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기독교연합회의 질문을 받고 답을 한지 5개월이 되었는데 아직 재 질문이 없습니다.

재질문이 오면 그것까지 답하여 올리려고 하였는데 우선 일차 질문과 답변을 올립니다.

그리고 복음의 변증이라서 질문과 답변이지만 복음 칼럼란에 올려놓습니다.)


수신: 창원기독교연합회 이단대책위원회

발신: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일시: 2017323

참조: 질문과 답변의 표시를 위하여 글자체를 바꾸어 작성하였습니다.

 

창원기독교 연합회 이단 대책위원회(이하 귀 단체로 표시) 이름으로 보낸 공문을 잘 받았습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제목: 창원기독교연합회 이단대책 결의 사항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아래 결의 사항을 통보합니다.

 

-아래-

 

1. 일시: 201739() 저녁 710, 장소: 한사랑교회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설교 유투브를 통해 보고 들은 것은 각각 보고하고 토론하다.

 

2. 결의 내용

1) 본인에게 서신으로 질의하여 답변을 받기로 하다.

2) 그 후 소명하여 설명할 기회를 주기로 하다.

3) 위의 사항에 불응시는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고 지역교계 신문에 결과를

게재하기로 하다.

 

귀 단체가 이러한 결의사항을 보내면서 귀 단체의 어떠한 정관과 회칙에 근거한 것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귀 단체가 저에게 이런 질의를 할 권리가 있는지 제가 답변할 의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귀 단체에 가입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귀 단체는 제가 소속이 되어 있는 노회로 이단성을 조사하여 보고하여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가 반려되자 다시 이런 공문을 저에게 보냈습니다. 공문의 결의 내용을 보면 제가 불응 시에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고 지역신문에 게재한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12가지 질문을 통하여 무엇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고 신문에 게재한다고 한 것입니까? 질문에 답을 하겠지만 12가지 질문은 구체적인 성경구절이나 신학적인 내용들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 질문으로 무엇을 어떻게 한 사람의 신학사상의 이단성을 밝혀서 게재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제가 취지문과 질문을 보고 답변을 하겠지만 만약에 신문에 그 결과를 게재한다면 반드시 이 질문과 답변 전문을 게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도 응분의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과 답변은 늘푸른교회 홈페이지(www.evergreen17.com)에 올리겠습니다.

 

 

 

 

질의서

(취지) 이장우 목사 귀하를 비난, 비판,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애매하고 불분명한 것들을 명료화하여 귀하나 성도들이나 지역교회가 오해 내지는 부정적 피해를 막기 위함입니다. 창원기독교연합회 이단대책위원회에서 귀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중심으로 질의서를 보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 성실하게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직접 대면하여 질의할 수도 있습니다.”

 

이 취지문은 전에 노회로 보낸 공문에서 이단성을 조사하여 달라는 말은 빠졌습니다. 이런 질문자체가 이단으로 몰고 가기 위한 수순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 취지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을 하고자 합니다. 저의 답변이 길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정확하게 어떤 사안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답변이 미흡하면 이번에 보낸 질의서보다 더 정밀하고 정확한 질문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추가 질문에 답변을 하거나, 대면하여 질의응답을 하거나 간에, 그 내용을 신문에 게재를 한다면 전문을 올리실 것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행되는 모든 내용은 늘푸른교회 홈페이지에 그대로 올리겠습니다. 그래야 취지문대로 저와 성도와 지역교회의 오해나 부정적인 피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저의 전체적인 신학적인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귀 단체의 이단 대책 위원회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지, 그 신학의 바탕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창원기독교 연합회라면 개신교의 모든 교단과 교파로 구성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단대책위원들 중에 칼빈주의자도 있을 수 있고, 알미니안도 있을 수 있고, WCC에 가입된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단대책위원들조차 신학사상들이 다를 수 있기에 저의 신학사상의 배경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고신교단에서 자랐습니다. 청년 때 까지 고신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신학교를 합동교단으로 가서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 배운 내용은 개혁주의입니다. 개혁주의 원리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고 칼빈주의 오대교리 전전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이 저의 신학적인 배경입니다. 이제 귀 단체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A. 21:12~17 “성전과 강도의 소굴설교 동영상을 중심으로

1. 교회가 선한 일(구제나 선교)를 위하여 평일에 교회의 부속 건물에서 바자회와 같은 행사를 통해 성도들의 지원을 받는 것이 장사를 위한 사업이며, 강도의 소굴로 생각하십니까?

