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 3장1~13)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파루시아)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오늘은 예수의 영적 임재( 파루시아)를 믿게되면 왜 예수의 가시적 재림에 대하여 등한시하게 되고 소홀히 하게
되는지, 이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전 시간엔, 예수의 영적임재를 확신하지 못하고 종말론적인 재림신앙에 치우쳐 7년 대환란이니 공중재림 들림받는 휴거니 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올인하는 것도 바른신앙이 아님을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가시적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예수의 영적 임재로 재림은 완성 되었기에 또다시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요즘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묵상을 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사실은 몇년 전부터 이 가시적 재림에 나의 믿음과 태도에 대하여 점검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예수의 가시적 재림에 대하여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기 보다는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에
대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것이 내가 재림에 대한 균형잡힌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후 부터는 예수의 가시적 재림에 대하여 관심있게
살펴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번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님,과 '말씀 컨퍼런스, 나눔과 교제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더 깊이 성찰하게 된 계기가 되어 오늘 그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예수 재림을 역사의 클라이맥스(climax)인 동시에 마지막 정점을 이루는 한 사건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밀 휴거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재림의 사건을 두 단계로 나누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무리한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데 그러므로 공중재림이니 지상재림이니 재림을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 교회 이후로 수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모든 신학자들과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재림을 한 번에 일어나는 한가지 사건으로 해석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단계로 나누어서 재림하신다는 비밀 휴거 사상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최근의 세대주의 종마론자들이 주장하는 재림론이죠.
그런데 이런 주장들이 정설처럼 퍼지기 시작한 것은 성도의 휴거와 7년 대환란 그리고 666의 짐승의 표 등에 대하여 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오늘날 성도들에게 최고의 핫이슈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재림에 대한 용어를 자세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용어가 가져오는 혼란도 그런 태도를 갖게 하는데 일조를 했거든요!
신약 성경에서 예수 재림을 지칭하는 세가지 헬라어 원어와 의미
1. parousia(파루시아) ....................오심(coming), 도착(arrival), 임재(presence)
2. apokalupsis(아포칼립시스)............나타나심(revelation)
3. epiphaneia(에피파네이아).............출현(manifestation)

한 사건을 나타내는 3개의 헬라어를 가지고 비밀 휴거를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두 단계로 나누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헬라어 원어의 의미 속에 나타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요.
그들은 먼저 '파루시아, 즉, 비밀리에 오시는 비밀 재림이 있고, 7년 후에 아포칼립시스 또는 '에피파네이아. 즉,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재림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헬라어들은 두 단계로 나누어진 별개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헬라어로 표현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파루시아, '아포칼립시스, 그리고 '에피파네이아,는 모두 동일한 사건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이들 단어에는 7년간의 시간의 간격이 있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1),  parousia(파루시아):  강림
오늘 본문 (벧후3:4)"이르되 주께서 강림(파루시아)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살전4: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파루시아)하실 때까지"
(야5:7,8)(고전15:23)
(살전 3장13)"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파루시아)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 apokalupsis(아포칼립시스): 나타나심(revelation)
(살후 2:8)."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파루시아)하여 나타나심(아포칼립시스)으로 폐하시리라"
(벧전1: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그리스도 나타나실(아포칼립시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리"

(3), epiphaneia(에피파네이아) :출현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에피파네이아)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디도서 2장13)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은 자신이 친히 영광 중에 다시 임하셔서,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모든 것들을 밝혀 드러내시는 것을
가리켜서 재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크게 세가지 헬라어를 재림에 대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도안에 임재하는 것도 밤에 도적같이 임하는 재림이요.
마지막날에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 지상에 가시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아포칼립시스)도 재림입니다.
성도가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하여 사후에 영광의 주님을 대면하게 되던지 아니면 마지막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이 땅에서 데려감을 당하든지 그 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에피파네이아)을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을 모두 일컬어서
재림이라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그 용어가 각기 다르다 하여 '파루시아,는 영적 임재요,
가시적 재림은 '에피파네이아,라고 쉽게 단정지어 버리면 이 또한 성경이 의미하는 재림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기 떄문에혼란이 오게 되어 있었고요.
당연히 오류가 나타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예수의 비밀스런 임재를 '파루시아,로 단정하고 그리스도의 가시적 재림을 '파루시아,나 '아포칼립시스,로 해석하여 그 중간에 7년 대환난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이 바로 세대주의자들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예수의 재림을 이중재림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으며 임박한 심판, 그리고 재림론에 많은 혼란을
가져오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 용어를 꼭 한정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피루시아,와 '에피파네이아,를 같은 재림을 묘사하는 사건에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파루시아)하여 나타나심(에피파네이아)으로 폐하시리라"(살후2:8)

