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에 대한 질문과 답변

 

꽤 오랫동안 고민해 오고 있는 문제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신학에서 가르쳐 지고 있는

인간론에서

사람 = 영혼 +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설명인데요.

일종의 이분설이지요.

 

성경을 여러 군데 찾아보아도

정리가 잘 안되네요.

 

사람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하는 문제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

또는 영혼은 불멸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되네요.

인간의 몸은 죽은 후에 티끌로 돌아가고 썩게 된다.

그러나 그 영혼은 죽지도 않고 잠자는 것도 아니고 불멸의 실체로서

곧바로 그 창조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도서 12:7 등 참조)”

(박윤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영음사, 1989, p.203).

 

영혼이란 것이 있고 불멸의 존재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죽는다는 것이 단순히 영혼과 몸의 분리이고

부활은 중간기 상태에는 하늘에 있던 영혼과

신령한 몸이 다시 결합하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글로 쓰려니 참 길고 표현도 잘 안되네요.

성경에서 죽은 것을 잠잔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영혼수면설을 주장하는 건 아닌 것 같구요.

말 그대로 죽은 것인데...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다시 그분의 능력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도의 입장에서는 죽음 이후는 시간관념이 없으니

당연히 기다림의 지루함(?) 같은 것도 없이

죽음과 함께 바로 부활을 경험하는 게 아닌가 하거든요. 제 생각은..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2:7절을 묵상하면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네요.

생기는 그야말로 그냥 생명의 기운 정도의 의미인데요.

이것을 영혼이라고 가르치는 목사도 있고

 

생령은 다른 동물들처럼 살아있는 생물체의 의미인 네패쉬인데

영원불멸하는 존재로 해석하는 분도 있고...

성경에서 영(루아흐/프뉴마), (네패쉬/프쉬케), (소마/바사르/사륵스) 등등의

단어들도 굉장히 많이 번역상의 문제를 안고 있어서 한글 성경만으로는

쉽지가 않네요..^^

 

질문이 길어졌지만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전달이 되었지 싶습니다.

 

 

집사님!

 

재림도 없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몸의 부활과 재림에 대하여

이번 명절에 준비하여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집사님의 질문을 앞에 올리고 답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간단히 답하면

중간기는 시공간의 의미가 없구요!

사람의 몸과 영혼은 성경에서 그때 그때 다르게 사용합니다.

소멸할 연약한 것으로도 말하고 영원한 것으로도 말합니다.

이런 부분까지 정리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구입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대청동 한국은행 앞쪽에 성바오로의 딸 서점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분도출판사, 구약성서의 인간학' 입니다.

인터넷으로 구입하셔도 되구요!

이 책을 참고하여 구약의 인간에 대하여 언급하려고 합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인간을 이분설, 삼분설 분석적으로 나누는 것은

아무래도 서양철학의 영향인 것 같고

성경은 인간을 전인적으로 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완전한 죽음이기에

부활이 소망이 큰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의 말씀의

능력을 믿으므로...

나는 죽어도 주의 말씀만으로

 

중간기는 시공간의 의미가 없기에

오래전에 가야산호텔에서 한번 나누었던 말씀처럼

죽으면 잠자는 것처럼 의식이 없어지고

(그리고는 시간의 흐름은 못 느끼고)

부활하여 깨어나는 순간

마치 금방 잠들었는데 깨듯이

언제 긴 밤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부활을 하지 않을까..

당사자 입장에서는 시공간 개념이 전혀 없는것이겠지요.

 

영혼만 구원하신다면

굳이 주님이 성육신 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몸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천사와 다른 점이라서

반드시 몸의 부활이 있고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신령한 몸을 입으심은

(지금도 몸을 입고 계시고)

우리 성도의 부활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님의 가시적인 재림도 성경대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심처럼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답변을 드리려고 한 내용이 그대로 요약이 되어있군요!

더 이상의 언급은 사족이겠습니다만 그래도 구약의 인간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한 책의 서문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겠습니다.

 

구약 성서의 인간학은 한스 발터 볼프가 마인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10년 동안 집필한 책입니다. 이 사람의 머리말 끝에 이렇게 첨언합니다.

 

만약 이 책에 무슨 중요한 내용이나, 무슨 명백한 점이나, 지배적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구약성서 자체와, 이 책이 증언하는 그 분의 덕택이다. 그래서 나는 성서가 주는 발견자의 기쁨을 이 책이 여러 가지 점에서 새롭게 소생시켜 주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성서의 풍부한 인간 모습 중에서 단 몇 부분만을 이 책이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문

 

여기서 연구할 대상은 인체의 각 기관과 손발과 인체의 모든 현상에 대한 히브리인의 명칭이다. 우리는 개념 하나하나를 따로 연구해 나가겠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서의 인간론에 관련된 언어학을 수립하려고 한다.