 

답변: 설교를 제대로 듣지 않은 질문입니다. 유투브 동영상을 보셨다고 하는데 다시 한 번 설교를 들어보시든지, 아니면 늘푸른교회 홈페이지의 설교 영상과 설교 원고를 다시 보시기바랍니다. 늘푸른교회 홈페이지는 회원가입 없이 누구나 볼 수가 있습니다. 저의 모든 설교는 원고나 음성이나 동영상이 전부다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설교를 제대로 보신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체 질문을 저의 설교 세편에서 질문을 하셨는데, 저는 늘푸른 교회에서 18년 동안 주일 오전, 오후, 수요일 설교만 해도 약 7,500편의 강해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신학적 사상을 평가하시려면 설교 세편, 그것도 동영상 세 개를 보고서 평가하는 것이 전체를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신학적 배경을 잠시 설명한 것이며, 저의 설교 원고를 다시 읽어보시면 이런 질문이 설교의 내용과 방향과 목적이 전혀 아님을 알 것입니다.

 

참고로 이 본문의 설교 결론부분만 옮겨놓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적의 소굴이 된 곳을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모든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듯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마음을 쫓아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만 우리 안에 오롯이 담겨지는 성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 귀하가 섬기는 교회당에서 금요일에 성경공부를 한다는데 그 곳에 다른 교회의 교인들이 참석할 때에 무조건 타 교인들을 교육할 수 있습니까? 그 교인들이 속한 교회 담임 목사의 허락 없이 타 교회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이 목회 윤리 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답변: 제가 타 교회 교인들을 금요일 성경공부에 오라고 한 적도 없고, 누가 와서 참석하고 가는지 확인하지도 않습니다. 와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 혼자서 앞에서 복음을 전하고 나면 우리 교인들도 뿔뿔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는 우리 교인을 위하여 마련한 시간인데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오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을 교육시켜 우리교회 교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등록도 일체 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교인들이 바른 복음을 전하는 다른 교회의 설교나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복음의 방향성이 같다면 얼마든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3. 신약성경에는 제비뽑기가 없다고 하였는데 행1:26절에는 제비뽑기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합동총회가 제비뽑기를 하는 것은 총회가 타락한 증거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신약 성경에 제비뽑기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26절에서 사도들이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제비 뽑은 것은 성령이 임하기 전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서 이런 제비뽑는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총회가 타락하여 금권선거를 하였기에 제비뽑기를 한 것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서로 총회장을 하지 않으려고 고사한 신앙선배들이 있는 교단입니다. 그런데 총회장 선거에 공공연히 돈 봉투가 돌아다니는 것을 근절하기 위하여 자구책으로 마련한 것이 제비뽑기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것이며 이런 지적에 대하여서는 회개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비뽑기라도 해서 부정 선거를 막아야 할 정도로 신앙양심이 해이하여 진 것을 합동 교단에 속한 목사의 한 사람으로 심히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4. 일반교회 지도자들로부터 고 김성수 목사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이 많은데 귀하는 김성수 목사를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고 김성수 목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한 사람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한 두 편의 설교를 듣고 평가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가 있는 자들입니다. 어느 누구의 신학사상도, 설교도 완벽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보는 본인들의 신학적인 전제들로 인하여 나누어지는 것이기에 이것을 어떻게 생각 하느냐는 질문은 논점을 흐리는 질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적시하여 이런 내용은 어떻게 보느냐고 물으면 저의 신학적인 견해를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다는 답변 외에는 답할 내용이 없는 질문이 됩니다.

 

5. 특히 김성수 목사의 발언 중 한국교회 목사들은 양복 입은 무당이라고 표현을 하였다고 말하는데 정말 한국교회 목사들이 양복 입은 무당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한 사람의 신학사상을 논하려면 질문자체도 엄밀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설교원고 중에 이 질문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만 목사라는 자가 세상의 복이나 빌어준다면 양복 입은 무당이라는 말을 들어도 마땅하다고 봅니다. 무당들은 원화소복(遠禍召福)을 빌어줍니다. 이들의 복과 화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내용과 다릅니다. 성경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 최고의 복입니다. 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이 화이며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을 보면 성도가 날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은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주란 그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생명과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딤후1:10). 그런데 예수님 오시는 그 날에 불에 태워져 사라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복이라고 빌어주는 목사라면 무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요일2:15~16).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예수 믿는 자들이 받는 복이라고 한다면 이런 모습이 바로 양복 입은 무당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으로 예수님을 유혹한 자가 사탄입니다(4:8,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리끼고 미련한 것입니다(고전1:23). 결코 세상 사람들이 환영할 내용이 아닙니다. 오직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추구한다면 땅의 것들을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양보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정말로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저의 설교 전반에 흐르고 있는 사상입니다. 우리의 이런 질의응답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저는 이런 기회를 통하여서도 한국교회가 하늘의 것을 찾고 구하자는 기회가 되기에 이런 응답을 합니다. 이러한 내용의 근거를 성경 두 곳만 본문 그대로 인용합니다.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1)진노가 임하느니라

