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4:7~8)

로마서에서 죄를 가리움을 받는 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시편32편1절에서도 죄에 대하여 가리움을 받은자의 행복을 말합니다.
죄 의식은 수치를 동반합니다. 의복으로 입혀 주심으로 그 수치를 가리워 주시는 것입나다.

가리움을 받다는 수통태입니다. 아담 하와는 자기가 가리는 행위를 했지만 하나님이 입혀주는 옷만 내 수치가 가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죽 옷으로 지어 입힘으로 그들의 수치가 예수의 십자가 은혜로 가려질 것이란 것을 미리 보여준 모형적 사건인 것이죠.

아담의 범죄 후에 찾아 오신 하나님 가죽 옷으로 입혀 주셨잖아요. 그들의 수치를 그리스도의 의로 가리워 주신다는 것인데요.
우리가 예수로 옷입지 않으면 부끄러운 상태로 남아 있게 되지만 예수란 옷을 입게 되면 나의 수치와 정죄로 부터 자유하게 되는 겁니다.
이는 예수처럼 본성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죄인된 본성이 예수의 의란 옷을 입혀주신 형국으로 법적인 단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옷을 입지 않게 되면 죄의 형벌과 죄인이라는 수치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자기 몸을 가렸다는 것은 죄에 대한 수치를 느꼈다는 것이잖아요. 이런 자들에게 차라리 해결책이 있게 되겠지만,
벌거 벗은 채로 있으면서도 나의 수치를 모르는 자들은 그들이 바로 예수 부인하는 자들이요.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는 것이요.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라 하십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진의는..
이제 이 계명으로 너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그런 불순종이란 죄성을 폭로해 내시고 구원자 예수그리스도의 필연성을,
저들에게 계시 하겠다는 의지의 선언이었잖아요.

그래서 선악과 속에 우리가 사는 영생의 길 생명나무가 숨겨져 있다고 한 겁니다.
자 보세요. 선악과의 시험을 통하여 죄가 도입되는 과정이 없다면 인간은 죄인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켜 낼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과 한계성도 드러나지 않고 인간은 자신들이 하나님인양 착각하며 영 영 자신의 수치를 모르고 그 수치를 가려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살게 되겠죠. 이것이 과연 보시기에 좋았다 선언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그림일까요?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의 길도 열리지 않고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죄가 없으니 사망도 없겠죠.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니잖아요.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사는 부활도 경험하지 못하는 형국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 복일까요?

인간이 죄인 임이 드러나고 그 수치가 만천하에 폭로된 후에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그 죄가 씻겨지고 그리스도의 의로 가리움을 받는 자들이 진정 복이 아닙니까?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 한 것이요. 은혜는 타락 속에서 꽃이 핀다고 한 것입니다. 벌거 벗었으나 그 수치를 모르면서
'나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야,라며 자기 의를 자랑하는 자칭 의인들 이들에게는 은혜가 임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 수치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소경이라는 겁니다.
그는 소경이라 자기 죄가 보이지 않기에 나는 의롭다 나는 죄가 없다고 스스로 자화자찬 하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짜 소경은 자기 의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지 의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즉 병든자 가난한자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했어요.
그런데 저들은 병든자도 아니고 가난한자도 아니고 죄인도 아니면 예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자 맞네요.

진짜 하나님 앞에서 소경은 못 봐야 하는데 저들이 본다 하니 저들은 소경이 아닌 것이죠.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영적 세상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 것을 알아야 보게해 달라고 내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주를 의지할텐데, 주께로 나올텐데..
내가 벗은 줄을 알아야 나의 수치와 허물을 가리기 위해 홋이불이라도 끌어 댕겨 나의 치부를 가리려 할텐데...
그런 시도가 없다는 것은 벌거 벗었으나 그 처량한 신세를 모르고 있는 가련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계시록 3장에서는 이런 자들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소경이니 내눈을 뜨게 해달라고 주께로 나온 자가 복있는 자요. 내가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자라는 사실을 아는 자가 진정 복받은 자예요.

이처럼 나의 숨겨진 민낯을 보는 것이 사는 길이요. 하나님의 개입 하심의 첫 단추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민낯을 본 자는 절대로 자만할 수 없는 거고요. 지가 하나님이란 착각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라는 사실에 토를 달 수 없는 거예요.
그저 나의 입을 가릴수밖에요?

이처럼 자기 한계성을 아는 자는 절대로 행함이나 자유의지
이런 것을 논재로 삼지 못합니다. 도리어 자유의지를 주고 네가 한번 해 볼래 그럼 상을 줄께? 이렇게 나올까봐, 그것이 겁나는 것이죠.
왜 우린 하는 일마다 마귀 짓 아닌 것이 없고요. 하는 생각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오로지 이타적 삶을 살면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그런 고상함과 순수함이 인간 속에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요. 다만 그런것으로 착각할뿐이죠.
그거 아는 자는 그저 황공무지로소이다.
이말 밖에는 없고요. 단지 입을 가리고 낮아지지 않을 래야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을 인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이 터져 나올 수 밖에요.
한 순간도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벗어 던지면 망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진짜 성도라면 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