 

성서에서 매우 자주 나오는 명사를 대체로 마음(Herz, 심장), 영혼(Seele), 육체(Fleisch), 정신(Geist)으로 번역한다면, 그 다음에는 굉장한 오해가 생기게 된다. 이런 오해는 이미 고대 희랍어 번역인 70인역 성서에서 나타났다. 이 번역에서는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다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빠져서, 인간이 이분화(二分化), 또는 삼분화(三分化)까지 되는 인간론으로 오도(誤導)시키고 말았다. 성서가 희랍어로 번역됨으로써, 희랍의 철학이 성서의 셈족 사상을 얼마나 침해하고 억압하였는지를 조사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구약성서의 언어습관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셈족의 사상과 사고의 전제 조건들을 이해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근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모든 개별적인 관찰을 하기에 앞서 이 두 가지에 우선권을 주어야 옳을 것이다.

 

1. 히브리인의 시()에서는 마음, 영혼, 육신, 정신 등과 같은 개념들만이 아니라, 귀와 입, 손과 팔과도 같은 개념들이 서로 동등하게 교환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지체(肢體)의 평행귀에서는 일부의 지체가 그 사람 전체를 나타내는 대명사와 거의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84:3).

 

나의 영혼이 야훼의 궁정을 향하여 갈망하오니,

진실로 신음하옵니다.

나의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환호성을 지르옵니다.

 

이런 변화는 거의 알 수 없을 정도로 한 주체의 여러 가지 면을 나타내준다. 그래서 인간의 기관이나 지체가 조금도 인간을 파괴하는 일 없이 대명사에서 분리될 수가 있다(3:10이하)

 

지혜가 네 마음속으로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신중성이 너를 지켜주고,

판단력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시편 6:3~5 에서는 다음 다섯 가지가 평행으로 계속 나온다: -나의 골격-나의 영혼-. 히브리인은 사상적인 표현을 입체적으로 특정함으로써 자기 사정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히브리인 교사들은 개념 구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자기의 사상을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의미가 서로 친근한 단어들을 나란히 병용함으로써 더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입체적인 사고는 독특한 신체의 기관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의 생활 영역을 표시하고, 그 한 기관으로써 그 사람 전체를 둘러서 말했다(18:15).

 

이해가 빠른 마음은 지식을 얻고,

현인의 귀는 깨달으려고 한다.

 

신체의 각 부분이 그 자체의 본질적인 기능을 통하여 새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의 모습을 포위하고 있다.

 

2. 이와 동시에, 입체적인 사고는 인체의 지체와 기관을 그 본래의 능력이나 활동과 연결해서 본다는 점을 전제로 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체의 어느 부분을 말함으로써 그 기능을 표현한다는 종합적인사고다.

 

-중략-

그래서 우리의 성서적 인간론에 관련된 언어학은 인간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지닌 풍부한 의미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히브리인의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사고를 그와 반대되는 우리의 분석적이고 개별화하는 언어로 옮겨야 한다. 히브리인의 단어를 그와 동일한 우리의 단어로 바꾸는 고정적인 번역은 대부분의 경우 뜻을 그르치고 말 것이 분명하다. 이런 번역은 인간에 대한 본래의 표현을 거의 다 그르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성서의 인간론에 관련된 주요 개념들의 광범위한 의미를 찾아내면, 성서의 인간상에 접근하는 데에 그 첩경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적인 기관들을 밝혀냄과 동시에, 인간의 특성과 독특한 능력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론에 이어 본격적인 성서의 인간에 대한 표현들의 몇 가지 제목만 옮겨봅니다. 다음의 각 단어들마다 성경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페쉬-갈망하는 인간: 목구멍, , 욕구, 영혼, 생명, 사람, 대명사

 

바사르-몰락하는 인간: (), (身體), 일가친척, 허약성(虛弱性)

 

루아흐-전권을 부여받은 인간: 바람, , 생명력, (), 정서, 의지력

 

()-이성적인 인간: 마음, 감정, 소원, 이성, 결의, 하느님의 마음

 

이러한 간 단어들의 성경적인 용례만이 아니라 육체의 생명으로 숨과 피, 육체의 내부로 창자, , 쓸개즙, 콩팥등도 다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이중에 바사르의 허약성이라는 한 단어의 내용을 옮겨봅니다.

