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침 업무도 없고 하여 작심하고 몇 자 적어봅니다.ㅋㅋ 원래는 유대인 랍비가 한국 소금 맛을 보고 코셔 인증을 하였다는 아래 뉴스에 대해서 간단한 코멘트만 달려고 했는데, 글이 길어져서 별도로 올립니다.)-(준성 아빠의 글을 자유게시판에 옮겨놓습니다. ) 

 

현대 유대인들의 아래 뉴스와 같은 엄격한 음식, 정결 관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현대로 올수록 확대되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이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과 규례를 세분화하여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조상들이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이고, 현재까지 로마의 압제를 받는 것은 아직 바벨론의 포로 상태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 출애굽에서 약속한 거룩한 제사장나라가 되자고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소명의식으로 충만하였습니다.(취지야 좋지요...)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이야기한 제사장 나라는 제사장의 역할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인자와 자비가 표현된 율법을 열방에게도 가르쳐서 여호와를 알게 하고,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께 헌신하는데 중개자 역할을 하고, 그래서 모든 열방이 구원을 받는, 이전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을 내다본 말씀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하나가 전부 제사장처럼 행동하고 구별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생각하고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제사장에게만 규정된 제사 드리기 전 손 씻는 규례를 자신들이 제사장이라도 되는 양 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손을 씻은 것이구요.

 

그러나, 문제는 이런 유대인들이 율법의 규례만 따지고, 할례를 강조하고 구전 전통을 고수하려고 한 반면, 실제 율법(율법의 정신)은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독설도 이런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문제 삼은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그들은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였고, 이웃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율법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율법의 형식을 지키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멍에가 되고, 정죄의 구실이 되고, 죄인 취급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의 의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부끄러운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교만이 죄입니다. 그 모든 기도와 구제 행위와 예배가 하나님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보여 자랑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 율법을 지킬 능력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실상을 몰랐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살지만 인간이 연약하여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과 "그 율법이 사람들에게 그 율법을 지킬 능력까지 주지는 않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고, 또한 노력하였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율법은 죄에 이용만 당하였습니다. 죄가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탐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문제였고, 죄의 세력이 문제였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현대 유대인들은 지금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는 새언약을 예언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변화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변화는 율법이 줄 수 없는 부분이고, 스스로의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새 영이 부어져야만 합니다.

 

이 새 영이 오기 위해서는 먼저, 메시야가 오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를 통하여 성령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믿을 때 성령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은 문자적인 율법으로는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으로만 마음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주어지는 것은 율법이 아니고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입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성취하시고, 완성하셨으며, 그후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율법 규정대로 할례를 받거나 음식 규정을 지키거나 정결례를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살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아 율법을 완성하셨듯이 성도들도 율법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이 부럽나요? 아니면, 멍에가 되나요? 현대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방인들을 더러운, 부정한 사람 취급합니다. 그들의 강한 선민의식이 오히려 복음에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주께로 돌아오는 날이 오겠지요. 그날이 아마?

 

 

추신

 

현재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메시야를 고대하면서 통곡하고 있습니다. 오신 메시야를 거절하고, 군사적인 메시야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으면서 율법의 규례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문자적으로 읽으니 그들은 고난 받는 메시야 사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 구절들도 그 종을 자신들이 고난 받은 사실에 비추어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성령 받고 나니, 예수님이 고난 받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 당시에 그 사실을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첫 시점이 물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종말에 의인들 전체가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사상은 있었지만 개인이 홀로 부활할 것이라는 사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님이 홀로 부활하셨고, 이를 목격한 제자들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역사 가운데서 이런 일이!!

 

유대인들은 신명기 21장 23절의 구절에 의해,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께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생각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 동일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또한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시니 이제야 이것을 역사적 현실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셔야만 하였는가? 왜 하나님은 십자가의 저주, 율법의 저주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시면서 예수님을 옳다고 인정해주셨는가? 제자들은 충격과 경이에서 차츰 며칠 뒤로 돌아 가보니, 최후의 만찬이 생각이 나고, 그 뒤로 돌아 가보니 사역 기간 동안 행한 말씀과 행동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새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죽음,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자신들의 죄 문제가 처리된 방식에 놀랐고, 또한 부활을 보면서 자신들의 미래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 제자들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곡의 벽을 보면서 무엇을 느껴야 할까요? 이스라엘의 회복? 물론 이스라엘의 회복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이스라엘 국가 때문에 핍박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통곡 소리도 귀를 기울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믿지 않는다고 외면할 것이 아니고요. 오히려 유대인들도 예수 믿지 않습니다...

 

아! 핍박 받은 자가 다시 핍박 하는 역사의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