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애굽기14:13)

옛말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이 있죠. 과한 알레르기 반응을 빗대서 한 말이에요.놀랄만한 일도 아닌데

과거 경험 때문에 과민반응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저는 행위구원론에 대한 과만 알레르기가 있어요.
전에 알미니안 주의 보다 더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펠라기안주의 행위구원론의 골수 이단이죠.
여증에 10년 가까이 있었잖아요.(어떻게 나오게 되었어요?) 어떻게 나오게 되었냐고? 질문하면 뭐라 대답하겠어요~
정답은(주님의 부르심)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거에요.

행위주의 구원론은 성경적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 했죠.(깨닫기 까지 할때까지 해 보도록 하신다.)
이거 깨닫기 전에 하나님은 나 자신의 진면목을 보게 하십니다. 나 하는짓 그 행위를 보니까~그걸로 구원은 커녕 심판을 면키조차

어렵다는거, 이걸 실감나게 하는 겁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자기 분수를 알게 하신 것이죠.

똑같은 경험을 하는데 누군 그걸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거에요? 그것이 택하심과 부르심의 선택권이 주께 있음을~
그래서 거저 얻게 되는 구원을 주장하는 기독교에 우여곡절 꿑에 넘어오게 된 겁니다.

처음엔 너무 좋았는데-
이건 혹떼려다 혹 붙인격이라고나 할까요? 복받으려면 바쳐야 되고 응답 받으려면 메달려야 되고, 상급 받으려면 충성해야 되고
뭐 교회가 기복주의의 난장판 같았어요. 은사주의 신비주의는 굿판을 방불케 했고요. 교인들이 투기꾼처럼 보이는거 있죠.

(자기 야망과 목적을 놓고 금식기도 철야기도 작정기도 천일제단 가정제단) 야~이건 뭐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죠.

구원이 선물이라면, 구원을 거저 받을 수밖에 없는 거라면 말이죠.
인간 안에선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거잖아요~ 근데 뭐 선한 것이 나와서 성화도 되고 거룩해지고 상급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이거 대체 뭐가 잘못된거야?

우리가 행한대로 상급이 결정된다면, 그럼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개털모자 금면류관 진주목거리 차고 거들먹 될텐데 그런

꼴 보기 싫어서 예수 믿는건데, 이건 뭐지~ 거기도 서열이 계급이 있다는 거잖아요.

우리의 행위를 따라 성화가 된다면, 많이 성화된 사람 중간치 그리고 덜 성화된 사람이 있을거 아닙니까? 그럼 천국에도 차별과

차등이 존재한다는 건데요! 차라리 은혜 이야기를 말던가?
교회마다 이걸 부흥과 교회 성장의 마케팅으로 삼는겁니다. 40일 축복기도. 전도배가 운동. 입시를 위한 작정기도회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 (절간에서나 할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교회를 개척한 겁니다. 어느덧 나도 교회를 열었으니 부흥시켜야 하는 겁니다.
(꿈에도 교회부흥- 앉으나 서나 교회부흥) 부흥시키는 세미나에 죽어라 좇아 다녔죠?
처음 전뭐 목사 성령폭발 은사운동 세미나 윤모 목사 목회자 세미나 세미나에 쎄빠지게 다녀도 쎄빠지게 부흥이 안 되는거 있죠.

그런데 부흥한 교회를 보니깐, 대단한 언변가, 대단한 능력가 대단한 쇼맨쉽, 게그멘 빰치는 유머 장경동 목사,연예인
(교회부흥이 거의 인간에 능력에 좌지우지 되는것 이상했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교획가 좀 부흥될만 하면 문제가 생기는 거에요.
뭔노무 그리 신령한 자들이 많은지? '내가 기도해 봤는데요, '하나님의 뜻이 여기가 아닌가봐,
'내가 응답 받았거든요?, 뭔 응답을 그리고 잘 받는지 용해~이런 일 한번 겪으면 한달을 제대로 잠을 못잡니다.
그럼 또 사모는 뭔 죄가 있다고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봐요 교회에서 철야하면서 밤새 울어요.