이처럼 휴거니 7년 대환란인 하면서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는 세대주의도 문제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라고 믿고 예수의 가시적 재림을 사모하거나 기다리지 않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과거에는 그와 비슷한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왜 이러한 예수의 가시적 재림을 등한시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느냐 하면, 이것도 재림에 대한 해석이 가져다 주는
그 인식에 문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림에 대한 나의 인식을 전반적으로 먼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재림 신앙에 대한 혼돈과 이해 부족이, 나로 하여금 영적 재림을 받아 들이기만 하면, 예수의 가시적 재림에 대해서는
등한시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었던 거 같습니다.
오히려 '지금 내 안에 주님이 오셨는데 또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재림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 알게 되면 이런 태도는 마치 구원의 즉각성과 점진성에 대하여 잘 몰랐을 때, 예수 믿으면 즉각 구원이 완성되는 건데, 뭐 아직 구원이 이루어 지지 않은 것처럼 미래적 구원을 이야기 하는 거야,
그거 믿음 없는거 아냐!,
구원의 완전성을 못 믿는거 아냐?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믿음 좋은 것이 아니라 치우침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실인즉, 즉각은 영적이고 묵시적인 것이고 실상은 아직 나의 실존은 죄로부터 그리고 육신의 나약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잖아요. 그 완성의 구원을 향하여 현재적인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와 같은 것이구나? 이걸 깨닫게 하시더리구요.
그런데 그때는 그런 태도가 아주 믿음 좋은 것으로만 보였고 내가 영적으로 깊이 있게 재림 신앙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재림도 이와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순절 성령으로인하여 성도 안에 임재한 것은 영으로 임한 것이요.
그런자들에게 최종 심판의 때에 가시적으로 드러나 보이시는 그 날까지 그 기간을 다 마지막 날 재림으로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재림은 영적임재로 시작하여 지금도 와 계신 것이고 앞으로 모든 만물을 심판하시기 위해 끝(텔로스)날 어느 정점에 등장하셔서 사단을 멸하고 사망을 없이 하시고 새하늘과 새땅을 가져오기 위해 나타나시는 것이 다 재림인 것입니니다.

그때 거듭난 성도, 예수를 내 안에 모신자들 즉 이미 와 있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고 있는 자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이 이점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이유!
(벧후3:10~13)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런데 예수의 영적 재림에 꽃혀 있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관으로 오시는 그 가시적 재림을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게 되면
그것은 심판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했는데, 왜 예수의 가시적 재림에 목을 매야 하느냐, 이거죠?
그건 불신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야, 이런 인식이 가시적 재림을 외면하게 되고 등한시 하게 된 이유인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재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세개의 성구를 보게 되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먼저 본다고 할 때,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에는 '블레포,가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요9:39, 41)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블레포)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블레포)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그런데 아래 세가지 성경구절에는 '블레포,가 아니라 '호라오,가 사용되었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9장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호라오)"

(계1장7)"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호라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일서 3장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호라오) 것이기 때문이니"

원래 이 '호라오,라는 원어는 아래 말씀에 사용된 것입니다.
(마태5: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것임이라"
(요14:9)"나를 본(호라오)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호라오)"

가시적 재림이란 용어가 주는 문제에 혼돈의 원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시적 (可視的)재림의 정확한 뜻이 무언가 찾아봤어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그런데 우리는 블레포 (눈으로 보는)만 생각했지 예수님은 '호라오, 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겁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호라오) 것이기 때문이니"(요한1서3:2)

우리가 가시적 (可視的)이라 해서 육신의 눈으로 보는(블레포)것만 생각했는데 마지막 정점에 심판관으로 나타날 때에는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호라오,하는 것입니다.
감히 누가 육의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겠어요.
보는 즉시 즉사할텐데요.
아마도 주님의 음성만으로도 두려움과 공포에 질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사모하고 기다려야 하는 그 마지막 가시적(호라오) 재림에서 그 가시적(可視的)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 눈으로 즉 '호라오,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느 누가 그 주님 사모하고 만나게 되는 것을 주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apokalupsis) 때에 너희에게
가져 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베드로전서1장13) 아멘~

~가시적(호라오) 재림을 기다리고 사모하라 했는데 그렇지 않을 때의 문제점은? 