 

이 두 곳의 말씀만이 아니라 성경전체를 통하여보면 무당과 같은 짓을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입에 무엇을 채워주면 평강을 외치지만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않으면 전쟁을 말하는 자들이 무당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이스라엘의 선지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3:5). 이런 말씀을 근거로 목사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무당들이 하는 짓과 같은 모습이라면 얼마든지 양복 입은 무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한국교회 목사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귀 단체의 질문은 이렇게 엮어가려고 합니다. 질문에서 한국교회 목사들이 양복 입은 무당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는 한국교회 목사들이 다 양복 입은 무당들인지, 일부가 그런지, 다수가 그런지를 함의하지 않은 두루뭉술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양복 입은 무당이라는 이 말 하나를 설명하는 것도 이렇게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런 분들은 언제나 숨겨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7:14). 예수님이 오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18:8). 이러한 말씀을 근거로 보면 양복 입은 무당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분명히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 주일에 대하여 일반 교회의 주일성수 개념과 대치되는 발언을 하는데 과연 전통교회 주일성수는 잘못된 것입니까? 어떤 다른 날이라도 주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김 목사의 주일(가끔 귀하는 일요일이라고도 함) 예배에 대한 견해는 어떠합니까?

 

답변: 고 김성수 목사와 연결하여 세 번이나 질문을 하시는데 제가 고 김성수 목사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약 15년 전에 미국에 있던 고 김성수 목사가 저의 설교원고 요한복음, 창세기, 이사야 세권을 구입해 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을 질문하셨는데 적어도 우리가 개혁주의라면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주일(主日)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주의 날이 네 번 나오고(살전5:2, 살후2:2, 벧후3:10, 1:10) 안식 후 첫날이 여섯 번 나옵니다(28:1, 16:2,9 24:1, 20:1, 20:19). 그리고 매주의 첫날이 나옵니다(고전16:2). 이러한 구절들을 일일이 찾아서 설명을 하려면 책을 한권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구절들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는 여러분들도 찾아보시고 해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주의 날로 언급된 세 번의 내용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 또는 주의 날과 같은 의미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날 또는 주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여호와 날 곧 주의 날은 메시아가 오시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 메시아의 날이 그들에게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된다고 선지자들은 무수히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들까지 일일이 성경을 다 찾아가면서 증거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주의 날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신약에서 주의 날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나오는 계시록 1:10절의 말씀은 문자대로 해석하면 주께 속한 날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주의 영광을 뵙고 계시를 받는 날이기에 주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과 연결시켜서 교회가 주일이라고 사용하지만 성경에서 주의 날에 대하여 증언하는 내용이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제자들이 찾아간 날을 말합니다. 그 날에 부활하신 것이며, 안식 후 첫날의 마지막 구절인 요한복음 20:19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신 날입니다. 이들은 예배를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 주님이 찾아가신 날입니다.

 