교인 떠난다 해서 죽겠고, 밤새도록 사모 울어대서 죽을 맛이고, 이거 어디 사람 사는 곳이 아니고 '생지옥,입니다.
'에고 지지리 복도 없어서 나같은 목사 만나 갖고, 공연히 개척교회는 한다고 사모만 고생 시키는거 아닌가?' 이때 드는 생각

이것이 십자가 골고다의 길인가 보네..
또 이런 상각 드는거 있죠. 내가 못나서 저런 말성 부리는 교인들 붙여줘 하나님 날 훈련 시키는가보다. 감사해야지~
(강대상 앞에 엎어지는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니깐 교회 부흥할 수만 있으면 뭔 짓이든 하는 겁니다.
유명 연애인도 초청해서 간증도 하고 부흥 집회도 하고 뭐 주위에선 저 교횐 뜨거운 교회, 살아 있는 교회, 말씀이 있는 교회

그런데 부흥은 더 이상 안 되는 겁니다.  (근데 감사한 일이죠 그때 부흥했다면???)

~코너에 몰린 나~결국 하나님과 맞짱을 뜹니다.

 담판을 짓는 금식기도에 들어 가게 된 거죠. 내가 계속 목회의 길을 걸은 것인가? 개척교회 때려칠 건가?

 마지막으로 21일 금식기도 들어가서 일사각오 '죽으면 죽으리라, 지가 뭐 주기철 목사라도 된다고 말이죠. 능력 안 주면 죽어서

나오던지 하나님과 담판을 짓듣지

양평 금식기도원으로 직행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건방지고 탐욕에 취한 자의 몸부림이었죠. 금식이란 경건으로 포장된 자기 욕망의 분출구에 지나지 않아요.

교인들은 하나같이 응답받기 위한 기도제목을 갖고 뭐 맡겨놓은거 찾으러 온 사람들처럼 당당했어요. (그런 믿음은 그리 좋은지요)

그런데 나에게도 응답을 주신겁니다.
(1).금식을 살패하게 하심으로-(1시간 전에 파산을)
(2).자기의 교만성을 보게 하심으로-(2인 친구 목사가 찾아옴)
(3).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더라 (아버지뜻을 이루가 위해 오신 그리스도 성육신에 대하여 깨닫게 하심)

우린 이렇게 금식까지도 자기 의를 이루려는 탐심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인간의 사악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은 내가 회개할 자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하셨죠. 이제 내려가서 말씀 전하면 교회가 뒤집어질거 같아요?
다 된거 같고요. 금식 잘못해서 악령 받는다는거,실감하겠더라구요. 근데 얼마 못가서 결국 목회를 때려칩니다.
교회 하나 말아 먹은거죠. 그것이 주님의 응답이었어요~

계속적으로 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요?
왜 은혜를 이야기 하면서 부끄러운 구원을 언급할까? 나의 행위가 배제된 거저 얻게 되는 구원을 말하면서 말이죠어떻게 은혜를

이야기 하면서 부끄러운구원 당당한구원을 말할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 되었어요.그럼에도 하나같이 교회는 다 상급을 말하고 있다는 것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죠. 차등 상급론은 성경적이 아니라 주장하면 이상하게 보는 거에요.

~인터넷으로 '부끄러운 구원,에 대하여 검색해 봅니다.
(목사님 중에  한 한건 정도 성경적이 아니다).거의 전부가 차등 상급론을 믿고 있다는건데, 어디서 뭐가 잘못 되었는지 답답했죠.

아직 김성수 목사님 알기 전입니다.
얼마 후에 인터넷에서 여기 한번 설교 들어 보세요? 우연히 링크 하게 돠었고 첫 말씀 듣는 순간 이건 다른데,
백마를 타고 적진을 향해 진군 하시는 예수그리스도는 지금 세상이나 마귀를 공격하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검을 들고

여러분 속에 있는 죄를 공략하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내 자아가 깨지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수 없어요.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마귀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여기서 눈이 번쩍뜨이는 겁니다.)
이건 뭐가 달라도 달라~

그렇게 시작된 말씀을 들으며 거기에 빠져드는데, (그 무렵이 2009년 정도) 책도 그 즈음에 거의 완성 되었죠.
하루 10시간은 보통 잠자면서도 듣고, 아침에 일어나면서 듣고 가슴이 뻥 뚫리는거 같고, 시원하고 통쾌하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뼈속에 깊이 스며드는 말씀 이었습니다.

