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성경을 읽고 있노라면

하나님이 이렇게 오해가 되기도 하는데요.

마침 하나님은 인간이 죄 짓기만을 기다리고 십자가 심판을 벼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참 심술맞기도 하신분처럼 말입니다.

아담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되자 마치 보고계셨던 것처럼 득달같이 찾아 오시네요.
왜 오셔도 서늘한 날에 오십니까?
뭐 원어적 해석을 빌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은 땔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으시시한날 을씨년스럽게 그렇게 찾아 오신 하나님은 마치 심판을 예고하시는 듯 그렇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아! 아담아! 부르십니다.
네 죄를 토설하라 다그치시는 것 같아요.
이제 죄가 드러났으니 해결될 길이 열리기라도 한 듯,

심판은 그 자유와 해방을 담보하고 그렇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는 아담에게는 마치 로또를 맞는 것보다 더 커다란 행운이 찾아오는 것과도 같습니다.
내 죄를 이제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나와
상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나의 언약 안에서 점 찍어두었다는 거예요.나는 아무런 액션이 없었는데,

다만 그분이 먹지말라 한 그것을 먹었을 뿐인데, 그것이 타락이요.

불순종이라 명명하시며 심판을 집행 하시기 위하여 그분이 의도한데로 그렇게 죄인을

찾아오시는 것이 회심이요.구원입니다.

은혜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내가 구해야 한다고요?
내가 원해야 한다고요.
그럼 구하지 않고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도 못 구원 하시겠네요?
그 구원의 원인은 나의 찾고 구함에 있고 나의 원함에 있었네요.

구원의 주도권을 어떻게해서라도
찾아오고 싶어하는 인간의 끊없는 탐욕
결국 알미니안주의란 교리를 만들어 내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놈의 자유의지 타령 그만좀 하시지요.
나란 인간의 그 내면을 조금이라도 들킨 자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얼마나

고맙게 생각해야되는지를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었느냐고 얼굴을 붉히며 달려듭니다.
이들은 인간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못하고 신을 향한 선지식이 인간 내면으로부터

자연적으로 흘러 나오는 것이라며 우겨댑니다.

맞아요! 신을 향한 구도의 정신,그리고 신앙에 대한 갈망과 희구, 이 모든 것이 인간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이 어떤 자들에게만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인간이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시는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
치성에 보답하시는 고맙고 감사한 하나님! 결국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그런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구 부려먹는 종으로 소로 하나님을 그려 놓고서는 거기에 굽신거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그 무례함에 인간에겐 애당초 소망이 없음을 진작 깨달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그 후로 오랫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두들겨 패십니다.
사정없이 시험에 들게 하시는 거예요.
왜 너희들의 한계를 알아 먹으라고
율법을 주셔서 지키면 복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그건 하나의 미끼였어요.
그 그물에 걸려 너희가 율법을 못 지키는
무력자로 폭로 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죠.
그렇게 너희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할 수 없음을 고백하라는 거였지요.
그래야 구원자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잖아요?

그런데 저들을 그 미끼를 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끊어 버리고 그 미끼를
무력화시켜 버리는 겁니다.
계속 성전에서 소와 양과 염소의 제물을 잡아 드리면서 우리가 잘 섬기고 있죠.

말씀대로 준행하고 있다고 우기면서 율법의 진의에 다가가지 못하는 서글픈 현실이 반복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죄인됨의 실상이예요.
이런 인간들은 결국 마귀가 놓은 율법주의,인본주의,알미니안주의의 덫에 걸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다 인간의 탐욕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겐 하나님을 찾을만한 신령한 지혜를 넣어주시지 않는 자들은 어둠에 사로잡혀 죄악만을 토해낼 수

밖에 없는 추악한 모습들을 들추어 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계속 숨기에 바쁜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과 하나님과의 숨막히는 숨박꼭질이 이어온 것인데요.
이제 하나님은 만천하에 계시의 빛으로 폭로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친히 모으기로

결행하십니다. 이예 거부할 수 없는 은혜의 결과로 작동된 구원 프로젝트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요.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한 신의 출현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이 제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죄악의 불행이란 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신비 그것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대신 제물이 되어 나를 대신하여 죽어 주심으로만이
죄 아래 팔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약속의 백성들을 심판으로부터 놓아 줄 수 있었던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시공 밖에서
이미 창세 전에 계획되고 섭리된 것이지
저들이 예수를 믿을 줄 알았는데 안 믿어주니깐~
하나님이 당황한 나머지 서둘러 아들이라도 잡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신파적 스토리가 십자가 사건이 아님을

여러분은 잘 아시죠.

물론 어떤 이들은 지금도 그 아들을 내가
믿어야 그 아들안에 예정된 무리가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 듯 한데,
묵시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어차피 점입니다. 찰라입니다.
시간상으로 뭐가 먼저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창조의 메카니즘으로 볼 때,
인간의 결정이나 의지가 결코 하나님의 언약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흐름이요. 맥락이요. 증거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를 믿게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심판과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언약 안에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가 대신 받아내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대신 그 십자가의 고난과 저주가
그들의 삶이란 갈보리 위에서 쏟아 부어지는 것까지 막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행케 하옵소서 몸소 받은 고생도 알게 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새찬송439장)

우리가 역사안에서 받아 내야 할 죄의 흔적과 후유증 까지 그 십자가가 없애 주시지는 않고 우리들의 육으로 그것을

받아내고 생생하게 체휼하라 하십니다.
그 십자가가 저들이 예수안에 있는지 그 밖에 있는지 구별하는 증거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왜 묵시안에 있었던 하나님 언약의 십자가가 이젠 역사 안으로 침공해 들어와서 성도들을 하나 하나 박살내고

요절을 내기 시작한 것입니까? 우리가 직접 그 십자가를 질 수 없을 뿐만 아니아 지고 죽어야 했다면 역사적인

사건으로 반복될 수 밖에 없는 형국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거예요?
그래서 그 아들 예수가 역사 속에 들어와 그 십자가를 내 대신 지심으로 십자가는 역사안에 성취된 묵시의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묵시가 역사를 삼켜버린 사건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십지가는 역사를 초월하여 그 십자가 이전이나 그 이후나 상관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넘어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능력이요. 비밀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어요.

그런 연유로 십자가 죽음이 끝나고 예수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죠.
그리고 보혜사 성령이 성도들에게 강림하여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오직 예수와 십자가였습니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바울이 증언했고 오직 내 몸에 예수 십자가 그 죽으심의 흔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말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지를 알려면 십자가를 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
십자가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그렇게도 중요했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만을 전해야 맞죠.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난 예수를 만나고 전해야 한다고 그리 호들갑을 떨었을텐데, 말입니다. 끝까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에 저들은 복음의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부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으심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으며 예수의 부활도 그 십자가의 죽음을 증거하고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 사건 이후에도 저들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도 전하지도 않기로 작정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