그리고 매주 첫날은 고린도전서 16:2절입니다. 매주라는 말은 매주(每週)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의 첫날이라는 의미이지 주()의 날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이기에,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하여 귀하게 여기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만 주의 날이라고 하면 나머지는 나의 날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만유란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날을 귀하게 여기거나 아니거나 하는 것은 다음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4:5~6절입니다.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여러분의 교인 가운데 주일날 일해야만 하거나, 당직을 서야하는 직장이라면 어떻게 권면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으로 권면을 합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날과 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나는 수요일을 귀하여 여기겠다고 생각하면 그 날을 귀하게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다 귀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2:16~19절입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구약의 날과 달과 절기들이 그림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기에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그림자를 붙들게 되면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놓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4:10~11절입니다.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라디아 교회가 복음을 받고 나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율법 조문을 지켜야 한다고 하니 흔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인용합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생명의 말씀사 상편 563~564페이지의 소제목 33. 무슨 까닭에 일요일을 지키는가? 이 내용을 보면 일요일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을 방어하려고 답변을 합니다. 그러나 그 답변의 요지는 날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교회내의 질서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같은 책 561페이지의 소제목 31번을 보면 안식일 계명의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34번의 성일의 영적 준수에 대하여 일부분만 인용합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우리가 말하는 주일(主日)로 안식일을 대신한 데는 신중한 고려가 없지 않았다. 고대의 안식일이 대표한 저 진정한 안식은 주의 부활에서 그 목적이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끝낸 그 날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림자였던 의식을 고수(固守)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가 된다. 나는 일곱이라는 수를 고집해서 교회를 거기 예속 시키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날에 엄숙히 모이는 교회들도 미신만 없으면 나는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말은 또 다른 날도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이며 이러한 견해는 위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이 충분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6번의 질문은 충분한 답이 되었다고 봅니다.

 

7. 십자가가 완료다. 더 이상 행위가 필요 없다는 말에 대해 설명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서신서에서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도 실천, 행함에 대해 수많은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 없지만 구원이 완료되었으니 행함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까? 구원 이후의 성화의 과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질문도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제가 어느 부분에서 더 이상의 행위가 필요 없다고 하였는지 근거를 들어서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어느 구절에서 우리의 실천과 행함을 강조하는지 성경의 본문을 언급하고 질문을 하면 그 본문에 대하여 인간의 실천과 행함을 말하는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되는 것인지, 주님의 자기 약속을 친히 이루심의 문제인지, 앞뒤의 문맥과 접속사와 조사를 따라가 보면 자연스럽게 은혜로 귀결이 됩니다.

 

우선 이 질문에서 십자가가 완료라고 하는 이 내용이 무엇인지 답변을 드리고 성화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언약하신 내용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러한 언약은 하나님의 자기 아들의 공로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이미 영원 전에 언약하신 것입니다(딤후1:9~10, 1:1~3). 이러한 언약을 따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런 창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하였습니다(1:1~3, 1:15~16). 이 창조역사 안에서도 하나님은 언약을 하십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언약하시고 이미 구약에서 새 언약을 말씀하십니다(31:31). 그러므로 영원 전 언약과 구약의 모든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을 믿는 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며, 단번에 영원히 온전하게 거룩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다 이루심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9:30절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 영혼이 떠나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보면 그 영을 넘겨주셨다로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쿰란 출판사에서 나온 원문번역주석 신약성경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그 영을 넘겨받은 자들은 그 다 이루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 다 이루심으로 연결된 그 영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묵시적으로 완료된 것입니다.

 

묵시적이라는 말은 시간성을 배제한 용어입니다. 이런 묵시적 해석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씀이나(8:56~58)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였다는 말씀에서(22:43)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도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씀도(3:11) 묵시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란 천지창조의 목적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며, 이 역사의 완성도 그 십자가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게 되면 이미 이 역사를 종말의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사도들의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은 세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이 역사는 무엇인지 물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증거 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1:4).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2:36)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된 사건이 이미 종말임을 요엘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2:17).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것 자체가 세상을 종말론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과 밖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요한복음에서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시는 일이 무엇인지 세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3:14~15절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야 그를 믿는 자가 영생을 얻게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도 십자가로 이루어내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8:28에서는 예수님이 들리심으로 내가 그 인줄 알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가 그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출애굽기 3: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한 그 히브리어를 헬라어인 70인 역으로 번역할 때에 스스로 있는 자에고 에이미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그 분,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은 그 분이 여호와의 모든 언약을 이루어내신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으로 그 영이 임한 자들은 이러한 복음의 참 지식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2:32절에 내가 들리면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겠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에 저주 받아 죽은 십자가입니다. 이방인들이 볼 때에 로마를 반역하다가 처형당한 것으로 보이는 미련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거리끼고 미련한 십자가에 사람들은 침을 뱉고 돌아섰습니다. 고개를 돌이질 하면서 돌아섰습니다. 그런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들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가시는 것도 십자가의 완성과 그 완성으로 인하여 넘겨주신 주의 영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일입니다. 구원과 구원 이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들이 다 주님의 구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한 내용이 성화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화의 개념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화는 구원 받은 후에 성도가 이루어가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화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구별하여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주체가 되는지, 사람이 주체가 되는지, 성령과 사람이 협력하는지를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별하라면 저는 첫 번 째 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울사도가 자신이 어떤 사도들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그런 수고는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고전15:10). 물론 어떤 곳에서는 자기도 힘을 다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힘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이라고 합니다(4:3, 벧전4:11).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체가 되셔서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를 이끌어 가시면 그에게서 나오는 열매들은 그 사람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이기에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무엇을 다 이루었는지 더욱 분명하게 알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신약과 서신에서 이 내용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천지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디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하나님의 약속을 그 아들이 다 이루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도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5:6~10). 이것이 십자가로 다 이루신 일이 오늘에도 그 영을 넘겨주심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십자가의 완성은 우리를 단번에 영원토록 거룩하게 하시며 온전하게 하셨습니다(10:10~14).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모세 언약을 어긴 자도 두 세 증인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 언약을 십자가로 완성하심으로 그 모든 언약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받을 형벌이 얼마나 무섭겠는지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들이 십자가로 다 이루심의 내용입니다. 그 다 이루심을 이 역사 속에서 펼쳐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입니다(고전1:30).