~서서히 부작용 같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다.
1).세상에 대한 야망과 꿈이 없어지면서 자꾸 염세적으로 되어 가더라!
2).구원 받았으니 아무것도 안해도 상관 없잖아? 한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
    (기도 전도 성경보는거 예배) 행위가 올 스톱이 되어 버립니다.
3).성도는 심판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거잖아요. 그럼 막살아도 되는거 아냐? ~이런 극단주의 치우침의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서 그렇게 믿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양 스스로 착각에 빠지기도 했엇죠.

이처럼 김목사님 설교를 듣게 되면서 진의와 다르게 가장 많은 오해를 하는 세 가지 씨리즈로 글을 올린 적이 있지요.
(1).막살아도 되는거 아닌가?

(2).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거 아닌가?

(3).자꾸 허무주의 염세주의로 흐르는거 아닌가?

저 또한 어김없이 이런 오해의 과정을 거쳐 오늘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동안 이것이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네 하며 이것이 진리가 된 자들의 세상을 보는 초연함 아닐까? 달관의 경지 아닐까?

그리 생각하며 자유와 방종을 혼동하기도 했었죠.그렇게 달관이란 이유로 또는 체념이란 이유로 모든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일체 손을 놓고 그저 설교만 듣는 것이 어떤 나만의 깨달음에 이른 것처럼 그리 생각도는거 있죠.

뭐 근래에는 늘푸른 교회와 대구서머나를 알게 하시어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보게 하시고 또 채워가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나님의 사랑스런 인도 하심이라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모든 것을 나의 시각으로만 보게 됩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저건 잘못된 거다. 내 의를 챙기려는 자존심의 발로다. 이렇게말입니다. 상당히 비판적 관점으로 변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저 가만히 그분의 처분을 조용히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최고로 성숙된 믿음 인양, 그리 생각 되는거 있죠.

전도하려는 것도 공연히 설쳐 대는 것처럼 보이고요. 봉사 하는 것도 공연히 나대는것 같고요. 뭐든 열심을 내서 몸을 움직여

 행동하려는 것마다 저거 자기 의를 챙기려 하는거 아냐?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게되는 겁니다.

저건 아직 덜 깨달아서 그러는 거겠지~
뭐가 부족해서 저리 설치는 거야~'조용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이렇듯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화들짝 놀라게 되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왜 이러지? 이런 고민 누구나 한번씩 하잖아요?
나는 진리를 알면 알수록 어느덧 머리만 커져가는 가분수 같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신을 발견하면서 고통스런

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든 지식으로 나를 직시하기를 원하시는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에 바빴던 겁니다.

기도생활은 내가 구차하게 하나님께 구할 것이 더 이상 없어지니 기도 자체가 올 스톱 되고 마는 거에요.
말씀을 보는 시간보다 설교를 듣는 시간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고, 전도와 선교에 대한 소명보다는 이 영역은 내가 다루어야 할

영역이 아닌거야~하면서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부분이잖아 그리 정당화 시키는거 있죠. 내 관심 밖 분야로 소홀히 취급하게 되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이거이 믿음 좋은 건지, 방심인지 헷갈리기까지 하는겁니다.

물론 기도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죠,
나의 삶 전체, 그리고 호흡 자체가 기도요.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진리임을 깨닫지만, 입술로 드리는 기도 ,

전도 생활이 소홀해 지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겁니다. 뭐 입을 열어 구하려 치면. 뭐 딱히 구할 것이 없는 겁니다.
(철이 들어서 그런건가요?)

전도할 의욕 보다는 이걸 누가 깨닫는다고, 차라리 허공에 외치는 것이 더 낫지 그리 생각이 드는거 있죠.
(전도 하다가 복음 깨닫는 자가 나타나면 도리어 내가 놀라자빠질거 같은거 아시죠)
전도는 궁긍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나 같은 무지한 자도 필요에 따라 쓰신다는 거잖아요.
그런 자부심을 갖고 항상 쓰임 받기 위하여 기회를 선용할 필요가 있는거죠.