(1),방종에 빠지게 됩니다.
(벧후 3:4~5)"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주님의 가시적 재림을 일부러 잊으려 하는 것은 방종의 기회로 삼기 위함입니다.
(벧후 2장1)"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기 마지막때 거짓 선생들은 재림과 종말론에 대한 실재성을 무시하고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몰입하게 하여 예수 재림에 대하여 소홀히 하게 만드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벧후3:14)"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주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을 바라보라 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하늘과 새땅입니다.

-또한 주를 바라는 자는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주님을 뵈올 것이란 확실한 소망을 가진 자는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더럽다는 건 무엇과의 관계성입니다.

(2),성도가 종말에 대한 긴박감과 다시 오시는 주님에 대한 기대가 없게 되면 침통과 우울감에 쉽게 빠집니다.
그런데 이런 자부심이 나를 예수그리스도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왠지 우울하고 이제는 더 기다릴 것이 없는 자신이 더 믿음 좋은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지만, 이와는 반대로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처럼 기뻐뛰며 주를 보듯이 다시 오시는 주님 맞을 생각은 없게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확실한 소망과 목표의식이 없으면 그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임재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 가운데 날마다 주님과의 교류를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가시적 재림에 대한 확실한 기대가 없는 상태에서 얼마든지 우울감에 빠질 수 있으며 자칫하면 의기소침 하게 되고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내 안에 보혜사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살전4:15~18)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파루시아)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파라칼레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님의 강림(파루시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서로 위로하기 위함인 것인데여
(18절)"위로하다"(파라칼레오) 이 단어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를 생각나게 하잖아요.
성령이 오셔서 성도를 위로하고 책망하고 권면하듯이 주님의 가시적 재림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지막 날 서로 위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내 안에 주님이 먼저 영으로 오시는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벧전4:17~18)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았음에도 그 몸의 구속을 기다리게 했으며,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삶을 살게 하셨다는 것인데요.
신부가 신랑을 맞이 하듯이 영광 중에 주님 만나 실제로 하나가 되는 거룩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신부(교회)가 혼인서약까지 하고, 성령의 보증도 있는데, 여러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치르지 않았다면
신부는 좀 섭섭 하겠죠.
결혼식 날을 받아 놓고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날을 사모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자체가 이상한 것이죠.

우리가 그날을 기다리게 함으로 성령이 오신 것은 주님 앞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고전1:7~9)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주님 나타나실 때에 영광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벧전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그래서 성도에게는 반드시 고난과 연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벧전4: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은 예수의 제자들 중에 제일 오래 살았던 사도였잖아요.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으로 이미 그 안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함에도 그는
(계22:20)"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간절한 바람으로 계시록을 마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 안에 오신 그스도의 임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오심은 세상에 대하여 우리 육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확실하게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지, 이젠 내 안에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확신을 갖고 담대함으로 세상을 살아 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의 강림은 제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의 재림의 필연성을 잊지 않고 자각하게 하여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죄와 상관 없는 그 나라로 이끌어 내야 우리가 더 이상 허무한데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그런 갈망으로 살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주님을 대면하여 만나기 전에 성도 안에 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자기한계를 절감케 되고 주 예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게 되는 것이 맞습니다.
이미 '파루지아, 내 안에 예수가 오셨는데 다시 재림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너무나 명백해 졌습니다.

이번에 이장우 목사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내가 하는 고민, 그리고 말씀에 대한 연구와 묵상의 주제가 거의 같은 것이었으며 전체적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고
말씀의 고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지금 현재 천국을 어떻게 맛보고 누리고 나누며 기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성경의 권면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 등, 많은 말씀을 나누게 된 것이 오늘 또
이런 말씀을 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성도 안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임재 '파루시아,를 믿고 있다면 당연히 지금도 인생 속에 오시고 계시며
마지막 끝날에 심판관으로 나타나실 그 가시적 재림에 대하여 소홀하게 대한다거나 외면하고 시쿤둥하는 것은
재림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재림에 대한 주님의 임재(파루시아)가 확실한지 다시한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영적이 임재가 마지막날 가시적 재림의 필요성을 강화시킬 뿐, 결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더욱 주님 실제로 만나는 그 영광의 날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벧후 3:10~13)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아멘~

https://youtu.be/9gCt_-O9Cu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