 

설교자는 말씀 사역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전하기도 바쁜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의 신학사상을 검증한다고, 이단성이 있다고 노회로 공문을 발송하고, 저에게도 이런 공문을 발송하여,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에게 성가시게 하는 것도 있지만, 저는 이 답변을 하면서 오히려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내용을 다시 확정하는 기회가 되니 저에게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여러분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8. 교회의 안내위원들에게 장사하려고 오는 사람들에게 도둑놈 소굴, 강도 소굴이라고 말하라고 하는데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 교회를 싸잡아 강도 소굴이라고 들릴 오해 소지가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이런 질문을 하신다는 것이 저의 설교를 잘못 들었거나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 설교의 문맥을 따라 구약 성경의 이사야 1장과 예레미야 7장과 예수님의 말씀을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자연스러운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이 설교의 결론을 이미 1번 질문의 결론에서 인용하여 두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B. 21:18~22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1. 일반교회 목사들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하여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극렬히 비난하는데 귀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일반 교회목사들의 설교는 다 잘못 되었고 귀하의 설교만이 옳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데 이러한 비판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

?

 

답변: 제가 복음을 전함으로 어떤 사람이 믿고 구원에 이르렀다고 하면 그것은 저의 능력이 결코 아니라 주께서 단지 도구로 사용하였을 뿐이라고 늘 말합니다. 제가 교인들보다 훨씬 더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목사가 되어 성경을 보니 더욱 죄가 어떠한지를 알겠다고 합니다. 성경을 보지 않으면 죄에 대한 생각이 좀 덜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죄와 의와 세상에 대하여 책망을 하십니다(16:8).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는데 그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16:9).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대단한 무슨 일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나의 야망을 믿음으로 포장하거나, 나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면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무엇을 회개하라고 하였습니까?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선생이라는 자들이 천국 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나, 세례요한의 회개의 외침이나, 사도들이 회개하라는 말씀은 자기의 행위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을 믿으라는 말씀이 주 된 회개의 선포입니다.

 

2.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에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만드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신부 된 교회가 탄생할 것을 보여준다는 표현의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5:39). 그러므로 제가 보는 성경의 해석 기준은 이 성경의 본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서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하나도 없고 남녀의 사랑이야기만 있어도,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의 사랑이야기로 풀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처럼 부부사이의 성관계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것이 주의 영이 임한 구약의 선지자들이며 신약의 사도들입니다(벧전1:10~11).

 

그러므로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입니다(5:14). 물론 이 문맥은 아담 안에서 모든 자가 죽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가 생명을 얻을 것을 말씀합니다만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그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어 내십니다. 이 장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창에 옆구리가 찔려서 물과 피를 흘리신 것을(19:34) 연결하였다고 알레고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도마에게도 자신의 허리의 창 자국을 보라고 하셨습니다(20:27). 교회가 무엇으로 탄생이 됩니까? 흔히 신학자들이 오순절 성령이 임함으로 교회가 탄생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보았듯이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그 영을 넘겨주심이 오순절 성령 임함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교회가 탄생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일서의 내용으로 답을 대신합니다.

 

요한일서 5:4~12절입니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1)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C. 9:18~26 누구의 믿음인가?