서서히 이렇게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상황은 물론 나만이 겪는 문제는 아니겠죠?

물론 우리가 은혜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아무것도 안해도 되겠네, 이런 질문이 나오는거는 너무 당연한 거에요.
그럼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럼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의 행복"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의롭게 되는데 내가 할 일은 없는거 물론이죠.

오늘 본문에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하십니다.
(출 14:13)"~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는 것을 보라" ~무얼 하지 말라는거죠?
두려움, 즉 불신앙의 행위를 멈추라는 겁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로 승리하게 하시고 싸워 이기게 할텐데 그거 못 믿고 섣부른

행동 하지마. 믿음으로 지켜 봐 이말이죠?

(주님이 왜 이런 부탁 하시는지 아세요?)

승리가 인간의 눈에 패배하는 모습으로 비취지는 거에요.
십자가가 자랑거리로 보여져야 하는데 부끄러운 모습으로 비춰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그러나 결국 구원을 행하시는 여호와께서 우리 승리를 위해 싸우시기 때문에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하죠. 이것은 우리는

두 손 놓고 그저 수수방관하면서 지켜만 보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야고보2;22)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고 구원을 거저 주시지만 넌 왜 그걸 스스로 취할 수 없는 자인가를 몸으로 경험하게 하신다는

거에요. 이것이 성도에게만 나타나는 고난이란 표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작정 안에 있는 십자가 언약 입니다.

우리들의 치부를 드러 내셔서 내가 너에게 영생이란 것을 왜 선물로 줄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아~네가 그걸 죽었다 깨어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이렇게요? 그리고 우리를 골고다로 밀어 넣는 겁니다.
육신을 입혀 이 세상이란 역사 속으로 밀어 넣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만 이 현실을 깨닫고 마음 아파하고 몸부림치며 죄에 대하여 치를 떠는 애통함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에게만 있는 십자가의 흔적입니다.(갈6:17)

지금 이건 구원의 열매 이런거 말하는거 아닙니다.
~그럼 열매하고 흔적은 뭐가 다를까요?
열매는 그나무의 종자로부터 씨가 되어 나무가 되고
그 품종에 따라 좋은 열매 나쁜 열매가 맺힌다는 거죠. 열매는 나무의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흔적은 내가 피튀기는 노력으로 이루어 낸 나의 작품이 아닙니다. 내 인내와 의지와 행위의 결과와 상관 없이

그냥 언약된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표를 찍듯 찍어 버리는 마크와 같은 것이에요.
이건 내 속에서 나오는 인본의 결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인침 그리스도인의 표적입니다.
이걸 영적 할례라고 하는 겁니다.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니라"(골:11)
우리의 육의 허물을 벗겨 내시니 당사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체감 되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일부러 잘못해서 고난받고 핍박 받는 것은 십자가 고난 아닙니다.

여기 가만히 있으라 함은...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니 구원을 얻기 위하여 행위를 중단하라는 의미일 거고요,
상급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너희 행위를 중단하라는 뜻일 테고요,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내 가치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중단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 내 행위가 끼여들 여지가 없다는 것에는 다 동의가 된 분들이잖아요?

아직도 무엇을 하고 안 함으로 내가 무엇이 되고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아직도 구원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우리는 틀림없이 구원받은 자임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니 살아지는 겁니다.
"너희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되라'는 명령이 아니라 '되리라'는 필연성을 말해주고 있는 구절이죠.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것이죠~(표징)

이 역사 속에서 성도는 다 목베임 당한 자로 십자가를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왜 십자가에 달려야 했는지를 삶으로 몸으로 증거한다는 거에요. (여기에 고지론이 설 자리가 없는 겁니다.)

이처럼 내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죠?
열매를 가지가 맺히는 것이 아니라 가지는 그냥 붙어 있으면, 나무 자체가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를 붙어있게 하심은 나무와 그 뿌리의 몫이잖아요? 내가 거기에 붙어 있다는 것은 생명의 진액이 그 안에서 흐르고 있다는

증거이겠죠, 가지는 가만히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생명의 치열함이 그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열심.(신학적으론 성도의 견인)
내가 나무에 붙어 있는거 아닙니다. (알미니안)~내가 열심히 붙잡아야 한다.(붙잡는 주체가 나)

하나님과의 연합의 증거가 성도라는 표징이 우리에게 기도로 나타날 수 있다는 거에요.
전도로 또한 구제와 섬김과 봉사로 나타날 수 있는 거에요.
이마저 부정하고 내 안에 역사를 소멸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일까요?
'그것도 내 의를 챙기는 것이니 배격해야 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올바른 행위 일까요?

