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등반에 나섰던 박영석씨가 실종되었다.
왜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는가?
아마도 그것은 산악인의 개인적 이유와 국민국가적 부추김이 혼재되어 있는 듯하다.
사람들이 산의 정상에 국기를 꽂는 이유는 무엇일까?
항상적으로 정상에 대한 등정은 산악인 개인의 도전과 함께 국기의 개양이라는 국가적 행위가 수반된다.
개인의 의지와 도전의 성공이 국가의 의지와 성공으로 전환된다.
산악인들의 등정 성공은 이런 일들을 국가적 경사로 전환시킴을 성공시키는 행위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매우 개인적인 사건을 이렇듯 국가적 문제로 확대함으로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개인적 욕망이 국민국가의 욕망과 오차없이 포개지게 되는 순간이다.
도대체 개인의 고봉에 대한 등정이 국가나 민족적 우월함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그들 개인의 대단한 의지에 대해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얼마 전 직원들과 갔다 온 한라산만 해도 힘들어 쩔쩔 맺는데 8천 미터 급 이라니 말해 뭐하랴 싶다.
하지만 이런 불굴의 산악인들 보다는 이렇듯 매우 개인적인 일들을 국가적 경사로 확대·전환시키는 이들이야 말로 더욱 대단한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 흐름이 일반화된 작금의 상황에서도 국민국가적 영토성이 여전히 유의미한 영역들로 존재함을 본다.
이런 행위들은 주로 신문사 등 국내 언론사들, 그리고 등산용품 회사 등과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근대국가의 출현에서 민족성의 제고에 대한 신문의 역할과 그로 인해 확대된 신문의 영역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이런 경향성의 지속이 보수적 관성에 맞물려 있으며 또한 이해가 얽힌 영토성과 관계되어져 있다.
방송의 경우 해외 미디어 자본과의 경쟁에서 여전히 국가적 장벽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일 것이다.
산악인의 생업의 유지 - 이는 단순히 산행에 대한 지원만이 아니라 일상적 지원과 그리고 이런 것들과 연관된 생업의 영유가 포함되어 있다. - 를 위한 욕망과 결코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그 근거 또한 모호한 산행에 대한 욕망이 자본과 국가의 욕망에 포섭된 결과로 이번의 사태는 일어난 것이다.
‘코리안루트’처럼 산악인 개인의 등산로의 개발이 국가적 이름을 달게 되는 것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국가적 부추김에 개인의 욕망이 포섭되면서 위험한 산행이 감행되는 것이다.
박영석씨는 그동안 적은 사고로 인해 엄홍길씨 보다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산악인 이다. 국가적 지원이나 자본에 의한 지원 없이는 산조차도 올라가기 힘든 여건, 이제 단순히 그들의 성공에 기대어 광고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영토성의 강조와 자본의 이익을 위하여 위험을 부추기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한국 산악인의 경쟁적인 14좌 등정을 단순히 개인적인 의지들이 표출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진정한 산악인으로 돌아오기 기대한다.
그들이 애국적 산행과 자본의 이익으로부터 자유로운 산악인으로 돌아올 때 진정으로 산악인 박영석은 생환할 것이다. 그 때 국가와 자본과 심지어는 산으로 부터도 자유로운 이들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이 아무리 많고 높은 산을 오르더라도 그들이 올라가는 곳은 오직 한곳, 결코 높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 자본의 이익이란 산뿐일 것이다

 

 

왜 이런 글을 복음 칼럼 란에 올렸는지 의아해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산악인의 자리에 자기 자신를 대입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교인이라고 하고 교회라고 하는 모임들이 과연 이런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일어나는 이런 모든 일들을 복음적인 시각에서 비추어보면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여 주실 이를 오늘도 기다리게 됩니다.

얼음빙벽이나 눈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듯이...........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