1. 믿기만 하라. 믿으면 된다는 말을 믿음만능주의라고 하면서 믿음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교회가 가르치는 믿음이 믿음의 내용과 구별되는 것입니까? 즉 믿음도 이분법으로 표현해야 합니까? 믿음이라는 그 자체가 믿음의 내용(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부활)을 떠나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고 말씀하셨는데 혈루증 여인의 믿음이 예수님께로부터 온 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여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믿음(이런 의미에서 네 믿음)이 곧 여인의 믿음이라고 할 때에 믿기만 하라, 믿으면 된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표현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믿음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믿는다는 그런 믿음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믿는다는 것과 반드시 구별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조상들은 천지신명을 믿고 빌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지극한 정성을 바쳐서 빌면 하늘이 감동한다고 믿고 빌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형태가 교회에 와서 부르는 이름만 하나님으로 바뀌었지 그 비는 내용이 전과 같다면 이런 믿음을 성경이 인정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내용이 얼마든지 다를 수가 있습니다. 마침 위에서 인용한 요한 일서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무엇이며 그 아들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아지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너무나 자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믿음의 내용을 말씀드릴 때에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을 예로 들어서 말씀드립니다. 믿음의 사람들 중에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아벨입니다. 여러 설교자들이 예배에 성공하여 인생에 성공하자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최초로 예배에 성공한 아벨은 형에 의하여 살해당합니다. 두 번째 믿음의 사람은 에녹입니다. 그 당시의 평균나이의 삼분의 일도 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하늘로 데려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기에 행방불멸이 되었거나 객사 하였다고 볼 것입니다. 세 번째 믿음의 사람은 노아입니다. 사람들마다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기에 몰두하며 사는데 노아는 백년을 넘게 방주만 만들고 살아갑니다.

 

이어지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이 세상에서 성공을 꿈꾼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향하여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한 성을 예비하여 두셨다고 합니다(11:13~16). 믿음이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면 누가 소망하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내용이기에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8:24~25). 그런데 우리는 그런 믿음조차 없기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 안에서 대신 기도하시고(8:26), 예수님께서 하늘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8:34).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일하심을 믿는 것이 성령이 임하여 믿게 되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은 이미 의롭다 함과 영화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8:30).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 계시된 믿음이 아니라 자기 의지나 자기 마음의 상상을 따른 믿음이 라면 성경에 계시된 믿음이 아니기에 분명히 다른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도 다른 복음이 있고, 예수도 다른 예수가 있고, 영도 다른 영이 있는 것입니다(고후4:11). 그러므로 예수, 복음, 영이라고 쓴다고 하여 다 같은 내용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국어사전적 의미의 뜻이 아니라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 하나의 뜻을 제대로 확인하려면 성경에 나오는 그 단어의 모든 용례를 다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 저주가 무엇인지, 기도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영생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영생의 세상적인 뜻은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뜻으로 본다면 영생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영생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영생의 의미를 다 찾아보면 단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담겨져야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지옥에서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영생이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합니다(17:3).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 만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라고 합니다(6:22~59).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믿음으로 살면 세상에서 잘 된다고 하는 그런 믿음과,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의 내용과 비교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그 좌우편으로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신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보시기 바랍니다. 다 좁은 문 좁은 길로 갔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바울사도의 고난과 그 육체의 가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일을 통하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믿음이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믿음입니다.

 

고린도후서 1:8~9절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성령이 충만하여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도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엄청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까? 왜 살 소망까지 끊어져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살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자기를 의지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2:8). 12해 혈루 증을 앓은 여인의 믿음도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믿음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11:36).

 

2. 12해 혈루증, 한 관리의 딸이 12살이라는 기록에서 12는 하나님의 아들의 수라고 말하였는데 성경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답변: 12해 혈루증과 관리의 딸 12살을 하나님의 아들의 수라고 말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어디에서 듣고 본 것인지 근거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저의 답변을 마칩니다. 부족하다면 다시 질문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다시 질문하실 때에는 저의 설교의 어느 부분인지 명확한 근거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하실 때에도 분명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의 원리 중에 가장 중요한 원리는 오직 성경입니다. 중세 타락한 가톨릭은 교황의 어록과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동등 내지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타락이 가속이 된 것입니다. 이런 구교에서 개혁한 가장 중요한 원리가 오직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혁주의에 속한 목사라면 그 어떤 것보다 성경을 가장 우위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긴 답변 읽으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