내가 어떤 목적을 갖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살아있는 자로, 그리고 택자로 증거하기 위하여 향기처럼 그리고 꽃처럼 열매처럼 나타내시려 한다면

이런 소원도 죄가 될 수 있다고 억제하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인지 묻고 싶네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타내시려는 그 하나님의 역사마저도 행위구원론 적인 측면이요. 내의를 쌓는 것이라고 부정 한다면 우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면서 성도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과연 의를 이루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 문제에 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2:13)

구원의 현재시제를 사는 자들 주님은 그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으로 언약 안에 있는 자임을 입증하십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쉽게 구별이 안 되겠죠.
그래서 더욱 우리는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의 결과 입니다.
성과가 좋다 이런 것이 결과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내가 무엇을 배웠느냐? 하는 건데요~
그러니깐? 성공하고도 내 욕심 내 의를 챙길 수 있고요.
실패 하고도 거기서 주님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일이 주님께로 인도하는 도구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예 이단에 빠졌던 경우 그건 잘못된 거지만)
그 율법주의를 통하여 결국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하고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단까지도 선의 도구가 된 거잖아요~

왜 성도에게 표징을 허락 하신다 했죠?
'넌 아니야!, 이걸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 했잖아요.
그 모든 일을 통하여 무엇이 드러나느냐? 이것이 중요한 거에요. 내가 뭘 하냐? 안 하냐?가 아니라 우린 할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어요.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죄를 지을 수 있는거 맞아요. 그 일을 통하여 나 입증의 수단으로 삼으면 무슨

선한 일을하든 우린 거기서 내 의를 챙기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또 우린 배우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거기서 배운 그 진리가 바로 열매요. 표적인 거에요. 무슨 일을 하든 우리가 거기서 선을 배우게 되면 그

일들은 도구 역할하고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한 일을 기억하고 성도는 자기부인만 남아 오롯이 예수만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우린 그렇게 주의 일을 하면서도 내 유익을 챙기는 자신을 보면서 나밖에 모르는 나, 그래서 난 안 되는구나?를 배우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난 예수가 필요한 자네요? 이렇게 배우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하고 있으면 자기 실수와 실패의 확율은 적을지라도 내 부족함이 드러날 기회가 없게 되잖아요?

난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니까요?
은혜 받은자는 자신이 부족함에도 열심히 해야 합니까? 난 부족 하니깐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깐 나중에 해야지
가만히 있어야지 하는 것은~ 은혜 받을 기회 놓치는 격이죠,
(준비 많이 해서 실수 안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그러면 은혜를 챙길 기회가 줄어 드는거에요) 할렐루야!

~실패도 은사입니다.
~인간의 의를 이루기 위한 열심에서 나온 행위는 자신에게 차곡차곡 가억 속에 쌓이죠. 실패보다는 성공한 것이 내가 이렇게

성공했는데 하면서...반대로 성령이 내 안에서 격발케 하는 열심은 내가 한 것이 아니기에 본인이 했다는 기억조차 없게 될 뿐더러

단지 내가 부정 당한 기억만 흔적처럼 내안에 남는 거에요? 여기 내가 부정당한 기억이니 성공보다는 실패가 되겠죠.

(그리스도인의 표적)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를 책망하신다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을 때 그것을 성령께서 바로 깨닫게 하신다는 건데요.
이처럼 우린 스스로 진리를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증거에요. 수시로 성령이 내 안에서 책망하며 교정해 줘야

하는 겁니다.

우린 용서받은 죄인이지 죄를 전혀 안 짓는 완전한 크리스찬이 된거 아니죠.
우린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의인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이지 역사 안에서 실존적으로 의인이 된 것은 어님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그 나라에 육신을 벗고 새몸을 입을때까지요.