 

바사르는 인간의 생이 그 자체로서는 대체로 허약하고 몰락(沒落)할 것이라고 그 특성을 말한다. 시편 56:5절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하느님에게 희망을 두고, 나로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에게 바사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허약한 육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기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12절에서는 동일한 문장에서 다만 바사르대신에 사람이라는 동의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이 바사르가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의 본질과 대조시킴으로써, 그것이 무력하고 의지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함을 묘사하는 것이다.

욥은 하느님에게 이렇게 물었다(10:4):

도대체 주님의 눈도 육신(바사르)의 눈이니이까?

주께서도 사람이 보듯이 보시나이까?

 

이런 표현이 아니었으면 한 번도 하나님의 바사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바사르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대조된 인간의 전형적인 것으로 더 자주 사용되었다. 예레미야 17:5,7은 반대된 내용으로 대결시키고 있다:

인간을 의지하고, 바사를 자기 힘으로 삼는 자는 저주를 받고

야훼를 의지하는 자는 복을 받는 자다.

 

앗수르의 강력한 산헤립 왕에 대해서마저도 역대하 32:8은 이렇게 말한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바사르로 된 팔뿐이지만,

우리에게는 야훼, 우리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우신다.

 

이 모든 경우에서 바사르는 언제나 인간 능력의 유한성과 불충분함을 묘사하고, 특히 신의 위대하고 믿을 만한 능력에 대조되고 있다.

육체는 신의 생명력에, 곧 하느님의 호흡에만 의존된 것이다 신이 피조물에게 그 호흡을 제거하면,

그때엔, 모든 육체(바사르)가 즉각 죽을 것이고,

인간도 먼지로 되돌아간다(욥기34:14이하).

 

바사르는 본래가 자기 자체 안에서 몰락할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다(6:3비교하라. 인간이 육체이기에 범죄한다). 그러나 바로 인간이 허약하기 때문에 신은 자기의 분노를 제한하고 있다(78:38이하).

인간은 육체(바사르)뿐이라는 것을 주께서 기억하셨다.

 

그러나 바사스로서의 인간은 거룩한 하느님 앞에서 몰락할 존재만이 아니라, 죄악에서도 빠지기 쉬운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음성 앞에서 견디고 서 있을 수가 없다(5:26).

우리가 들은 것처럼 살아계신 하느님의 음성을 불 가운데서 듣는다면, 모든 바사르(육체) 중에서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하느님에게서 불어오는 불타는 심판의 바람 속에서 모든 육체는 초개(草芥)와 같이 시들어간다(40:6). 제관계 문서에서는 모든 육체(콜 바사르)위에 홍수의 심판이 선고된다. ‘모든 육체자체가 지상에서 자기 길을 타락시켰기때문이다(6:12). 그래서 죄의 짐을 하느님 앞에로 메고 가는 것도 모든 육체(65:3이하).

 

그러므로 바사르는 구약성서 안에서 이미 몰락할 운명을 지닌 피조물로서 무력(無力)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진실함과 순종에 있어서도 허약함을 노정시키고 있다.

 

피조물과 함께 몰락하는 것은 윤리다. 쿰란 문서는 범죄한 육체’(브사르 아쉬마), ‘불의한 육체(브사르 아웰)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이 육체의 죄악성을 말하는 최초의 기록은 아니다. 바울로는 나의 몸 속에 선한 것이 살고 있지 않다’(7:5,18)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육체와 완전히 대조 되는 것이 이다(31:3). 그러나 마저도 인간의 희방이지 자기자신은 아니다(3:1,한국어 성서 2:28):

내가 나의 영(루아흐)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겠다...

 

이것이 바사르의 마지막 용례인 인간의 허약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루아흐를 부어주겠다고 한 그 루아흐에 대한 용례를 살펴보면 루아흐도 인간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인용한 이유는 우리가 성경의 한 단어를 연구할 때에 이런 방식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나의 신학적인 사상을 고정시켜 놓고 그 사상에 맞추기 위하여 단어를 파자하여 가위와 풀로 재편집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최종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성경의 문맥을 따라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까지의 안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무너져 내리지 않고 자기의 소유로 자리 잡은 지식이나 믿음이라는 것들이 다 우상이 됩니다. 우상은 고정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말하는 자들이라면 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와 세상이 간 곳이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는 자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 분이 만유(萬有, All)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