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니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세우느니라"(엡4:13-16)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은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과 이미 완료된 구원의 완성이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루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 부조화같은 조화와 상충을 어떻게 설명해 낼 것인가의 진의가 성화론에도 영향을 미칠뿐 아니라 상급론의

교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 되기도 한다. 저들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구원과 성화를  분리하기도 하고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여 나누기도 하면서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그리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숙하라는 말씀을 설명해보려 하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이는 구원 후에 성화에 인간이 어느 정도는 기여내지 협조해야 하는 그런 성화주의를 양산하는가 하면 구원을

삼 단계로 구분하여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는 주체가 인간이 되어버린 알미니안식 구원관을 마치 기독교의

바른 구원론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누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결국에는 구원을 이원화 시키며

영의 구원과 육의 구원으로 나누어 해석하려는 이단교리가 나오게 되는 빌미를 주게 되는 꼴이다.


그런가하면 구원을 시대적으로 율법시대, 은혜시대, 성령시대로 구분하여 오늘날 우리는 성령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2의 은혜인 성령세례로 이를 설명하려 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가 있어야

구원이 확증된다고 한 때 분란을 초래했던 오순절파도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중요하다며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강조 했던 신개혁주의가 등장하여 우리로 하여금 내가 어떤 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모든 촛점이 맞취지면서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에 혼란이 생겨 이미 얻은 구원의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거저 얻게 된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찬송 보다는 결국은 다시 알미니안주의에 빠지게 하였다.


이런 혼돈은 우리를 영지주와 신비주의에 빠지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에베소서 3장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숙해야 한다는 표현은 구원 후에 우리는 성숙 발전해야

한다는 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행위론자들이나 고상한 성화론자들이 사용하는 근거 구절이기도 하다.

성도는 구원 후에도 끝임없이 성숙 발전해야 한다는 건데, 물론 저들의 그런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는 어떻게 성숙해야 하겠는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성도는 자기를 창조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게 된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여호와를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 ​(호6:3) 느헤미야에서는 여호와를 알고 그분의 하신 일을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기록하고 있다.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데 있다고 하신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1:10,11)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영생이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고까지 하시지 않았는가?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한다.

 

사도 바울도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는데 장성하여

그런 것들을 버리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그 정도에서 우리는 끝임없이 성숙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의식과 이성이란 도구에 담겨지게 되면 이미 그 계시적 말씀은

인간의 제한적인 지식의 범주안에서 해석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담아내는 그릇에 따라 달리 이해되고 다르게

설명될 수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어차피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기노스코)데 있다.(요17:3)

이것을 반대로 해석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만큼 그 신비의 세계가 벗겨지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여기서 또 오류가 생긴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하나님은 포착당하고 인간의 지식의 영역에

하나님이 갇힐 수 있다는 교만으로 난 이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다 알고 있다는 오만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늘 주장하는 것이 성경 지식을 통한 더 깊은 세계를 체험한다는 건데,

그래서 성경원어 파자를 통한 연구는 자칫 영지주의적인 신앙관에 쉽게 빠지게 되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늘 유념해야 한다.


이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이란 경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연구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인본이 중심이 된 성경공부는 이단종교만

양산해 낼 뿐이다. 하나님에 의해 내가 포착 당하는 것이요. 그 계시에 의해 내가 죄인으로 해석당하는 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해석된 말씀의 이해가 아니라 인본이 해석하는 말씀엔 성경을 입체적으로 보는

눈이 결코 열리지 않게된다. 언제나 단면적이고 도식적인 그림으로만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 자구에

얽매인게 되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그마에 갇혀서 성경을 볼 수밖에 없는 것임에, 결국은 행위론적인

구원론이란 함정에 스스로 빠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구원을 도식화 해버리면 알미니안적인 구원관이 성립되는 것은 물론이요. 상급론의 근거가

마련 될 수는 있어도 십자가에서의 구원의 완료성을 설명하지 못하고 결국 행위구원론에 빠지게 되어 있다.

마치 우리의 믿음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야 격국 구원이 완성된 것처럼 그렇게 가르치면

그건 잘못되도 대단히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도 구원의 범주에 들지

못하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저들은 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저들은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결론이 나 버리지 않는가?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양고기를 먹으며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모세의 인도하에 홍해를 건넌

사실을 성경은 세례 받음(고전10:2)에 비유하고 있는데 어린양의 피도 예수 안에 세례도 저들을 구원하지

못하게 되는 이 오류를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는가?

