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블로그의 임시저장글에는 100여편의 글들이 임시저장되어 있습니다. 삭제될 운명이겠지요. 쓰다 만것도 있고 포스트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저는 여지껏 여러분들께 그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마치 그게 제 숙명처럼요. 이런것도 사명이랍시고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깟 제 글타래가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그저 은혜로 알아먹으면 다행인 쓰레기들이었죠.

 

그럼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한분이 메일을 보내주시고 여러분이 댓글을 남겨주셔서 그 마음 너무 소중하게 받았습니다.

 

저는 역사속 필연의 삶에 일종의 다른 내용을 캐치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실제 결말은 완성된 하나님 사랑의 내용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역사의 의미와 그 필연에서의 우리의 의지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고 할까요. 그 필연앞에 저는 소멸되는 시간과 도래할 내일의 시간 사이에 꽉 붙들려 있는 줄 알았었습니다. 즉, 시간에 걸려들어서 은혜가 고난의 형태나 견디어야 할 무언가로 진정 자유함의 의미가 혼동되었었죠. 말씀은 묵시를 그리고 종말을 확정지으셨고 그 과정을 그려주셨지만 사실 와닿지 않는 부분이 많았었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처럼 느끼지 못하는 병에서 오랜시간 있었거든요. 그 느낌에 의존하지 말라고 그렇게 목이 터져라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묵시를 논하고 영원을 노래하고 있는다 한들 못느끼죠. 그저 당장의 시간속 고통은 선명한데 그 영원의 삶과 그 자유함이 느껴진다고 한다는 분들은 아마도 쇼의 대가가 아닐까 합니다. 전 느낌을 말하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었습니다. 그 자유함과 그 영원을 사는 것은 느낌이 아닌 것입니다. 제가 늘상 말해온 말씀의 실제를 말함이었죠. 실제는 보이고 듣고 느끼는 우리의 오감이 감당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질서라는 단어와 같은 실제를 말함입니다. 즉, 말씀이 계시한 내용은 그렇게 실제로 나타납니다. 근데 못알아보거나 알아 보더라도 그게 중요치 않은 것이 되죠. 들판에 이름모를 야생화가 피고 지는 것이 여러분께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들께 진리란 그 이름모를 야생화가 피고 지는 것마져도 여러분들께 충분한 의미전달이 됩니다. 무엇을 전달하고 있을까요. 그 하나님 영광, 그 하나님이 기뻐하심과 그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말입니다. 단순히 여러분들이 자연을 보고 느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웅장한 자연이 여러분께 감격을 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거죠. 전 분명 내용을 말하고 있고 그 내용에 상관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전혀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것에 대하여 걱정마시기 바랍니다. 제게있어 사랑하고 선택하고 판단하던 역사속 필연으로부터 말씀의 언약으로써의 필연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더 어려울수 있는데 다른이들이 보기에는 별로 달라진것은 없어보이겠지만 분명 다르죠. 시간에 꽉 잡혀있는게 아니라 필연의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만 이것으로 전 은혜로 한발마져 떼었네요.

 

제 설명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 오히려 제 글로 인해 그 하나님의 은혜가 감추이는 것을 많이 발견하였습니다.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두 있구요.

포스트를 멈추려고 한 이유는 더욱 풍성하게 여러분의 삶에 필연으로 역사하실 은혜가 더 잘 이끌어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아니 알게 된 것이죠.

이미 성경속에는 다 드러나 있는 것이구요. 그것의 해석에 얽매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만가지 삽질을 다 하셔야 알겠고 여러분의 삶에서 말씀이 폭로하는 것에 항복하시겠고 그래도 모자르다면 여러분을 궁지에 몰리게 하시겠지요. 그래서 더욱 말씀 붙드실 것이고 은혜를 간구하시겠지요. 그렇게 우연처럼 지나칠 것입니다. 근데 말입니다.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만 기억하세요. 여러분의 부모도 여러분의 자식도 마누라도 남편도 여러분이 알고 지내시던 사람들도 스쳐지나치는 모든 사람도 세상도 상황도 고통도 모두 필연입니다. 이건 불교의 인연과 비슷하긴한데 인과가 중요한게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사랑으로 끌고가는 완성된 역사만 있다는 필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필연의 깨달음에 묶이지 마시고 그 하나님 사랑으로 끌고가는 완성된 역사를 발견하셨으면 합니다. 은혜는 그렇게 끌고 가는 것이고 그 여파가 여러분들의 숨통을 조여온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늘 입에 달고 다니시는 하나님 뜻이겠지~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다른 것은 그건 남의 얘기 하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필연으로 다가옵니다.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그 뜻을 알아먹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시고 그것을 반드시 내용으로 알게 되십니다.

 

성경의 지식적 탐독도 진리를 깨우치려는 시도도 사실 많이 비판하였었는데 그마져도 필연이기에 저는 더이상의 비판이나 설명이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칼로 수박을 어느면을 자르더라도 그건 잘못된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시겠죠? 여러면을 잘라야 먹기좋게 잘립니다. 그러나 자르기만하고 먹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비판이 힘이되어 비판에 머물러버리는 동안 진정 말씀을 은혜로 못먹는 것이죠.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잘려나가야 조금 깨우칠지 모르나 사실 그 또한 무의미합니다. 잘려지기만 할뿐 못먹거든요.

 

여러분들이 말씀으로 친구를 난도질하는 것이 예수를 칼로 면을 잘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난도질만 하고 예수를 안먹으면 그건 그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구요. 그렇게 죽이는 여러분께 예수는 몸을 주셨습니다. 그 친구는 어찌 되었을까요. 그 친구도 난도질당해서 예수가 되어 여러분께 몸을 주는 것이죠. 친구는 예수이자 여러분들입니다. 그 친구가 말씀이고 예수가 말씀입니다. 그리고 곧 여러분들도 말씀입니다. 은혜가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래서 줄구장창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구요. 그 죽음은 여러분들을 우울하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행동원리로 기독교리로 뽑아낼 내용이 아닌것은 분명하죠?

 

그러니 그 비판의 칼날을 다른 친구들에게나 자신에게나 그렇게 학대하시거나 살해하는 것을 하실때 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필연의 삶은 여러분들에게도 반드시 있습니다. 말씀이 이미 계획하셨다고해서 의미가 없는게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삶에서의 로봇과 같은것이 아니란 의미죠. 차라리 입출력이 확실한 로봇이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 하나님 사랑을 알아가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진리를 알았더라면 분명 필연의 내용을 아셨다는 말인데 그 인과에 묶이지 마시고 그렇게 멋대로 자유하시지 마시고 그 하나님 사랑으로 완성되어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들께는 예수만 나오죠. 말씀만 나옵니다. 육신탓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 성결의 주인이시니까요.

 

진리를 알았다고 막바로 끝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 진리가 내용이 되어야지요. 이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완성은 작은 예수가 되셨을때 되는 것입니다. 경거망동하는 순간, 스스로 진리가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그저 진리를 알고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마치 뭔가 깨달은 도인처럼 이 역사를 유유자적 하시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당부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은혜를 말하여야 하고 필연의 삶을 말씀으로 바라보시게 되겠죠.

 

여러분들께 남을 마지막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찬양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영광입니다.