 춥니다(31:12~1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로 십자가로 인하여 기뻐하며 춤을 추는 자들이 마하나임의 춤을 추는 신부된 교회입니다.

 

누가복음 6:20~23절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예수님으로 인하여 미움을 받고 욕을 먹고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 기뻐 뛰놀라고 합니다. 이런 지혜를 누가 알겠습니까?

 

누가복음 7:31~35절입니다.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2)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참된 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낳은 자녀들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울고 웃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울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