물론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 입성이 구원 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이 땅의 육적인 삶의 한 과정 정도로

그리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그림을 행위구원론자들이 그들 믿음의 행위를 고취시키려는

목적으로 가나안 입성의 열심을 여리고 함락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아니라  성 주변을 돈 장면을

땅밟기라 하여 복받는 방법들로 그리고 성도의 열심을 부추기는 수단으로 삼는데는 이력이 난 자들이다.

 

그러나 저들의 해석과는 상관 없이 이 출애굽 장면은 각 단계가 예수의 십자가와 피만 증거하고 있는 반복된

설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애굽의 단계요. 다음은 광야의 단계 그 다음은 가나안이다.

애굽이나 광야나 가나안이 다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언약 안에만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반복하여 보여주는 그런 그림이라는 것이다.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땅을 밟았던

그 이스라엘은 이제 하늘 백성으로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사사시대에 저들의

패역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어야 한다는 모형에

불과한 것이다.


애굽이나 광야나 가나안은 차원의 문제이지 구원의 단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신 도식이 아니라는 거다.

모든 것이 다 하늘의 모형이요 참형상이 아니라 하지 않았나?  저들은 애굽에서 하늘의 만나를 먹었고 홍해를

가르고 기적적인 구원을 받았지만 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세가 죽어야 했는가? 이런 모든 난제가

성경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보고 해석할 때 그설명이 가능해 진다.


애굽에 종으로 갇혀 있던 이스라엘을 모세를 세워 거기서 이끌어 내시는 그 역사란 그림을 통하여 하나님은

율법과 죄에 갇혀 있었던 죄인들을 예수그리스도란 메시야를 보내어 구원하시는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요.

그래서 저들이 탈출할 때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의 피로 죄인은 구원

된다는 그림으로 설명이 끝난다. 그리고는 또 어떻게 구원 받게 되는지 알아 하면서 홍해를 갈라 그 곳을

마른땅 통과하듯 지나가게 하심으로 우리가 예수 안에서 받는 성령세례 즉 육을 평생 죽여내는 세례를 그렇게

또한번 그려내는 것으로 다시 설명해 주는 그림인 것이다.(고전10:1~4)


또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를 먹게하시고 반석에서는 생수를 마시게 하신 것은,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말씀이 성령님에 의해 우리에게 양식과 음료가 될 때 그것이 내게 영생이 되는 하늘의 만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광야의 삶이요. 가나안의 삶이란 것이다.

왜 이렇게 저들이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가? 구원 받은 우리네 삶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십자가지는 삶으로 고난

당하는 삶으로 점철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이기 때문이다..(롬6장)


하나님을 알다.(야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경험하다는 그런 의미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아모스3:2) 여기 알다가 "야다" 즉 하나님이 선택 하셨다.

사랑하셨다는 그런 뜻이다. 주님 안에서 자라가라는 말씀은 머리로만 아는 데서 그치지 말고 체험하여

앎이 자라가라는 것이다. 지식으로 아는 것을 몸으로 체득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알뿐더러 우리는 하나님의 의해 아신바가 되었거늘 왜 또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느냐

(갈4:9) 바울은 이렇게 힐문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완료된 구원을 우리 현실 안에서 자꾸 진행형으로

살게 하시는가?  그걸 우린 몸소 체험해야 하나님을 단순한 지식으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에 감정이입이되어 그걸 내 삶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와의 사랑과 연합을 체험하게 되는 거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수직과 수평으로 연결 짓는 하나의 고리, 그 안에서 하나됨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이란 어디까지인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그에게까지 자랄지니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한 그 자리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장성의 지점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란 죄인의 괴수의 자리까지 내 자아가 낮아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기까지 그 자신이 낮아 지셨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내가 버림받고 부정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죄인 취급을 받게 되는 그 자리가

바로 내 자리인 것을 아는데까지인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까지 자란 성도의 바른 자세에서 터저 나오는 죄인됨의 자인식인 것이다.

장성이나 성숙이 내가 뭐라도 된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난 아무것도 아니요. 나는 결국 없음으로 증명되어

내 존재 근거마저도 삭제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안으로 함몰될 운명임을 아는데까지 낮아지는 것이다.

그걸 세상에서 체험하며 살아가라는 것이 성숙이요. 그걸 몸으로 체득하며 살아 가라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지상 명령이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