그러므로 구원 받은 자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그 인생 안에 반드시 나타난다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싸우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이기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나의 몸과 마음 손과 발을 움직여 나의 인생이란 삶의 과정을 통하여 열심히 분투하게 하시고 싸우게

하시며 우리 육적 자아를 죽여내는 자기 부인의 과정을 반드시 겪게 하신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잖아요?

그런데 손발 놀리지 않고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도 일할 수가 없어요.
(바보같은 질문이지만 만일 아담 하와가 선악과 따먹지 않고 에덴 동산에 지금까지 있었으면 과연 그것이 복일까요?
그것이 최선일까요? 에덴 동산에서 벌거벗은 채로 천년 만년 사는 것이 천국 아니잖아요?)


~성도는 반드시 십자가 지는 자기부인의 자리로 끌고 가신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내가 결단하고 노력하여 허벅지 찌르며 견뎌내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나는 안 되는 자로구나?'

내 힘과 능력으론 자기 부인도 할 수없는 그런 자에 불과하네~ 나를 이 역사의 실패자로 그리고 낙오자로 밀려 내려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의 이김이라네요. 나의 패배가 주님의 승리가 된답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전부요. 나는 낫씽임을 증명해 내신다면, 하나님의 열심이 동원된다면 우리가 나 실패를

맛보지 않기 위해서 나 부족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나의 행도을 스탑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죠. 불신앙 입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더욱 좌절을 맛보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것이요. 나에게 더 많이 실패를 겪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간혹 성공을 주시기도 하시겠지만, 이 모든 일에 내가 나를 신뢰할 수 없는 자로 폭로해 내시는데, 나의 전 생애와 삶이

교보재로 사용된다는 겁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어느 누가 난 아니라고 난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고 자기 손발 묶어 놓고

하나님의 앞에 뻣딩기고 있을자! 있겠어요. 그런 자는 아마 성도가 아닐 수 있겠죠.

진정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택함을 받은 자라면,,,하나님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실패도 은사요

하나님의 섭리라 말한 것입니다.
내가 이미 구원 받았다고, 아니 다 완성되었다고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입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는 것일 수 있어요. 아니면 진짜로 진리가 되어서 그런건지요?

그러나 진리는 이 역사 안에서 우리에게 내것으로 소유될 수 없는 겁니다. 이걸 모르고 진리가 되었다고 너스레를 떠는 자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가 되었다면 진리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 역사 안에서 그럴 수 있는 자가 없잖아요,
진리는 나의 육적 자아가 거짓임을 날마다 폭로해 내어 오로지 예수만이 내 안에 생명으로 드러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거에요.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
그러니까? 날마다 주님이 진리이고 난 거짓으로 드러나는 좌절감과 실패감을 맛보게 하신다는 거 기억해야 합니다.

이역사 안에서 우리는 결국 거짓으로 판명되고 오직 예수만이 진리임이 드러나는 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아멘~

그래서 바울이 '난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 거잖아요. 그 육이 깨달은 바 진리를 따라 주지 못하는 겁니다.
그때 한번 그렇게 고백했다는 뜻이 아니라 날마다 죽고 사는 체험을 계속 해왔다는 거에요.(언제까지?)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철저히 내가 무력한 존재로 드러나게 하실지도 몰라요. 우리는 더 탈탈 털린 빈털터리로

그리고 티끌로 폭로 돨지 몰라요.
그때 놀라지 말라는거에요. 왜 그것이 성도에게 당연히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니까?

'너희는 가만히 있으란, 말은 그저 두 손 놓고 가만히 앉아 수수방관 하라는 것이 아니죠.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승리를 위해 싸우시는 과정에서 너를 어떻게 도구로 쓰는지 겪어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네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고 경험하라는 겁니다.

어떻게..나의 약함을 들어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십자가에 아들을 죽여 택한 자들을 살려 내시는 그 구원을 보라는 겁니다.
"내가 약할 때에 하나님이 강함 되시네" (고후12:9-10)

나의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강함 되심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남이나 강함을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연약함을 모자람을 쓰시기 원하는 겁니다.
여러분! 역설이지만, 더 바보가 되세요. 더 부족하고 모자라는 부분을 드러 내세요. 그만큼 주님이 은혜로 부족함 만큼 풍성히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